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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Oct 24. 2024

레드 콤플렉스 6화

오후 2시의 지하철(3)

“들을래?”


그녀가 이어폰 한 쪽을 내밀었다.


“뭔데요?”

“음…… 음악인데, 뭐랄까, 치유의 음악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녀가 웃으며 가방 속에 감춰져 있던 워크맨을 꺼냈다. 당연히 CD 플레이어일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그녀가 워크맨의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귀에 꽂은 이어폰과는 상관없는 무심한 기계음이 들렸다. 테이프를 되감는 중에 몇 번 정도 그녀는 정지 버튼과 재생 버튼을 반복해 눌렀다. 그때마다 순간적으로 수천분의 일로 분절된 음악의 한 조각이 이어폰을 타고 튀어나왔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뒤 그녀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어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됐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마그네틱 테이프가 몇 초 쯤 감기자 어떤 소리가 들렸다. 뚜렷하게 음색을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 음악이 연주되었을 어느 녹음실 공기의 소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약간의 먼지가 떠도는 것 같은 공기가 긴장된 느낌으로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시 후 곧 산뜻하면서고 경쾌한 느낌의 기타 반주가 시작됐다. 공기의 흔적에 귀를 기울이는 중에도 전혀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한 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약간은 들뜬 듯 들리는 여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 꿈을 꾸네, 또 사라질 행복.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가네.

알 수 없는 표정, 의미 없는 미소.

너에 관한 모든 걸 잊어 버렸어.

Delight- Delight in My Heart.

Delight- Delight in My Heart.

Delight- Delight in My Heart.

Delight- Woo I Need it.


오 바라보네, 아무런 생각 없이.

나의 머리 위로 떠다니는 어두운 그림자.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괴로움이 아니야, 외로움이 아니야.

Delight- Delight in My Heart.

Delight- Delight in My Heart.

Delight- Delight in My Heart.

Delight- Woo I Need it.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온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눈을 감아 오로지 암흑뿐인 시야에 파스텔 톤의 기름 띠, 혹은 밝은 계열의 원색 띠 몇 개가 어지럽게 얽힌 환영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것들은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내 시선은 그것들을 쫓지 않았다. 그저 시야에 가득한 그 움직임을 가만히 느낄 뿐이었다. 몸이 기분 좋게 늘어지고, 우울하게 꼬인 마음도 타래를 풀고 아늑한 곡선의 형태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가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시야의 색 띠들을 지휘하듯 귀와 머릿속을 떠도는 목소리만으로 나는 충분히 마음이 차분해졌다.


몽환적이고, 천진하며, 평화롭고,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벅차지도, 과해서 불안하지도 않은 묘한 느낌이 서서히 내 몸과 마음을 채우고, 둘러쌌다. 이 기분을, 이 음악을 뭐라 해야 좋을까. 그래, 위로. 그 목소리는, 그 노래는, 그 음악은, 위로였다. 그 순간의 내 기분은 모든 죄와 불행의 기억에서 벗어나 위로받은 자의 그것과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것은 치유의 음악이었다.


“어때?”


마침내 음악이 끝났을 때, 정지 버튼을 누르며 그녀가 물었다. 음악이 끝난 후에도 미처 눈앞의 색 띠들을 돌려보내지 못한 나는 정직하고도 분주하게 트랙을 달리던 워크맨이 단호히 몸을 세우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맞는 것 같네요. 치유의 음악…….”


사라진 색 띠를 찾듯, 반대편의 캄캄한 차창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이 노래 알아?”

“더더의 Delight 아닌가요? 작년에 나온…….”

“맞아.”

“근데 목소리나 반주가 조금 다르네요.”

“그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직접 부르고 녹음해준 거야. 나를 위한 치유의 음악으로.”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말이 ‘흠칫’이지, 조금은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내 어깨가 살짝 그녀의 어깨에 부딪쳤고,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왜 그래?”

“여자를 좋아하는 취향이에요?”


나는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맞은편에 앉은 중절모를 쓴 노인이 이상한 눈으로 우리 쪽을 건너봤다.


“야, 이거 남자야.”


그녀의 대답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도저히 남자로 짐작할 수 없을만큼 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어요?”

“그러게. 왜 그럴까?”


그녀가 다시 한 번 깔깔댔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진심으로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 사람, 이 노래만 1년을 불렀어. 그 시간 동안은 오로지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음악을 했다고 할 만큼. 누구보다 이 노래를 잘 이해하고, 이 노래에 모든 마음을 쏟아 부은 사람의 목소리라면 조금 이해가 가려나.”


진심으로 노래를 부른다. 오로지 이 노래 하나를 위해 1년을 바친 사람. 카를로스의 UFO슛을 재현하기 위해 1년간 같은 자리에서 킥을 연습하는 마음 같은 걸까. 그 시간 동안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 삶의 유일한 의미였을 것이다.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신기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지만, 그것을 넘어 소중한 무언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한 인간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노래가 치유의 음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게다. 도저히 모든 것을 바칠 여력이 되지 않는,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쳤다고 믿었는데 끝내 무엇도 이룰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목소리, 위로. 성취한 자의 거만함이 끼어들지 못할 만큼 순수하고 맹목적인 열정이 지친 나를 달래주었던 게 아닐까.


“더 들을래? 원한다면 더 듣게 해줄게. 너는 아직 많은 위로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다시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었다.


“근데 어디서 내리세요? 괜히 나 때문에…….”

“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난 얼마든지 여기 있어도 돼.”

“고3이 그래도 돼요? 수능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난 대학 안 갈 거거든. 학교에 볼 일 없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열심히 테이프를 되감고 있었다.


“왜요? 대학 안 가면 뭐 해요?”

“사정이 좀 있어. 나중에 나아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지 뭐. 지금은 별로 관심 없어. 자, 됐다.”


그녀가 웃으며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치유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음악이 끝날 때마다 그녀는 말없이 테이프를 되감고, 다시 재생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테이프를 되감는 동안에도 눈을 감은 채 가시지 않은 Delight의 여운을 즐겼다. 들어도 들어도, 찬란하고, 황홀하고,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제목 그대로, 그것은 하나의 환희였다.


지하철이 도시 한 바퀴를 돌아 마침내 내가 처음 탔던 자리에 닿을 때까지, 환희는 계속되었다. 학교에 가방을 두고 왔으므로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나는 그곳에서 자리를 일어서기로 했다.


“충분히 들었어?”


약간은 걱정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가 물었다.


“네. 아마도요.”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나 역시 살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직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지, 그 웃음은 어딘가 힘이 빠지고 아쉬운 느낌이었다.


“즐거웠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치유의 음악을 플레이한 누군가의 마음에 거의 근접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의 진심으로, 나는 말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느꼈던 어떤 감정보다 확고한 진심으로 고맙고, 즐거웠다.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서자, 나는 그녀 앞에서 돌아섰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할 말이 떠올랐다.


“그 노래,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다음에 다시 이 지하철을 타게 된다면…….”

“어쩌면.”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지하철의 문이 열렸다. 나는 서둘러 지하철에서 내려야 했다. 어쩌면, 보다는 확실한 단어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은 그렇게 꿈처럼 아련하고 모호했다. 다시 돌아온 세계는, 안드로메다를 꿈꾸게 했던 플랫폼은 아직도 황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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