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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Oct 24. 2024

레드 콤플렉스 9화

도시의 Delight(3)

2학년 2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를 나가 지하철을 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두 개째의 테이프를 사고, 들으며 어느새 도시의 Delight에도 익숙해졌다는 것 정도.


변하지 않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식당에 나갔으며, 학교에서는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축구를 했다. 여전히 지구는 태양을 돌았고, 도시에는 바람이 불었다. 세계는 정해진 패턴을 따라 잘 돌아갔다.지구 위의 세계도, 지구 밖의 세계도, 어머니의 세계도, 그리고 나의 세계도. 일찌감치 매를 집어던진 담임의 뒤를 따라 다른 선생님들의 관심도 조금씩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 덕에 내 세계는 학교라는 세계와 조금 더 확실히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도시의 바람은 더욱 냉정하고 강해졌지만, 견딜만했다. 세계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보니, 이제는 바람도 위협이나 공격이라기보다 그냥 상관없는 사람에 대한 냉소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방학식을 일주일 남짓 앞두고, 반장은 방학 자율학습 희망자를 조사했다. 애석하게도 보충수업 희망자 조사는 하지 않았다. 내게는 분명 필요 없는 일인데, 반장은 보충수업은 기본이라고 했다. 돈이 아까웠다. 이미 떨어져 나온 세계에 왜 돈을 뜯겨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뜯긴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교무실을 찾아갔다. 반장 정도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담임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두 달의 시간 동안, 나는 강해져 있었다. 차마 냉정함조차 갖추지 못한 감독 앞에서 침묵으로 애원하던 나는 이제 없었다. 당당하고, 뻣뻣한 태도로 음반 가게의 주인에게 Delight를 말할 수도 있었다. 진작 내게 백기를 든 담임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협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담임은 다리를 꼬고 앉아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낱말 퀴즈라도 푸는 중이었는지 볼펜을 한 자루 들고 있었는데, 내 목소리가 들리자 툭툭, 볼펜 끝으로 신문을 두드리며 아주 잠깐 눈을 치켜 떠 나를 바라봤다. 여러모로 보기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몇 초 정도, 나와 담임은 말없이 대치했다. 낱말 퀴즈의 답이 뻔한 문제 6개 정도는 풀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신문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친 담임의 눈은 움직임이 없었다. 내 눈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쉬는 시간은 십 분. 긴 시간이 아니었다. 시간만으로 따지자면 불리한 쪽은 나였다.


“보충수업을 빠지고 싶습니다.”


담임의 눈이 흔들렸다. 신문지의 윗선도 떨고 있었다. 얼핏 신음 같기도 한 숨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안정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거칠었고, 끝이 갈라졌다. 입술을 깨문 것 같았다.


“그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여전히 눈은 나를 보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요. 대학 갈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너 때문에 우리 반 분위기가 이상해졌어. 분위기 흐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드디어 그가 똑바로 내 눈을 쳐다봤다. 거친 동작으로 스포츠 신문을 접어 책상 위에 놓았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볼펜이 바닥에 떨어져 책상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눈빛이 강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히 공부할 것도 아니면서 학교에 나와 봤자 애들한테 더 방해만 될 것 같은데요. 그냥 제가 학교를 나오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돈 없어서 축구도 그만 뒀는데 쓸데없이 돈 쓰고 싶지 않아요.”


이글이글. 불과 얼마 전, 그 이글이글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괜히 움츠릴 필요 없었다. 냉정히 말해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담임은 다시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몇 차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제는 신문으로 가릴 수 없는 그의 입술이 확연하게 꿈틀거렸다. 여전한 기세로 타오르는 그의 눈빛이 굳건히 내 눈을 향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초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담임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러더니 바닥을 더듬어 책상 밑으로 굴러 들어간 볼펜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입김을 불어 볼펜에 묻은 먼지를 떨어냈다. 볼펜을 향하는 그의 눈빛이 열기가 식은 재처럼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애들은 그렇다 치자. 중요한 건 네 문제인데,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식은 재처럼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그가 물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한 적이 없었다. 과연 이 세계에서 내가 뭔가를 할 수나 있을지, 그조차도 의문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담임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듯했다. 몇 초 정도 눈을 감았다가, 무겁게 눈을 떠 나를 바라봤다.


