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말하지 않음으로 전하는 의미

침묵의 미덕

by 바나나 슈즈

정조 즉위 초기, 조선 정조 1년(1777년)의 일이다.


권력을 장악한 홍국영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정조는 의외의 방법을 택했다. 침묵이었다. 여러 날 동안 정조는 홍국영의 제안에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국정을 보았다. 마치 그 자리에 홍국영이 없는 것처럼.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던 홍국영의 얼굴에 점차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결국 그는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조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대의 충정은 알지만, 나라를 위해 잠시 쉬는 것이 좋겠소."


후에 정조는 가까운 신하에게 말했다고 한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강한 명령이 될 수 있다." 이 일화는 『정조실록』에 직접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정조의 정치적 지혜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어떤 웅변보다 깊고 분명했던, 정조의 침묵이 남긴 메시지를 떠올려볼 만하다.


동서양의 고전들은 하나같이 침묵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했다. 겉보기에 말을 아끼라는 충고 같지만, 실은 참된 지혜가 때로 말을 넘어선다는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다. 진정한 앎에 이른 사람은 굳이 그것을 말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진리가 있어, 이런 깊은 진실은 침묵 속에서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안연(안회)은 이런 침묵의 지혜를 체득한 인물이었다. 『논어』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안연은 세 달 동안 인(仁)에 어긋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은 하루나 한 달 정도였다." 다른 제자들이 공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는 동안, 안연은 주로 침묵하며 깊이 생각했다.


이런 그를 두고 다른 제자들은 어리석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자는 달랐다. 그는 안연을 높이 사며 이렇게 칭찬했다.

"회(안연의 이름)는 나에게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것 같으나 그가 물러간 뒤 그의 행동을 살펴보니 내 가르침을 잘 실천하고 있도다(回也不愚, 退而省其私)."


안연의 침묵은 무지의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이해와 실천으로 이어지는 지혜의 침묵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침묵의 첫 번째 단계, 침묵함으로써 배움을 발견한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소극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더 깊은 깨달음으로 가는 문이기도 하다. 도가 사상가 장자는 『장자』「대종사」편에서 '좌망'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했다.


장자의 친구 안성숙이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 하나이까?"


장자가 대답했다.

"사지백체를 풀어 놓고, 귀와 눈의 작용을 쫓아버리고, 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면, 대도와 하나가 되니, 이것이 좌망이다."


이 대화 후 안성숙은 깊은 침묵에 잠겼고, 장자는 그 침묵 자체가 깨달음의 시작임을 알아보았다. 말로 설명하는 것의 한계와 고요히 생각하는 명상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순간이었다.


서양 철학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 마지막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라고 남겼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자만을 경계하고, 침묵의 영역을 존중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침묵은 때로 강력한 저항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 1807-1863)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그의 외할아버지 홍경래가 역모 혐의로 처형된 후, 김삿갓은 세상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방랑 생활을 택했다. 자신의 신분이나 과거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고, 질문을 받으면 시로만 답했다.


한번은 어떤 양반이 그의 신분을 물었을 때, 김삿갓은 말없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떠났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이 시에서 까마귀는 권력자들을, 백로는 자신과 같은 순수한 영혼을 비유한 것이다. 직접적인 비판 대신, 시적 은유를 통해 그는 불의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전했다. 김삿갓의 침묵은 그의 작품을 통해 오히려 더 강한 목소리가 되었다. 누구나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힘있는 메시지가 된다는 것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부당한 요구나 상황에 맞서 단호하게 침묵을 지킬 때, 그 침묵은 말이 아닌 태도로 전하는 경고가 된다.


슬픔에 잠긴 친구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마음은 가득한데, 어떤 말도 그 깊은 슬픔에 닿지 못할 것 같은 느낌. 그럴 땐 말보다 침묵이 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미국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가장 깊은 소통은 종종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이해할 때, 말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침묵이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차원의 연결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많은 심리 상담 전문가들은 ‘적극적 경청’에서 침묵의 순간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상대의 말이 끝난 뒤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그 말의 여운을 잠시 머금는 시간. 바로 그 순간, 진짜 '듣기'가 시작된다.


누군가가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 위로의 말을 쏟아내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것. 말없이 함께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때로는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된다. 말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고, 그럴 때 침묵은 말보다 더 깊은 공감을 전한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말하지 않음'의 미학은 빛난다.


현대 소설가 황순원의 『소나기』를 생각해보라. 소년과 소녀의 감정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자연 풍경과 소박한 대화로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은근히 표현했다. 이런 절제된 표현이 오히려 더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서양 문학에서도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은 유명한데, 그는 "좋은 글쓰기는 빙산과 같아서, 8분의 7은 물 아래 감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것을 드러내 말하기보다, 많은 부분을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는 뜻이다.


요즘 우리는 말을 멈출 틈도 없이 살아간다. 카톡에 읽지 않고 남겨둔 메시지에는 왜 읽지 않냐며, 읽고 답을 하지 않은 메시지에는 왜 답을 하지 않냐며. SNS에 생각을 올리고, 회의에서 의견을 표현하고, 대화 중 침묵이 흐르면 어색함을 느껴 서둘러 그 공백을 채우려 한다(오디오가 1초도 비지 않은 쇼츠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이런 환경에서 침묵의 미덕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침묵의 힘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소통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침묵을 배우는 첫 번째 단계는 불편한 침묵도 참아내는 연습이다.

대화 중 잠시 말이 끊겼을 때, 서둘러 그 공백을 채우려 하지 말자. 그 침묵을 견디며, 그 안에서 생겨나는 생각과 감정을 관찰해보자. 그 어색함조차, 더 깊은 이해로 가는 징검다리일 수 있다.


두 번째는 경청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관리들에게 이런 조언을 남겼다. 백성의 말을 끝까지 듣고, 대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인데. 겉으로 보기에 예절 문제 같지만, 실은 더 나은 소통과 판단을 위한 실용적 지혜다.


세 번째는 침묵의 순간에 집중하는 연습이다.

아침 햇살의 밝음을 느끼는 순간, 눈 내리는 겨울 밤의 고요함, 사랑하는 사람과 말없이 함께하는 시간 - 이런 침묵의 순간에 깃든 아름다움과 의미를 느껴보자.



소셜 미디어와 24시간 뉴스가 끊임없는 말과 소리를 쏟아내는 요즘, 침묵의 가치는 더욱 소중해졌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잠시 멈추고 생각할 시간, 말하기보다 듣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논쟁이 격화될 때, 잠시 침묵하고 상대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어떨까? 화가 날 때 즉각 반응하는 대신, 잠시 말을 삼가고 생각할 시간을 가진다면 어떨까?


옛부터 "화가 날 때 한 말은 평생 후회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감정을 다스리고 침묵을 택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한 시대이다. 정조가 홍국영에게 보여주었듯이, 때로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노자가 일깨웠듯이, 참된 지혜는 때로 말을 넘어선다.


말의 품격을 높이려면, 역설적이게도 말하지 않는 법도 배워야 한다.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말 대신 침묵으로 더 깊이 소통하는 순간을 만들어보자.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더 큰 지혜와 깊은 연결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침묵의 미덕,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깊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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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소개된 역사적 인물의 말과 행동은 사료를 참고하였으며, 일부 대화와 표현은 글의 흐름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학적으로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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