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누군가' 사이(1)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왔다. 감독의 호출이었다. 4교시가 끝나고 교무실을 다녀온 누군가 내게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자마자 급격히 분주해진 교실의 귀퉁이에서 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창가 쪽 맨 끝에 위치한 내 자리는 하나의 섬 같았다. 육지의 소란과는 상관없이 적막을 지키는 먼 바다의 섬. 누군가 어머니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내 자리로 다가오기 전까지, 아무도 내가 도시락을 꺼내 놓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뒤늦게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고, 반찬통의 뚜껑은 열지도 않은 채 알맞게 잘 지어진 쌀밥을 퍼 먹기 시작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입안 가득 뻐근하게, 조금씩 으깨진 쌀밥과 침 속의 아밀라아제의 반응으로 생성된 단 맛이 퍼져갔다. 그 사이 우연히 섬을 발견한 누군가가 원주민을 대신해 반찬통의 뚜껑을 열었다. 아침에 만든 멸치 볶음과 상추 겉절이가 정돈된 모습으로 담겨있었다.
상추 겉절이를 한 점 집어 씹고 있던 쌀밥 한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신선한 겉절이 특유의 아삭함을 느낄 새도 없이 그렇게 상추는 자신과는 성분이 많이 다른 한 패의 음식물 틈에서 서서히 짓이겨져갔다. 참기름의 고소한 맛과 고춧가루의 짭조름한 맛이 아주 약간, 입안 가득한 단 기운의 틈을 힘겹게 비집고 베어 나왔다. 그 ‘짭조름한 느낌 약간’ 때문에, 그것은 다른 이들의 세계 속에서 용 한번 못써보고 조용히 죽어가야만 하는 상추 氏의 마지막 눈물, 혹은 체액 같이 느껴졌다.
또 다른 누군가 내게 말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밥 먹을 때는 밥 좀 먹어라. 보는 사람도 체하겠다. 그래서 나는 한데 잘 뭉쳐진 쌀밥, 아니, 한 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쌀떡이 되어버린 입안의 음식물을 꿀떡, 힘겹게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짭조름한 느낌 약간’ 이후로 아예 그 존재마저 잊힌 상추 氏도 같이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렸다.
잘 지어진 쌀밥이 쌀떡이 되고, 짓이겨진 상추 겉절이와 함께 목구멍을 넘어가는 그 복잡한 과정을 거쳤는데도 시간은 아주 조금 흘러가 있었다. 시간은 아주 느린 것이구나. 새삼 감탄하며 다시 쌀밥을 입안에 우겨 넣기 시작했다. 몇 차례 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몹시도 느린 시간의 지루함을 견디는 사이 도시락 안의 쌀밥도 바닥이 났다. 반찬 통 안의 상추 겉절이와 멸치 볶음은 몇 명의 누군가가 헤집어 놓은 흔적만 초라하게 남았다.
육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아직 소란스럽게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육지와 다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빈 밥통을 마주한 나는 지루해졌다. 그리고 조금 외로웠다. 그래서 육지의 시간을 흉내 내듯 반찬통에 남은 멸치들을 한 마리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속이 투명해 보일 정도로 가느다란 녀석들이었다. 누렇고, 깡마르고, 단단한 멸치들을 꼼꼼히 씹어댔다. 그렇게 몇 마리를 씹고 있으니 이제는 육지 아이들도 텅 빈 도시락의 뚜껑을 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시간은 만족스럽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 흘러있었다.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왜 시간은 더디게만 가는 것일까. 도시락 뚜껑을 닫으며 생각했다. 왠지 억울했다.
빈 도시락 통을 가방에 챙겨 넣고, 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섬의 운명을 받아들이듯 체념하는 마음으로. 에라, 모르겠다. 떡이 된 쌀밥도, 존재감을 잃어버린 상추 겉절이도,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멸치볶음도, 아밀라아제와 당분도, 존재감을 잃어버린 자의 눈물도,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서 으깨어지는 연약한 칼슘 덩어리도, 더디게 가는 시간도. 그렇게 자포자기하고 팔짱을 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말했다. 너희 어머니 나오시더라.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교실 뒷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지 않던 시간이 잠시 관심을 끊은 사이 꽤 많이 흘러가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머니가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 누군가를 찾았다.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우연히 안 것이든, 나를 위해 노력해준 결과이든. 그러나 내게 그 말을 전해준 ‘누군가’가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교실을 둘러봤지만, 모두가 낯설고도 비슷비슷한 모습의 십대 청소년들일 뿐이었다.
그들 모두가 ‘누군가’였다. 어머니가 학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준 누군가, 나대신 반찬통의 뚜껑을 열어준 누군가, 밥 먹을 때는 밥 먹는데 집중하라고 일러준 누군가, 상추 겉절이와 멸치볶음들을 헤집어 놓는 누군가, 어머니가 지금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누군가, 기타 등등. 평소에는 분명 진수니, 명균이니, 한성이니, 경주니, 윤재니, 분명한 이름으로 존재하던 그들이 모두 ‘누군가’로 돌변했다.
