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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읽어 주는 엄마

by 바람꽃

치맛바람이 유난히 세던 초등학교에 다녔다.
저학년 때는 그 분위기를 온전히 알지 못했지만, 4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그 차이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선생님이 학생의 이름 대신 부모님의 직업으로 아이들을 부르며 자연스레 구획을 나누던 일들, 그리고 그에 따라 대하는 태도나 처벌의 수위가 조금씩 달라지던 순간들. 말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집안의 배경이 교실을 가르고 아이들을 줄 세우던 공기 속에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학교에는 유독 ‘엄마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많았다.
하지만 내겐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반드시 보고 싶은 얼굴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운동회였던 어느 날의 기억은 좀 더 선명하다.
엄마는 운동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점심시간을 아빠에게 맡기고 “미안해, 혜진아. 아빠랑 맛있게 먹어. 엄마 빨리 가야 해.”라는 말을 남긴 채 급히 떠나셨다. 아빠를 좋아했지만, 회사에서 막 나온 듯한 정장을 입은 아빠와 단둘이 돗자리를 펼쳐 치킨을 뜯고 김밥을 먹는 그 시간은 어쩐지 마음 한편이 스산해지고, 조금은 낯설고, 은근히 불편했다. 운동장을 빙 둘러보아도 아빠와 둘 뿐인 모습은 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이 자꾸만 내 마음을 더 작게 만들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 날 제출했던 ‘탐구생활’도 또렷하다.
친구들의 과제는 사진이 꼼꼼하게 붙어 있었고, 활동지들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든 것이 없어 보였고, 마치 엄마들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한 겹 한 겹 덧칠된 듯했다. 그 옆에 놓인 내 얇고 소박한 탐구생활은 아무리 눈을 돌리려 해도 자꾸만 초라하게만 보였다. 왜 그렇게만 느껴졌는지, 왜 그 작은 차이가 그토록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늘 바빴다. 장사를 하며 아이 셋을 키우느라 숨 돌릴 틈도 없었던 분주한 일상 속에서 막내딸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여유를 갖지 못하셨을 것이다. 나 또한 어린 나름대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투정을 부리는 대신 조용히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그때 엄마가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주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뒤늦게 피어오른 그 작은 아쉬움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져 갔다. 어쩌면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외로움이 조금씩 나를 흔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가 필요로 하는 시간마다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숙제나 준비물도 애써 도와주며, 아이의 하루 속 작은 이야기들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싶었다.
어느 날은 아이의 방학 숙제를 신나게 해주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신랑이 물었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여보~이게 어린 나를 토닥여 주는 거 같아.” 하며 웃으며 말했다.


아이의 초등학교에는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라는 활동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아이의 반에 들어가 20분 정도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이었는데, 주저 없이 참여했다. 실제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딸의 시선이 닿을까 괜히 마음이 조심스러워 눈을 맞추기 어려웠지만, 친구들의 표정, 선생님과의 공식적인 인사, 교실에 스며 있는 아이의 일상이 나에게는 그 어떤 경험보다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마음 한편 깊숙한 곳에는 ‘우리 딸을 예쁘게 봐주세요’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람이 늘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딸이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짧은 순간, 마치 내 안에 숨어 살던 어린 혜진이가 어른이 된 나에게 다가와 “괜찮아. 이제 정말 괜찮아.”라고 속삭이며 등을 쓸어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서서히 녹아내렸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던 그 공허함이 딸의 미소 하나에 위로받는 듯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다.
“지난날의 아픔이 자꾸만 흔들어 놓을 때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줘. 그건 정말 오래된 일이야. 이제는 보내줘도 괜찮아.”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린 혜진이에게 천천히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괜찮다고,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와 어깨를 펴도 된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도, 지금의 아이도 더는 그 시절의 마음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된다고.

오늘도 아주 천천히, 나를 다시 꺼내어 보듬는 연습을 이어간다.
그때의 나는 외로웠지만, 지금의 나는 그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함께하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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