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아내와 ISTJ남편의 치열한 러브스토리
삶의 추함을 인정하고 낭만주의를 뛰어넘어 짧고 뜨거운 사랑을 일생으로 확장하는 일에는 철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랑이 성숙함에 이르는 길에서 두 사람은 토라짐, 갈등, 다툼, 배신 등을 겪는다. 일상의 삐끗거림은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
알랭드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일상의 삐끗거림이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는 오늘의 문장으로 우리의 사랑에 대한 성찰을 해볼까 한다.
요즘 아주 오랜만에 남편과 사이가 좋다.
이렇게 남편과 사이가 좋은 날이면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가 자꾸 생각난다.
내가 20살, 남편이 22살 때 처음 만났으니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영화처럼 순간순간들이 생생히 기억에 남고, 오히려 시간이 더해지며 미화까지 됐다.
오늘은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스무 살.
새내기가 되었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원하던 대학교가 아니었고, 대학교의 낭만도, 캠퍼스의 로망도 없이 지구가 망했으면 하는 심정뿐이었다.
그렇게 대충 시간아 흘러라~~ 하며 선배들이 사주는 술만 쳐 마시고, 술살만 뒤룩뒤룩 쪄가며 스무 살을 보내고 있을 무렵, 술자리에서 선배들 사이에 항상 나오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그 선배는, 21살에 벌써 고시에 1차 합격했고, 남자가 봐도 참 괜찮다 등등의 온갖 칭찬들과 함께 지금은 서울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2학기에 복학을 한다는 이야기들.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하고 흘려 들었는데,
1학년 2학기 교양 수업 출석을 부르는 교수님 입에서 그 선배의 이름이 불렸다.
‘어? 선배들이 말한 그 선배 맞나?’ 하고 뒤를 돌아 쳐다봤는데
.
.
잘. 생. 겼. 다.
'와~~ 선배들이 그렇게 괜찮다고 칭찬할 때 잘생겼다는 말은 없었는데 올~~~'
그렇게 1주일에 1번 교양 수업 시간마다 혼자 두근두근 짝사랑이 시작됐다.
그러다 어느 주말.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척오빠가 주말에 기숙사에서 뒹굴거리는 내가 안쓰럽다며 같이 놀아줄 선배한테 내 전화번호를 알려줬다고 했다. 밥이나 한 끼 얻어먹을까 하고 만난 선배는........ 바로 잘 생긴 그 선배였다.
You're my destiny~~~~
이렇게 선배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선배들이 그렇게 칭찬을 하는 인성에다, 고시 1차 합격에, 잘생겼고, 옷도 꽤 잘 입는 걸로 보니 잘 사는 집 아들 같으니,
결정했다. 꼬시기로.
뭐.. 이렇게 말하는 거 좀 부끄럽고, 아무도 믿지 않지만, 이 외모와 이 외적 조건으로 초 3 경찰서장님 아들과의 첫 연애를 시작으로 20살까지 단 하루도 연애를 쉬지 않았던 나의 모든 연애 노하우와 그동안 보았던 모든 드라마의 연애 정석을 대입하여 선배 꼬시기에 돌입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선배는 모솔이라고 했고, 몇 번 만나보니 꽤 순진하다. 선배 언니들 몇 명이 대시를 했지만 모두 차였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나는 나만의 성공 법칙이 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매우 내성적이고 사람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선배 같은 남자에게는 직접 들이대면 거부감만 커지기 때문에 우연의 법칙을 이용해 서서히 나를 물들여야 한다.