시간아, 빨리 가라. 내 삶을 건 것 같은 기분으로 빌고 또 비는데, 기껏해야 뭔가 알려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그리고 그 뒤에는 그게 누구였는지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재빨리 자신의 생활로 원상복귀하고 마는 누군가들. 그렇게 막막하고, 답답하고, 한숨만 나올 때가 되어 나는 깨달았다. 결국에는 대부분이 그냥 ‘누군가’일 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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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내 삶이 ‘누군가’로만 가득하다고 느껴지던 때가.
내 친엄마는 내가 얼굴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렸을 때 내 곁을 떠났다. 나는 분명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아버지와 이혼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엄마가 너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말하곤 했다.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으레 끌끌 혀를 차던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나한테 특별히 해주는 것도 없이 혀를 차며 엄마를 욕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늘 똑같은 소리만 늘어놓고 금세 면전에서 사라지던 그들은 내게 그냥 ‘누군가’에 불과했다. 내게 도저히 ‘누군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를테면 할머니, 아버지, 삼촌들과 같은 이들은 절대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합법적인 절차’와 ‘행복한 미래를 위한 결단’ 같은 얘기만, 내 삶과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 속에 이따금 섞어 말했을 뿐이다.
내가 이 세상에 가득한 ‘누군가’라는 존재들을 잊을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의 설날, 아버지는 할머니 집에 한 여자를 데려왔다. 꽤 젊은 여자였다. 아직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삼촌 나이 또래나 되어 보였다. 아버지는 내게 그 여자를 ‘새어머니’라고 소개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이 사람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녀는 도저히 ‘누군가’ 따위로 한정지을 수 없는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까지의 내 삶에 있어서 중간에 끼어 들어온 사람은 무조건 ‘누군가’였다. 선천적으로 정해진 관계 하에 있지 않은 다른 사람과는 한 번도 지속적이고, 또한 특별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라니. ‘새’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긴 했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분명 ‘어머니’라고 소개했고, 내가 아는 한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 어떤 선천적으로 결정지어진 관계들보다 확고하고, 대단한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나는 그녀를 ‘누군가’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겨우 6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왔을 뿐이었고, 그래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몇 십 년 동안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상황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리라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건 조금 혼란스럽기는 해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어렴풋이 그런 것을 겪고, 이해해가는 과정이 바로 성장이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일 뻔 하다가 ‘누군가’ 이상의 존재가 된 그녀. 그녀를 위한 특별한 호칭이 필요했다. 그녀가 ‘누군가’가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수시로 인지하고 기억해야 했다.
그럼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엄마? 하지만 내게는 엄마가 있었다.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이제는 얼굴도 볼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 내 엄마는 엄연히 이 세계 어딘가에 살고 있었다. 엄마와 새로 내 삶에 끼어든 이 여자는 구분돼야 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새엄마’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아버지도, 그녀도, 할머니도, 다들 ‘새’라는 수식어는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기로 했다.
사회적으로 ‘엄마’나 ‘어머니’나 같은 의미를 갖는 단어이긴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 두 단어의 형태적 차이가 아리송한 두 존재를 구분하는 선으로 삼기에 적합해 보였다. 마침 아버지도 그녀를 ‘새어머니’라고 소개하지 않았던가. 그때 아버지가 어떤 무게감을 느끼게 하려고 한 것인지 지금이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어머니’라는 성숙한 용어를 사용했던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만약 ‘새엄마’라고 소개했다면, 나는 쉽게 마땅한 호칭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잘해줬다. 나도 어려서부터 쓸데없이 반발하거나 문제 일으키는 일 없이 얌전히 잘 자라줬다. 외형상으로는 완벽하게 서로에게 잘 적응한 계모와 의붓아들의 모습이었다. 실질적으로도 딱히 특별한 문제가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서로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킬 것은 지키고, 할 것은 하고, 금할 것은 금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족이 된 이후로도 한참 동안 상대에 대한 어색함을 깨는 일에는 지지부진했다. 서로를 가족으로 인정하긴 하지만, 느끼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나 어머니나 그때는 너무도 어렸다. 용기도 부족했고, 경험도 부족했다. 게다가 트럭 운전을 하던 아버지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게 일이라 집에 없는 날이 많아서 그런 우리의 상황에 별 도움도 주지 못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대화가 아니라, 그저 안내, 명령, 부탁, 수긍 등의 의사를 주고받기 위한 최소한의 언어적 도구로서의 ‘말’이 존재할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친구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내가 어디에 있을지 물어볼 친구 이름 하나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애를 태우며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집에 돌아가서 보았던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당혹감과 안도가 어색하게 뒤섞여있었다. 그 어색함은 금방이라도 뒤틀리거나 뒤집어질 듯 위태로워서 나는 귀신이라도 본 검처럼 무서워졌다. 물론 그날 그녀는 나를 나무라거나 때리지도 못했다.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눌어붙은 ‘누군가’의 흔적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음에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