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담집
준규는 머리카락에 붙은 물방울을 털어냈다. 그야말로 난데없는 소나기였다. 창밖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고, 아스라이 물 튀는 소리만 소란스러웠다.
시간은 해 질 녘이 지난 오후 일곱 시. 해가 짧은 계절이라 어스름이 금방이었다.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준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문화제 준비를 하다가 집에 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미술부 부원들은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귀가한 지 오래였고, 함께 채색을 맡았던 혜정은 잠시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혜정은 준규보다 육 센티는 더 키가 컸고, 말투도 중학생처럼 어른다웠다. 여자들의 성급한 이차성징이 준규는 못마땅했다. 그녀 옆에 설 때마다 꼬맹이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고, 용기를 내어 고백해 봤자 상대해 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나눴던 대화만 해도 그랬다. 단둘이서 작업을 한다는 설렘도 잠시, “너는 스케치를 해, 나는 색을 칠할 테니까.”라든지, “거기는 초록색이 아닌 보라색으로 칠했어야지.”라든지, 영양가 없는 말다툼만 나눴을 뿐이었다. 혜정은 남동생을 대하듯이 준규를 몰아붙였고, 마음 상한 준규는 괜스레 짜증을 부렸다. 나중에는 서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
말을 꺼낸 뒤에야 준규는 혜정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한지도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먼저 가방을 챙겨 두고 기다려봤으나, 십 분, 이십 분이 지나도록 혜정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창밖에서 튀는 물방울 소리만 거세지고 있었다.
고민하던 준규는 복도로 나가봤다. 한밤중의 학교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창문 하나하나마다 불길한 존재들의 시선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 즐겨 시청했던 공포물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교실까지 돌아왔다. 혜정에게 전화를 걸어 보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스마트폰 전원도 방전돼 있었다. 보조 배터리라도 챙겨왔어야 했는데…….
고민 끝에 정문 근처 수위실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수위 아저씨에게 우산을 빌리거나, 혹은 혜정을 찾기 위한 교내 방송이라도 틀어봐야 했다. 마룻바닥만 바라보며 5학년 건물의 출입구까지 걸어봤지만, 힘껏 문을 당겨봐도 알루미늄 새시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났다. 문틈 사이로 어린아이 손가락만한 쇠사슬이 비쳐 보였다. 미술 부원들이 작업 중이라는 것을 까먹고 잠가 버린 모양이었다. 유리창에도 보안 업체에서 설치한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고, 5학년 어린이가 학교 창문을 깨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준규는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조명을 켜두면 수위 아저씨가 확인하러 올 것이다. 그때 적당히 투정을 부리며 현관문을 열어 달라 부탁하면 될 것이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순간 건물의 모든 조명이 꺼지며 어둠 속에 방치됐다. 벽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스위치를 눌렀지만, 티브이도, 에어컨도, 선풍기도, 심지어 비상등마저도 침묵을 지켰다. 싸늘한 빗소리만 볼륨을 높인 듯이 거대해졌다.
준규는 겁에 질려 현관문까지 뛰쳐나갔다. 책상에 정강이를 부딪혔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마저 없었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하며 머리털이 거꾸로 곤두서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바닥에 나동그라지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현관문에 매달렸다. 힘껏 문고리를 흔들어봤지만, 여전히 쇳덩이 흔들리는 소리만 덜컹거릴 뿐이었다.
교실 유리창이 일제히 떨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허공 위에서 떠돌아다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시선에 살갗이 따끔거리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았으나,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준규는 혜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화장실에 갇혀 울고 있을 혜정의 눈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어둠 속에 뛰어 들어갈 용기가 나진 않았다. 5학년짜리 어린애가 아닌 충분히 강한 남성이었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차가운 공기와 바람, 빗줄기를 얼마든지 헤치고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 연약한 소년에 불과한 그에게는 무언가에 푹 젖어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이 빗줄기든, 진심이든 간에.
두려움과 빗소리에 판단력이 흐려지려는 찰나, 물방울 깨어지는 파열음이 겹겹이 쌓이면서, 무거운 벽이 되어 소년의 몸을 밀어붙였다. 물줄기로 사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꿈결처럼 방향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마침내 혜정의 손이 소년의 어깨에 닿았다. 그녀 역시 겁에 질려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어두운 복도를 걷다가 방향을 잃었다고 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준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다만 준규와 함께라면 유리창을 깨고 차가운 비에 몸을 적시더라도 괜찮을 거라 여겼을 뿐이다. 다음 날 선생님께 혼나더라도, 깨진 유리창을 변상하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용기였으니까.
소년과 소녀는 여전히 유리에 갇혀 있다. 미숙함이 만들어낸 공포에 갇혀있는 준규를 보며 혜정은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조바심 내지 말자. 언젠간 그도 성숙한 남자가 되어 사랑에게서 오는 공포를 이겨내게 될 테니까. 유리창이 깨지고, 온몸이 폭우에 젖어버릴 때가 찾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