선배의 동선은 매우 단순하다.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중간중간 수업을 들으며, 점심은 기숙사에서 먹는다. 나도 기숙사에 살고 있으니 점심시간에 기숙사 식당에서 만날 수 있으며, 교양수업도 같이 듣고, 같은 사회대 건물이며, 우리 학과실에서 도서관은 정면으로 보인다.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조건들은 모두 준비가 되었고, 이제 나의 초능력을 발휘할 시간이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요, 제가 사실 초능력이 하나 있어요. 군중 속에서 제가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주변인이 아웃 포커싱 되면서 그 사람만 크고 또렷하게 보이는 능력이에요. 진짜 비밀이에요)
학과실에서 도서관 정문을 째려보고 있다가 선배가 책이나 가방을 들고 나타나면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다! 그럼 선배의 동선을 예상하고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가다 우연히 한 번! “어? 선배 안녕하세요”,
선배가 빈 손으로 친구들과 나오면 후문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니 그 뒤를 따라가서 같은 식당에 들어가면서 우연히 두 번! “어? 선배, 안녕하세요”,
선배가 공부하는 선배들과 나오면 기숙사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니 얼른 그 뒤를 따라가다 운이 좋으면 식당에서 선배 뒤에 줄을 서거나,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서 우연히 세 번! “어? 선배, 안녕하세요”
(몇 번 지켜본 결과, 선배는 거의 같은 시간에, 기숙사에서 주로 밥을 먹었기에 변형 동선까지 계산해서 우연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3~4번을 마주치면 그다음에는 선배가 먼저 “어? 미리야, 안녕! 밥 같이 먹을래?”한다.
1단계는 가볍고, 그냥 인사만 하고 넘어가는 정도의 우연이였다면, 이제는 남자에게 나를 각인시킬 수 있는 우연을 만든다.
먼저, 주변 지인들을 활용해서 선배가 참석하는 술자리에 꼭 낄 수 있도록 주변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
술자리가 준비됐다면, 술자리에서 선배와 최대한 멀리 앉지만 선배 시야에는 걸리는 반대편 자리를 선점한다. 술을 겁나 못하는 나라서 일단 맥주 1잔만 마셔도 온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이 풀리기 시작해서 선배들이 취했다고 생각하고 술을 덜 권한다. 그럼 정신은 멀쩡하지만 술이 취한 척 애교와 헤롱거림을 장착한 채 그 선배 빼~~~ 고, 다른 선배들과 신나고 재미있게 논다. 그러면서 눈치껏 화장실을 오가며 자리를 점점 선배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여 옆에 앉은 후, 절대!! 선배에게는 말을 걸지 않고, 선배의 앞사람, 옆 사람하고 신나게 논다. 그리고 선배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한숨과 내가 지금 매우 힘들지만 이 자리를 참아내고 있다는 표시를 살짝살짝 해준다. 그럼 선배가 먼저 말을 건다 “미리야, 괜찮아?”. “아! 네! 선배님!! 저는 매우 괜찮습니다!!”(하며 힘든 척과 20살의 귀여움 발사)
여기에서 나의 예상 포인트가 빗나갔던 사건.
보통 남자선배들은 여자 후배가 취해서 비틀거릴 때 잡아주면서 작업을 많이 건다. 나도 이 포인트를 살려 선배 앞에서 비틀거릴 생각이었는데, 나보다 먼저 선배를 좋아하고 있던 언니가 선배에게 팔짱을 끼자 이 남자, 그 팔짱을 뺀다.(엥? 보통 남자 선배들은 다 좋아하던데) 그리고는 선배의 여자 동기가 선배에게 어깨동무를 하자 그 팔도 뺀다.
와~~ 돌부처 나셨네. 그렇다면 나는 절대 이런 스킨십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작전 변경.
이때 이 남자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고, 잘하면 5단계를 넘어 6단계 작전을 새로 만들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 작전은 이 남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100%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고, 이 작전에서 전략대로 넘어오지 않는다면 이 남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니 마음을 접어야 한다.
선배와 함께 술자리를 한 다음 날,
1단계와 같은 방법으로 선배 눈에 우연히 마주칠 수 있도록 동선을 준비하고, 매우 힘들고 창백한 얼굴 상태를 만든 후, 선배를 만나도 못 본 척 지나간다.(1번) 선배가 공부하는 도서관에서 선배 눈에 걸릴 만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엎드려 있는다(2번), 선배가 화장실에 갈 때 슬쩍 나가서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고, 다시 못 본 척한다(3번) 그럼 선배에게 문자가 온다.
