4. 듣는 자의 품격, 경청

공감과 이해의 미학

by 바나나 슈즈

사람들은 흔히 말을 잘하는 법, 설득하는 기술,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배우려 한다.


나도 학교를 다니며 직장 생활을 하며, 한 때의 베스트셀러였던 설득의 심리학을 읽으며 깨달은 자 마냥 행동하였고, 발표 잘하는 방법, 떨지 않고 말하는 방법 등을 찾아다니며 내 안의 것을 쏟아내는 데에만 집중해 왔는데.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듣는 기술'이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 들어야 한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소통의 본질이다.




정관 1년, 장안.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당태종 이세민은 매일 아침 조정에 들어서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새로운 황제로서 무력을 넘어 정치의 품격을 증명해야 할 때였다. 그 곁에는 한 사람, 재상 위징(魏徵)이 있었다.


위징은 원래는 이세민의 정적인 태자 이건성의 참모였다. 그런 그를 이세민은 죽이지 않고 등용했다. 그리고 위징은 그 은혜에 보답하듯, 아니, 오히려 더 가차 없이 직언을 올렸다.


당태종이 어느 날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한다.
“위징은 나를 잠자리에 들 때도 두렵게 만든다(魏徵令我寢不安席).”


그러자 신하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를 곁에 두십니까?”


당태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바로 그 때문에 두는 것이다. 나를 두렵게 하는 사람 없이는 나의 잘못을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징은 황제가 잘못하면 가차 없이 지적했고, 당태종은 그 모든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황제와 신하를 넘어, 정치적 긴장을 유지한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통치 시기로 평가받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다.


당태종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군주가 거울 삼을 세 가지가 있다. 동경(銅鏡)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사람의 말은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하며, 역사서는 흥망을 비추어 준다. 나는 위징이라는 살아 있는 거울을 잃고 말았다(以銅為鏡, 可以正衣冠; 以古為鏡, 可以知興替; 以人為鏡, 可以明得失. 徵死, 朕亡一鏡矣).”


이 말은 위징이 세상을 떠난 직후 당태종이 남긴 애통한 말이었다. 위징의 직언은 말의 용기였고, 당태종의 경청은 말의 품격이었다. 듣기 싫은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 그 권력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듣는 자의 품격이 나라의 품격을 바꾼다.



『논어』에는 공자의 이런 가르침이 있다.


"군자는 말은 어눌해도 행동은 민첩하다(君子訥於言而敏於行)." 여기서 '눌언(訥言)'은 깊이 생각한 후에 신중하게 말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신중함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상대의 말을 진정으로 듣는 데서 비롯된다.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리더들은 대개 탁월한 '듣는 사람'이었다.


세종대왕이 그 대표적 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신하들의 의견을 들을 때 매우 집중했으며, 때로는 상반된 주장도 끝까지 경청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런 세종의 태도는 정치적 수완이기도 하겠지만 진정한 듣기의 미학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대의 말속에 담긴 진심과 의도를 파악하려는 노력, 그것이 바로 듣는 자의 품격이다.


동양 고전에서도 듣기의 품격은 중요한 덕목으로 다뤄지는데, 『장자』 「인간세」편에는 듣기의 본질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장자는 마음을 비우고 잡념을 제거하는 '심재(心齋)'의 상태를 강조하며, 선입견 없이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말을 듣는다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파장-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속에 담긴 의미와 감정까지 온전히 받아들이는 깊은 듣기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깨달음을 강조하며, 언어를 넘어선 깨달음을 추구했다. 전해지는 '염화미소(拈花微笑)' 일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처가 말없이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만이 미소로 답했다는 내용인데, 진리가 언어가 아닌 침묵 속에서 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 문인 이이(李珥)도 제자들에게 경청을 자주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저서 『격몽요결』에는 상대의 말을 존중하고 그 의미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듣기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적극적 경청(active listening)'의 중요성은 빠지지 않는다. 경청은 말의 내용에 더해, 그 말에 담긴 감정과 의도까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경청이 상담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보았다.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듣기의 품격에 대한 논(論)을 찾자면 끝이 없다. 문학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간 내면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통로다. 그런 문학에서 ‘듣기’가 중요한 주제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단순한 사건의 전개로 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것을 가만히 품고 되새기며, 그 안에서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말 한마디에서 출발해, 점차 기존의 도덕과 질서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자아를 향해 나아간다. 데미안은 강요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던지는 말 속에는 상대가 스스로 듣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경청의 과정이야말로 싱클레어가 외부의 목소리를 자기 안의 진실로 전환해나가는 여정이다.


『싯다르타』에서도 마찬가지다. 고행도, 지식도, 종교적 교리도 결국 궁극의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싯다르타가 마지막에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강물의 소리를 들으며, 말없는 자연의 속삭임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다. 그는 듣는다. 말이 아닌 존재 자체의 울림을. 그것이 진정한 앎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문학 속의 인물들은 ‘말을 잘하는 법’보다 ‘어떻게 듣는가’에 따라 더 깊은 자각과 성장에 이른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우고, 타인의 진실에 접속하려는 능동적 지혜다.




서설이 길다.

아. 어렵다. 그냥 귀가 들린다고 잘 듣는 게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듣기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TV를 끄고, 모든 주의를 상대에게 기울이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고,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는 등의 비언어적 신호도 중요하다.


둘째,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 즉각적인 평가나 반박을 삼가는 것이다. 장자가 말한 '심재'의 상태는 바로 이런 열린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셋째, 공감하며 듣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과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하며 들어야 한다. '그럴 수 있겠네요' 같은 짧은 반응도 효과적이다.이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다.


넷째,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랬군요", "더 말씀해 주세요"와 같은 짧은 반응을 통해 내가 듣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째, 질문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그 말씀의 의미를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와 같은 질문은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한다.


듣기의 기술을 이렇게 나열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 어린 태도다. 기술은 연습으로 익힐 수 있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듣기의 시작은 기술이 아닌 자세에 있다.




중국 전통 격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린다(良藥苦口, 忠言逆耳)"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귀에 거슬리는 충직한 말도 끝까지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선택적으로 듣는 것은 진정한 듣기가 아니다.


앞서 말한 예시들은 ‘듣는 자의 품격’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말이 넘치는 세상에서 진정한 듣기의 미학을 되새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통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말하기 바쁜 세상에서, 잠시 멈추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여유. 그것이 바로 참된 소통의 시작이다.


듣는 자의 품격은 말하는 기술보다 더 깊고 더 어려운 예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과 관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예술을 기꺼이 배워야 한다. 마음을 다해 듣는다는 것은 곧 사람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듣는 자의 품격이자, 공감과 이해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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