“직업 반으로 갈래?”


몇 초 정도 생각해서 내놓은 답 같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명확하고, 무거운 문장이었다. 어쩌면 그는 꽤 오래전부터 내 문제를 고민해왔던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었다. 저 때문에 고민하셨다면, 감사합니다. 하지만 직업 반에 가서는 뭘 해야 하죠? 그냥 직업 반에 들어가는 것이나,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나 뭐가 다를까 싶었다.


“글쎄요.”

“‘글쎄요’가 아니라 뭐든 대답을 좀 해봐. 네 인생이잖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없겠니?”


담임의 낮은 목소리가 조금 거칠게 느껴졌다. 이라도 가는 것처럼 중간 중간 빠드득거리는 발음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럴 리 없지만, 잠시 그가 눈물이라도 흘리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담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담임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린 탓에 다시 함부로 ‘그러게요’라든가, ‘글쎄요’라든가, ‘잘 모르겠습니다’ 따위의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약간 미안했다.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어서, 괜히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억지로 힘을 주었던 눈빛을 조금 풀었다.


“1년이라면 전문대라도 갈 수는 있겠지만, 정말 그렇게 공부할 생각이 없다면 빨리 앞길을 찾아야 할 거 아니야. 마음에 안 들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는 그게 최선이다. 한번 잘 생각해봐. 며칠 내로 네 생각을 좀 들었으면 좋겠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한순간 십 년의 시간을 담아냈던 어머니의 얼굴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실은 이게 문제가 아닌데, 당장 방학 보충수업을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그 문제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의 얼굴에 나는 무력해졌다. 일단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십 년 묵은 고민을 담은 듯한 담임의 얼굴이 말했다. 뭐가 고맙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얌전히 목례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그와는 달리 나는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우주에서 길을 잃은 소년은 누군가로부터 새로운 행성에 관한 얘기를 전해 듣고도, 뿌듯하거나 다행스럽기는커녕 마음 한구석이 허하기만 했다. 무심히 도시의 Delight를 들을 때처럼.


며칠 뒤,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왔다. 담임과 면담하기 위해서였다. 2년 동안 한 번도 학교에 오지 못했던 어머니가 겨우 두 달의 시간 동안 두 번이나 학교에 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만큼 그 두 번의 면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 삶에 찾아온 두 번의 코너는 급격했다. 적어도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담임과의 면담을 마치며, 어머니는 몇 번 정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담임은 그때마다 며칠 전의 나처럼 몇 번 정도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담임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인지, 단지 반 분위기를 흐리지 않기 위해 문제아 한 명을 잡으려고 그런 것뿐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왜 그에게 고마워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동안 담임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던 나는 그 자리에서 결국 직업 반에 가기로 결정했다. 전공은 조리과로 정했다.


조리과를 택한 이유는 그곳이 어머니의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디를 간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세계니까, 조금은 믿을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머니를 교문까지 배웅하며, 나는 말했다. 고마워요. 담임은 내게 고맙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담임에게 고맙다고 말했고, 나는 담임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어머니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키워드로, 비로소 막혀있던 세 개의 세계가 소통을 시작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고맙다는 내 말에는 아무 대답 없이 먼 길을 바라보며 걸었다. 그러나 나는 지구 한 바퀴에서 겨우 몇 미터 모자랄 만큼의 어마어마한 거리에 떨어진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되겠죠, 뭐. 바람이 조금 세게 불었지만, 하늘은 제법 맑았다.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이번의 나는 그녀를 따라 교문을 나서지 않았다. 조금은 갑작스럽지만, 또한 단호한 느낌으로 학교 밖을 향한 한 소년의 탈주도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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