“미리야,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생리통이 있거나, 몸 상태가 조금 좋지 못 한 날. 혹은 기분이 매우 우울해서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날. 1단계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 우연히 마주치며, 선배에게 기운 없고, 우울하고, 슬퍼 보이는 나를 보여준다. 인사할 때도 기운 하나 없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거나, 그냥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간다. 이럴 때 선배가 말을 걸거나, 문자를 보냈을 때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첫 번째 실전의 날.
선배와 함께 듣는 교양 수업 시간이 있던 날, 마침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생리통이 있는 날은 걷기도 힘들 정도라 평소라면 결석했을 테지만 오늘은 3단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식은땀을 흘려가며 수업에 참석했다. 그리고 선배가 늘 앉는 자리 앞쪽에 시선이 걸리도록 앉은 후, 주변 친구들에게 내가 매우 아픔을 알리고, 수업 전부터 엎드려 있다가 수업 시간에도 지속적으로 배를 움켜쥐고 아픈 척 연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아픈 척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날은 정말 너무 배가 아팠다. 생리통으로 아픈 게 아닌 것 같은 통증으로 창자가 배배 꼬이는 기분이 들면서 결국 작전이고 뭐고 죽겠다 싶은 와중에도 선배가 보고 있는지 체크하며, 수업 중에 친구에게 업혀 나갔다. 친구 차를 타고 급하게 응급실에 갔는데..................... 관.... 장..... 을 해야 한다고.......... ..........변.... 비..... 때....... 문.............
같이 간 친구는 옆에서 배꼽이 빠져라 웃었고, 친구에게 뇌물을 먹인 후 위경련이었던 걸로 친구와 지인들에게 소문을 내어 선배에게 흘려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내가 몸이 아픈 걸 보여줬을 때 “몸은 괜찮아?”라는 문자가 온다면, 작전 성공!! 이랬는데도 연락 한 통 없다 싶음 다음 단계는 접어야 한다. 다행히 선배는 문자와 전화까지 왔고, 나는 당연히 받지 않았다. 이 남자 나한테 관심이 없진 않군. 훗.
3단계를 통해 남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본격적으로 당기기를 할 차례다.
선배는 여자 후배나 동기들에게 인기가 꽤 있는 편이라서 선배 도서관 책상에는 늘 음료수나 간식거리들이 쪽지와 함께 놓여 있었다. 인기가 많은 남자일수록 나는 4단계 법칙에 공을 들이며,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매력으로 어필한다. 1, 2단계를 지속적으로 해주면서 점심시간에 우연히 만나 선배와 같이 점심을 먹는다거나, 매점에서 우연히 만나 아이스크림을 얻어먹는다거나,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술자리를 할 때마다 나는 다른 후배들과 다르게 선배를 갈구거나 놀린다.
“선배, 범생이 같은데, 수업 땡땡이 쳐 봤어요?
”아니 “
”진짜요? 아니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수업 땡땡이도 안 쳐보고 뭐 했어요? 우와~ 진짜 범생이네~“
”수업을 왜 빠지는데?
“그냥 날이 좋아서, 기분이 울적해서, 술이 고파서, 들어가기 싫어서”
“그런 적이 없는데”
“에?? 와~~ 이 선배 안 되겠네. 내가 좀 가르쳐야겠네”
이런 대화를 나눈 후 매일 지속적으로 선배가 한 번도 안 해본 일들을 제안한다.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집 남자에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경험들을 시켜주면서 그 재미가 여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도록 하는 법칙이다.(최근 눈물의 여왕에서 김수현이 재벌집 딸 김지원에게 딸기쭈쭈바를 먹어보라고 했고 처음 맛보는 쭈쭈바에 호감도 상승!)
