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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

by 바람꽃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육아서를 읽기 시작했고, 그 시절 아이의 세계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새벽녘까지 그림책을 읽어주던 엄마였다. 피곤함이 쌓여도 아이가 책을 들고 오면 다시 앉았다. 새벽까지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은 이상하게도 체력으로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한 권, 두 권, 점점 높아지는 책 더미를 보면서 나는 피곤함 대신 묘한 충만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아이의 세계가 책을 통해 넓어지는 것만 같았고, 나 또한 그 세계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깊은 만족으로 다가왔다.


돌을 전후하던 무렵, 아이는 말은 조금 느렸지만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뽀로로 퍼즐 조각을 하나씩 집어 들고 마지막 퍼즐까지 완성하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던 모습. 지인이 집에 놀러 왔을 때에도, 아이는 퍼즐 맞추기에 너무 몰입해 말 그대로 ‘아이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아이의 기질은 태어날 때부터 순했다. 산후조리원에서는 수유만 하면 세 시간씩 푹 잠들었고, 집에서도 먹고 자는 리듬을 어김없이 지켰다. 청소기 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던 강철 같은 잠 덕분에 나는 초보엄마임에도 ‘육아가 이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 하는 착각을 잠시나마 했다.

아이의 작은 성장들은 죄다 내게 자랑거리였다. 같은 또래보다 밥도 잘 먹고, 몸무게도 더 나가고, 옆집 아이보다 걷는 시기도 빨랐고, 소근육이 발달해 어린 손으로도 가위를 섬세하게 움직이던 모습까지. 그 시절의 자랑은 아마도 너무나 순수했고, 너무나 사랑스러웠기에 내 욕심이 섞이지 않은 가장 맑은 기쁨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세상에서 말하는 ‘사교육의 흐름’ 속으로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하자 내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다짐과 욕심을 내려놓으려는 의지, 그리고 ‘아이를 나의 명함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이 서로 부딪히는 날이 늘어갔다.

그 다짐이 완전히 무너졌던 날이 있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
아이는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를 연주해 왔고, 졸업식에서 독주를 맡게 되었다. 강당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연주는 그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또렷했고,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줄이며 아이의 음색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외쳤다.
‘저 아이가 제 딸이에요. 플루트 연주한 그 아이가 바로 제 딸이에요.’
울컥함과 벅차오르는 감동이 동시에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아이의 음악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고도, 한없이 큰 존재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그리 가까운 아이가 아니었다.
특히 고등학교 실기평가 시간은 지금도 떠올리기 싫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독창 시험에서는 음이 계속 틀렸고, 뒷자리에서 들리던 억누르지 못한 웃음, “다시 해보자”는 선생님의 말, 그리고 얼굴이 화끈거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순간들.

그보다 더 오래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유일하게 다닌 피아노 학원은 유치원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았다. 건반 위의 손가락은 서툴렀고, 내가 노래를 부르면 언니와 오빠는 옆에서 큭큭 웃으며 “혜진이는 음치야”라고 놀리곤 했다.
피아노 발표회 날, 넓디넓은 발표회장, 가득한 부모님들,
그리고 돌아온 내 차례.

첫 음을 치고 나서 더 이상 한 음도 건드리지 못했다. 손끝이 떨리고, 귀가 붉게 달아오르고,
사회를 보던 선생님이 “너무 떨려서 그렇다”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겼지만,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시는 피아노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 후로 ‘피아노 대신 미술 학원에 가면 어떨까?’라는 엄마의 말에 자연스럽게 미술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혜진이는 피아노는 그렇게 안 되더니, 미술엔 참 재능이 있네.”

엄마의 의도는 칭찬이었지만, 어딘가에 ‘너는 음악과는 맞지 않는 아이’라는 문장이 조용히 박혀버렸다.
그 말은 스스로를 움츠리게 만들었고, 노래방에서도 마이크를 잡기 어려운 성인이 되었다. 음악은 늘 나를 불안하게 하는 영역이 되었다.


