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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의창- 과거, 생존, 공존, 알고리즘

오늘의문예비평 115호 - 에세의창

by 바람꽃 우동준

*오늘의문예비평 '2019년 겨울호' - 에세의창에 실린 글입니다. 귀한 기회를 내어주신 오문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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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나이와 시기에 부여되는 의미를 늘 경계하며 휘둘리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서른’이란 시간과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은 지난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거세게 하루를 흔들더군요. 사계가 닫힐 때쯤이면 무언갈 손에 쥐고 있거나 내 능력에 대한 증명이 마쳤다 생각했지만, 오히려 비워낼 것과 욕심과 아집만이 가득한 자아가 남았습니다. 어설프고 미흡한 서른의 시간에서 유일하게 건져낸 건 ‘함께 걷는 동료’와 ‘보다 나아지기 위한 노력’,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경계의 감각’이었고 돌이켜보니 이마저도 함께 걷는 많은 분의 선한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뜨겁고 차갑던. 아쉬움만 남은 나의 사계를 보내며 지난 시간을 차분히 되짚어보려 합니다. 마침 귀한 초대로 글을 담게 된 코너의 이름이 ‘에세의 창’이더군요.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지난 시간을 잘 닦아 서른의 청년이 두 발로 살아낸 한국사회의 모습을 조각조각 담아보려 합니다. 다양한 사람의 교차하는 시선 속 올해를 담아낼 네 개의 키워드를 꼽아 보았습니다. ‘과거’, ‘생존’, ‘공정’ 그리고 ‘알고리즘’ 입니다.


첫 번째 - 과거


지금 스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뜨거운 컨텐츠는 유튜브에서 스트리밍 되는 90년대 가요 프로그램입니다. ‘한국음악의 르네상스’라 불린 90년대의 실험적인 무대를 보며 어떤 이는 닿지 못할 시간을 그리워하고, 어떤 이는 낯선 화장법과 빠른 비트, 당혹스러운 의상에 웃음과 경악을 함께 보냅니다. 가장 최신의 플랫폼이 된 유튜브에서 청춘스타로 인기를 끌었던 최수종-최진실의 드라마와 저화질의 만화영화가 클릭 되고. 과거 4:3 비율로 방송되던 고전 예능이 가장 인기 있는 동영상으로 추천되는 오늘입니다.


짤막한 동영상 안엔 인기의 정점을 찍은 유재석, 강호동 씨가 시선을 끌며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던 ‘어설픈 신입’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완성된 모습이 아닌 시작의 서툰 모습을 담고 있고 중량감 있는 선배의 모습보단 촐싹대는 신인의 모습이 담겨있기에 마치 성장의 청춘 드라마를 엿보는 기분마저 들곤 합니다.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던 최신의 프로그램이 결국 리얼하게 잘 짜인 각본이었음을 알게 된 것도 배경이겠죠, 세월을 넘어 유튜브로 관찰되는 낮은 화질의 영상이지만 그곳엔 성공한 스타들의 시작과 긴장된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혹자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진정한 의미의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이제 시작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많은 사람이 ‘시간의 역행’에서 신선함과 향수를 느낍니다. 시간의 풍화작용은 첨단과 변화의 상징이던 날카로운 디지털 전파조차 추억이 담긴 아날로그의 매끄러운 파동으로 다듬고 있습니다. 이제 생생한 컬러로 재생되는 과거의 시간은 새롭게 상상되는 희망의 미래보다도 자극적이고 묵직한 컨텐츠가 되었습니다. ‘오늘을 파괴하며 나아가던 미래’에서 ‘오늘과 연결된 과거’라는 시간의 새로운 단락이 제시된 것입니다.