날이 좋은 어느 날 아침, “선배, 땡땡이칠래요?”라고 문자를 보내고
비 오는 어느 날, “선배, 비 맞으러 갈래요?”라고 문자를 보내고
우중충한 어느 날, “선배, 날씨도 우중충한데 공부 접고, 막걸리 먹을래 갈래요?”라고 지속적으로 선배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을 제안하다가, 선배가 슬슬 흥미를 보인다 싶을 때,
“선배, 저랑 사귈래요?”라고 보낸 후.................................. 읽씹을 당했다.
보통 4단계쯤에서 나의 매력에 빠져 사귀자는 제안에 오케이를 하는데, 이 남자는 역시나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5단계 법칙을 써야 할 차례고, 이 작전은 거의 백발백중이었던 법칙이다.
남자에게 고백하고 난 후 대답이 없다면, 우연의 법칙을 반대로 이용해서 2~3일은 최대한 남자 눈에 띄지 않게 피해 다닌다. 대뜸 고백해 놓고 문자도 보내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며칠 후, 갑자기 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연히 나타나 예전과 똑같이 대한다. “어? 선배, 안녕하세요” 그럼 이 남자 속으로 생각한다. ‘고백해 놓고 뭐지? 장난한 건가?’ 하면서 혼자서 이 생각 저 생각할 때쯤~~ “선배, 왜 내가 사귀자는 말에 대답 안 해요?”라고 기습적으로 묻는다.
그때 선배는 공부를 해야 한다가 이유였다.
“나는 연애하면서 공부만 잘했는데”라고 하자 이 남자 매우 진지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첫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는 게 내 꿈이야. 그래서 내가 준비가 됐을 때 그때 사랑할 거야”
라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와~~2000년대에(ㅋㅋ) 이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쓰~~ 읍~~ 약간 고개가 갸우뚱 해지며, 이거 이거 이런 이유라면 마지막 작전이 안 먹힐 수도 있겠는데 싶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으니 안되면 말지 뭐~라는 생각을 5단계 작전을 개시한다.
선배에게 확실히 거절당한 다음날부터 1단계의 법칙을 이용해 1~2일 선배를 피했다가, 3일째 될 때쯤 우연히 만나고, 눈을 마주친 다음, 모른 척한다.(여기서 확실히 눈을 마주치는 게 포인트) 그리고 그날부터 매우 자주 우연히 만나고, 계속해서 모른 척한다. 그 우연 중에 한~두 번은 선배가 나를 본 것을 확인하고, 내가 너를 피하고 있다는 인상이 확~ 들게끔 티 나게 피한다. 내가 썼던 방법은 - 선배가 기숙사로 밥 먹으러 가는 동선임을 확인하고 먼저 도착해서 줄을 서고 있다가, 선배를 보고 눈을 마주친 후, 식당을 나온다 – 이런 식이었다.
이 방법으로 여러 번 선배를 모른 척한 후,
드디어 선배에게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미리야, 왜 아는 척 안 해?”
“아는 척을 어떻게 해요”
“왜? 우리 선후 배로는 못 지내는 거야?”
“네. 저는 이제 선배 안 볼 거예요.
그리고 정확히 이틀 후, 1교시 수업을 가는데 선배에게 문자가 왔다.
“미리야, 땡땡이칠래?”
“아니요”
(오오오~~ 이 남자, 완전 걸려들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콩딱콩딱거리지만 마음의 호흡을 가다듬고, 여기서 절대로 먼저 어떤 행동을 개시하면 안 된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그날 저녁, 선배는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했고,
"네가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너만 생각나고, 미칠 것 같고,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역. 쉬~~~
작. 전. 대. 성. 공.!!!!!!!!!!!!!!!!!!!!!!!
나의 모든 꼬시기 작전을 동원하여 결국 내 남자로 만들고 만 이 잘생긴 선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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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꼴배기 싫은 남의 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