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을 자는 건 포기한 지 오래다. 마음은 늘 분주하고 평점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는 왜 이렇게 여유가 없을까? 그렇지만 최대한의 노력으로 얼굴에 몸짓에 표시가 나고 싶지는 않다.
오늘은 지난 금요일 아들이 입시시험을 치른 예고의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다. 큰아이 때도 그랬지만 나는 내가 먼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아들의 인생이니까 아들이 확인하고 나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내가 볼 자신이 없기도 하다. 합격이라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불합격이라면... 내가 정면으로 그 충격을 받기보단 아들이 확인해서 한번 흡수되어 굴절 반사된 충격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는 일상 속으로 총총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는 잠시나마 잡생각을 떨칠 수 있으니 낫다. 오늘은 우쿨렐레 합주가 있는 날이다. 합주가 좋은 건 나 혼자만에 연주가 아니고 내 몫의 연주를 해내야만 다른 연주자에게 민폐가 안되니 조금 더 집중을 요한다는 점이다. 한 달여 남은 연주회 리허설연습으로 오전시간을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집에 오니 오후 1시가 조금 넘었다. 자주 들여다보는 예중예고 카페에 들락날락거리고 빨래를 개다가, 고양이 똥을 치우다가, 청소기를 돌리다가 집 정리를 하다가 뭐 하나에 집중이 안된다. 오전에 잠깐 비도 뿌렸고 날도 궂어서 찐한 해물짬뽕이 무척이나 간절했는데 생각뿐 막상 먹으려니 부담스러워 뭉그적거리다 점심때를 놓쳤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 라면을 끓였는데 너무 맛이 없어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속이 안 좋다. 또 카페에 들어갔는데 발표예정시간보다 일찍 합격자 발표가 낫나 보다. 합격소식이 쏙쏙 올라온다. 초조하다. '내가 확인해 볼까? 아니야 차분히 기다리자!' 혼자 이랬다 저랬다 고민만 수십 번 했다. 책도 안 읽히고, 글은 당연히 안 써지고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낮잠도 깊이 자 지지 않는다. 학교 E-알림이에서 아들 학교 시정표를 확인하니 오늘은 15시 50분에 끝나는 날이다. 종례를 하고 아무리 늦어도 16시 30분이면 집에 올 것인데 시간이 정말 정말 안 간다. 그래도 꾹 참았다.
아들은 꽤 오래전부터 영화감독이 꿈이라고 했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나름 소재와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엉뚱해서 나는 아들이 써놓은 글을 읽는 걸 좋아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아들도 예고를 진학시켜 볼까 생각했었는데 막상 큰아이 예고생활을 지켜보면서 공부와 실기를 다 챙겨야 하고 내신도 수능도 준비하는 게 개인의 비중이 너무 크다 보니 둘째 아이까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을 하고는 일반고 진학으로 아이와 결정을 하고 학업에만 몰두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엄청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아이의 모든 관심사는 기승전 영화이기에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1, 2학년을 보내고 올 3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끝나는 시점에 갑자기 남편이 아들 예고준비시켜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갑자기?" 남편의 뜬금포 한마디에 잔잔한 호수에 파장이 어마어마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딸도 "엄마 내가 예고를 다녀보니까 힘든 건 힘든 거고 좋아.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거나 꿈을 가지고 노력해서 입시를 치러 진학을 한 아이들이라서 생각도 깊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물심양면으로 지지가 있지 않으면 올 수 없는 곳이니 아이들이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고 열심히 준비하고 착해! 도전시켜봐~!" 하고 권한다. 그래 어차피 도전은 아들이 하는 거고 도전한다고 해서 다 합격하는 건 아니니 선택은 당하여지는 거니깐 도전 안 해볼 이유가 없다 싶었다.
짧은 준비기간이니 부담도 없고, 되면 좋지만 안돼도 글쓰기는 고등학교 가서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며 최대한 희망회로 돌려보면 나중에 고3 논술전형 쓸 때도 도움 될 거라는 나름의 도전이유를 계속 생각해 냈다. 아들에게 슬며시 운을 띄웠다. 아들은 좋아하는 거 한다고 하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실기준비에 앞서 아이가 도전할 학교에 같이 가보았다. 마침 학교에 미술과 전시회 기간이라 외부 방문객들이 많았다. 조금은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학기가 끝나기 전이라 아직 수업 중인 교실도 많았다. 아들은 가고 싶은 영화연출과 가 있는 건물을 혼자 둘러보러 들어갔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려도 나오지 않더니 또 한참이 지나 나온다. "여기 재밌네~" 무심한 듯 한마디 한다. 그런데 눈빛은 반짝인다. 1학기 기말고사 끝나고 7월부터 실기준비 시작이라 짧고 굵게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아들은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영화감독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한 첫발을 띨 준비를 가장 더웠던 올여름 뜨겁게 시작했다.
4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2학기가 시작되고 과학고, 영재고를 시작으로 특목고 입시가 치러졌다. 우리 아들도 지난주에 시험을 보았다. 시험을 보고서는 항상 자신감 풀 충전되어 있어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찬 허세로(엄마인 나에게만)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했던 아들이 이번엔 좀 달리 얘기한다.
"열심히 썼어, 그런데 평소 보다 좀 못쓴 것 같아." 쿵~! 솔직한 한마디 이건 오히려 더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를 했다. "주님~~"
5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들이 집에 안 온다. 평소 아들 성격에 합격이었다면 확인 즉시 전화 오고도 남았으니 이미 떨어진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집에 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아 기다리다 지쳐 전화를 했다.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쉽지만 떨어졌어. 떨어졌지만 꿈을 포기한 건 아니야. 빨리 먹고 들어갈게"
누굴 닮은 건지 초 긍정 마인드 유전자를 뼛속까지 장착하고 태어난듯한 우리 아들은 밝은 건지 밝은척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정작 나야말로 아들이 떨어져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자식일에는 쿨해지지가 않는다. 아들 목소리를 듣고 나니 폭풍눈물이 쏟아진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처음 시작부터 크게 무게를 싣지 않겠노라 했는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괜찮지가 않은 양가적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 시간 텅 빈 집에 혼자서 아들의 준비기간의 애태움과 불합격 소식과 아직 끝나지 않은 고3딸아이 입시를 앞둔 초조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무슨 사연 있는 사람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어마어마한 뒤끝작렬의 소유자인 나는 아들에게 미리 준비해 둔 응원의 메시지도 보냈다가 한 번씩 욱하면 준비과정에서의 아쉬운 점을 얘기했다가가 내 마음속 다중이가 수시로 튀어나온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도 일찍 결과 확인을 했단다. 아들에게 괜히 장난을 친다. "방학 때 그동안 소홀이 한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뭐 윈터스쿨이나 가~" 고3이 딸도 동생 소식에 공부하다 한 시간쯤 일찍 나와 아들이 좋아하는 31가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아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우리 가족이 다 모이니 내 마음이 조금 놓아졌다. 나는 안다. 이 아이는 제 꿈을 꼭 찾아 갈 거라는걸...그제야 잠이 쏟아져 내렸다. 평소 같으면 아이들 다 잘 때까지 절대 먼저 자는 법이 없는데 가족이 다 들어오니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참으로 오랜만에 단 몇 시간이었지만 깊이 잘 수 있었다. 이렇게 또 우리 가족의 역사 한 페이지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