미래보다 많은 기대를 품게 된 과거. 이제 우리는 과거라는 고루한 시간적 단위의 새로운 지평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유럽문화가 신이 안내하는 세계에서 이성이 지배하는 해양의 세계로 넘어올 수 있었던 신대륙의 발견처럼, 과거라는 미지의 공간은 ‘창조적 파괴’의 다음 모델을 제시하며 문화적 시각의 빈틈을 열었습니다. 그 가능성의 빈틈을 음악과 패션은 이미 레트로란 단어로 재밌게 소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움을 쫓던 ‘창조’의 방식이 아닌 ‘재해석’을 향한 컨텐츠의 전환. 하지만 모든 변화엔 명암이 함께 있고, 모든 걸음엔 자욱이 깊이 남듯 과거를 향한 전환에서도 묘한 해방감과 기시감이 함께 포착됩니다. 해방감은 인기 있는 옛 예능 프로그램의 댓글 타래에서 펼쳐지는 강화된 잣대입니다. 여성과 이주민을 비하하며 웃음을 유도했던 방식을 오늘의 감각으로 재평가하기도 하고 권위에 의한 언어의 폭력적인 사용을 비판하고 조심스레 점검하는 것이 더는 유난을 떠는 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하다 여겼던 변화의 과정이 단단히 이루어졌음과 그 변화가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에 깊은 해방감을 느낍니다.


동시에 ‘가능성이 담보된 미지의 시간’에서 벗어나 ‘변수가 없는 세계인 과거’를 선망하는 마음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이 있습니다. 여기엔 많은 상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상실감은 다양한 문화 컨텐츠 속 여유가 묻어나는 성장기의 한국 사회와 각자가 살아낸 하루의 격차에서 비롯됩니다,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 당장의 생계와 결혼, 내가 머무를 안전한 집은 구할 수 있을지 혹은 이후의 삶을 동행할 가정을 꾸릴 순 있을지에 대한 고민처럼 크고 단단해 보이는 미래의 이벤트 앞에서 기운을 잃고 시선을 뒤로 돌리는 지친 마음이 전해집니다.


미래의 가능성은 아직 아무것도 확보되지 않은 불안이 되고, 무한히 펼쳐지는 기회의 장은 끝없는 노력으로 성과를 내야 하는 무한한 평가의 장으로 수렴됩니다. 그 결과 살아갈 미래보단 살아 낸 과거가 훨씬 좋았다는 ‘내일을 향한 비관’이 따라옵니다. 매스컴에 나와 무지갯빛 이상과 희망으로 미래를 말하는 이들처럼 다각적인 접근 없이 과거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과 동경만을 내뱉는 이들도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시공간은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간을 말하든 과거를 돌아보는 과정 역시 새로움을 위한 재해석과 재창조 즉 반성과 인정의 과정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불안이 되고 과거에 대한 혐오가 동경이 되는 단순한 치환 과정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 오르텅스 블루 <사막>



‘너무도’란 짧은 단어만으로 자신이 가진 고독을 전부 표현할 수 없어 좋은 시가 아니라 말한 프랑스의 시인이 있습니다. 외로움을 말한 시의 핵심은 결국 ‘뒤로 걸었다’는 동사이겠죠. 외로워 뒤를 돌아보지만, 시인이 걷는 발걸음의 방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되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지평의 미래를 열어야 합니다. 소비하고 되새김 되는 방식의 과거가 아니라 미흡함을 넘어서는 계기의 과거로 나아가는 것. 이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매너리즘의 흐름을 이겨내고자 하는 내년을 향한 저의 첫 다짐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 생존


검찰개혁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혹시 영화 ‘더킹’을 보셨는지요. 개봉한 지 꽤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현재 VOD 서비스가 제공되는 영화이니만큼 잠시 용기를 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보겠습니다. 영화 ‘더킹’은 정우성 씨, 조인성 씨, 류준열 씨가 참여한 작품입니다. 워낙 쟁쟁한 배우들이라 포스터만으로도 이미 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인데요. 이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선 극을 이끌어가는 조인성 씨의 차분한 내레이션을 통해 주인공 ‘박태수’의 기본적인 캐릭터가 설명됩니다. 박태수는 건달 아버지 밑에서 폭력에 노출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고, 폭력이 존재하는 세상 속 생존을 위한 자신만의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의 전략은 받은 폭력을 주는 폭력으로 반사하는 것. 그는 이렇게 학교의 정점에 올랐지만 강했던 아버지의 무릎을 꿇게 만든 더 큰 권력, 검찰을 만나게 되고 노력 끝에 대한민국 검사가 되고야 맙니다. 정우성 씨가 연기한 한강식 검사도 검찰 내 권력을 향한 자신만의 전략이 있습니다.