대학생 때 보았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강의실 피아노로 캐논 변주곡을 연주하던 장면을 보고
내 마음에 다시 피아노가 살며시 들어왔다. 그 장면은 늘 빛이 났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부러웠다. 악기 하나로 마음을 정리하고, 감정을 풀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사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내 아이들만큼은 음악이 삶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계절을 느끼고, 거리 피아노 앞에서도 용기 있게 앉아 즉흥적으로 몇 소절을 칠 수 있는 그런 삶. 음악회 하나쯤 기꺼이 발걸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고.

딸은 7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어쩐지 나를 닮아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악보 보는 능력은 좋아서 꾸역꾸역 체르니 30번까지 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꾸준한 연습’이라는 벽 앞에서 엄마와 딸의 갈등은 끝없이 반복됐다. 그러다 서브 악기로 시작한 플루트가 학교 오케스트라로 연결되었고, 주 2회의 1:1 레슨을 꾸준히 받으며 아이의 연주는 조금씩 자라났다. 그 시절 플루트 레슨비는 영어학원비보다 더 많이 나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내 마음이 더 크게 움직였던 시기였는지 모른다.

아이는 레슨으로 배운 만큼만 연주했다. 더 욕심을 내지도, 덜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의 음악은 늘 적당히, 딱 그만큼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오케스트라 활동이 끊기자 아이는 자연스레 플루트를 놓았고 지금은 연주를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아이가 휘파람으로 교가를 부르는데 놀라울 만큼 정확한 음으로 소리를 냈다. 몇 번만 들은 멜로디도 휘파람으로 척척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며 남편과 나는 웃으며 말했다.

“플루트를 배워서 그런가 봐. 입술로 음을 잘 잡네.
그렇게 가르쳐놨더니 남는 건 휘파람이네~”


둘째는 또 딴판이었다.
누나가 치던 곡을 귀로 듣고 따라 치기도 하고, 캐논 변주곡을 작은 손가락으로 띵띵 거리며 흉내 내는 모습은
괜히 내 마음을 꿈틀거리게 했다.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며 둘이 피아노 앞에 앉아 음악을 주고받는 모습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너무 좋아 어쩐지 숨겨두기 어려웠고, 결국 그 마음은 욕심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음악을 즐기기도 전에 내가 먼저 앞서가 버렸고, 아이는 그런 엄마의 속도로부터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지금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다. 예전처럼 콩쿠르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사라졌고, 어떤 성취를 기대하는 마음도 내려놓았다.

주변 사람들은 “네가 배우는 게 낫겠다”라고 말한다.
사실 나도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성인이 되고 두 번쯤 피아노를 배우려 해 봤지만 그 시기는 마음과 여유가 따라오지 않았던 때였다. 40대가 되면 내 삶에도 멋스러운 여백이 생길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 40대의 나는 사춘기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여전히 아이들의 일상을 챙기며 내 시간을 온전히 가지기 어려운 나날을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안다.
어떤 소망이 여전히 내 안에서 어린 마음으로 머물러 있는지. 그 욕심이 아이에게서 물러난 만큼 이제는 나에게로 와도 괜찮다는 것을. 그래서 나의 50대 버킷리스트에는 하나의 문장이 적혀 있다.

“캐논 변주곡 피아노로 연주하기.”

이제는 아이들 뒤에서 박수만 치며 감동하던 내가 아니라, 마침내 내 양손으로 건반을 누르고 내 감정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늦어도 괜찮고, 서툴러도 괜찮다. 내가 오랫동안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그 음악을 이제는 내 삶 안으로 천천히 불러들이고 싶다.

그 한 곡이면 좋겠다.

그 한 곡을 연주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나와 앞으로의 내가 아주 부드럽게 이어질 것만 같다.


[함께하는 작가님]

지혜여니 / 따름/ 다정한태쁘/ 김수다/ 바람꽃 / 아델린/ 한빛나/ 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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