조직 폭력배를 스폰으로 두고 밝혀진 세상의 불의를 정의가 아닌 자신의 성공을 위한 훗날의 무기로 덮어두는 것입니다. 류준열 씨가 맡은 조직폭력배 최두일 또한 폭력조직 내 생존을 위해 더 잔인한 방식으로 라이벌을 차례차례 꺾어갑니다.


영화 더킹의 러닝타임엔 사회적 존재들이 어떤 생존전략을 세웠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신념과 태도가 담겨있습니다. 조직 내 성공을 위해 재벌 아들의 범죄를 덮고 후회하는 박태수의 독백 뒤로 한강식은 소리칩니다.


‘역사를 배워. 이런 역사 앞에서 웃자고, 나의 방식이 곧 세상의 역사라고’ 그리고는 묻습니다.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우리는 결국 살아남아야 하기에 내가 마주한 ‘모순’ 앞에서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재빨리 수립합니다. 이 작업엔 ‘어쩔 수 없다’는 명제와 ‘늘 그래왔다’는 명제가 든든한 발판이 됩니다. 세상의 모순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내 배가 고파오는 속도가 더 빠르단 걸 우리는 직접 경험했고 추락하는 타인의 삶을 목격하며 서늘하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모순 위에 세워진 불안한 모래성과도 같습니다. 모순과 함께해야만 유효한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모순이 있어야 유효한 전략은 다시 개인의 행동을 모순을 공고히 지키는 쪽으로 유도합니다.


생존을 향한 열망이 역으로 모순의 뿌리를 깊이 박아내는, 그렇게 서로를 모순의 그물로 엮어가는 부정의 외부효과가 연이어 발생하는 것입니다. 모순을 넘어서지 못한 생존전략은 모순과 공생하는 전략과 다름없습니다. 이 사회의 깊은 모순은 헌신적인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도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촛불을 함께 밝힌 우리이지만 지워내야 할 사회의 진짜 모순은 권력을 가진 한 인간이 아닌 각자의 삶에 짜인 일상적인 생존 논리 속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남성과 여성 간의 갈등이 깊어진 것에 많은 이들이 주목합니다. 젠더로 구분해 사안을 해석하지만 많은 운동이 그렇듯 이 움직임 또한 당사자 그룹의 정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달리 설정됩니다. 저는 이 갈등을 ‘사회에 내제한 모순을 꺼낸 이들’과 ‘생존 전략의 위기에 놓인 이들’ 간의 부딪힘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여성이라 해도 기존의 모순 내에서 생존전략을 공고히 세웠다면 현재의 억압과 모순이 ‘용인되는 질서’가 되기도 하고,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남성이라 하더라도 남성 주류사회가 제공한 생존전략의 거부와 이질감이 ‘모순 해결을 향한 의지’로 역전되기도 합니다. 생존 전략을 조금 세세하게 나눈다면 단순히 젠더의 이분법으로 대상을 나눌 수 없는 묘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는 외적 형태가 아닌 당장의 생존에 유리한 방법을 고려해 움직이는 개인의 선택이 큰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직의 생리와도 이어집니다.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강제하고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 작은 기업에 비용을 전가해야 한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존’ 키워드의 첫 단락으로 담은 검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법리를 두고 죄의 내용보다 사람의 배경을 고려해 판단했던 지난 역사는, 결국 사회로 하여금 격차의 해결보다 더 높은 계급을 획득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생존이 우선될수록 민주의 가치와 정의는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이후 경제성장 시기에 진입했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산물은 모두에게 평등한 국가 교육체제의 형태였지만, 경제성장 시기의 산물은 각자가 소유한 재산에서 파생된 수많은 사교육 지구와 대물림 되는 기회였습니다. 개혁의 아이콘이 된 고위 공직자를 향한 청년 세대의 분노도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짐작하며 공고히 쌓아간 생존전략의 격차가 주요한 이유였습니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이 구조 속에선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도 가진 기회를 유지하기 위했던 선택이 계급적 격차를 더욱 공고히 만드는 결과라 해석되기도 합니다.


‘살아남고 싶다’는 꿈. 생존은 저의 걸음과 함께 한 가장 오래된 키워드입니다. 평생을 변함없이 쫓아왔지만 이젠 ‘제대로’ 살아남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살아남는 것을 넘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변화도 함께 고민되어야 하겠죠. 진보하는 사회는 각자의 생존전략을 스스로 내려놓는 용기와 결단에 달려있고, 의지에 기반한 변화는 더딘 만큼 공고히 다지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 오늘만큼의 생존을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겸허히 점검하게 됩니다.


세 번째 - 공정


많은 매스컴과 전문가 그룹이 지금의 2030 세대를 분석하며 ‘공정에 대한 감각’을 도출하고, 그들이 문제로 삼는 주제들과 그 배경에 주목합니다. ‘공정’이란 단어를 쫓아가면 결과에 앞서 몇 가지 사전적인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먼저 ‘건강한 개인주의’의 확대입니다. 동질한 문화집단 내에서 도덕이라 불린 과거의 행동 패턴이 더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는 상황. 사회통념에 달려있던 행위에 대한 판단기준이 나로 전환되는 상황은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받던 하나의 잣대가 사라짐을 의미했고 자연스레 개인의 판단과 감정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경쟁’입니다. 내가 참여한 경쟁의 운동장이 공정한지 혹은 경쟁의 룰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지만 우선되고, 경쟁이 시작된 이유와 경쟁의 필요와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운동장의 공정성 문제는 나의 경쟁에서만 공정하면 되는 문제로 좁혀져 상상되는 사회의 범위가 함께 축소되기도 합니다. 건강한 개인주의가 주관적이며 절대적 기준인 ‘나’와 연결되었는지에 따라 세상의 공정을 재단하는 보다 작은 세상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무서운 사실은 표면적 언어는 평등과 부당을 말하지만 결국 결과의 불평등을 지향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준비하고 시험에 통과하는 사람은 당당히 정규직이 되는 것이고,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정규직이 되는 것이 당연한 세상. 직급에 의한 차별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엔 내가 차지한 기득권이 공격받는 것에 대한 민감한 경계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나아질 여지에 대해선 기계적 공정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내가 낮아질 여지에 대해선 배제의 논리로 다가올 수 없는 깊은 해리를 만들어냅니다. 공정과 공평은 다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법무장관 자녀에 대한 특혜 의혹이 거세질 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소위 SKY의 대학생들이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이중 고려대의 집회를 진행했던 집행부에선 집회 참가자를 두고 안양캠과 세종캠 학생간의 거센 구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방 분교의 학생이 본교의 집회를 이끄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 사회의 기득권으로부터 느낀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집회에서 곁에서 함께 소리치는 동료의 출신을 따지는 움직임.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검증하는 아주 투박한 방식의 구분 짓기는 단순히 20대만의 특성이라 보기 힘들 것입니다.


공정에 대한 선택적 감각.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공정에 대한 잣대가 예민해지고, 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공정의 감각이 사라집니다. 나를 기준으로 내가 참여하지 않은 다른 문제의 공정성엔 분노하지 않는 건 특정 세대에게서 갑자기 발현된 특성이 아닙니다. 여기서 ‘나’란 자아는 조직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지역으로 확장되기도 하며 거칠게 나와 타인의 대오를 구분 짓습니다. 오히려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정의 스위치가 작동되고 공정을 도구로 나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한국 정당정치가 사용하던 방식과 흡사합니다.


20대가 말하는 공정은 결국 아무 배경도 등에 업지 말고 너 자신으로만 운동장에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모여 경쟁의 운동장이 아닌 사회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특히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 속 공정에 대한 감각을 20대만의 세대적 특징으로 구분하는 건 기성세대의 안이함과 무감각을 정당화하는 시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공정이란 잣대를 이용해 특정 정파와 특정 인물을 공격하는 정치적 도구로 재생산하는 것 역시 세대론을 정파적 도구로만 사용하려는 시도로 보여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의 문제로 깨어난 감각이 선택적으로 적용된다면 개인의 이기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공정’이란 가치는 나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함께 주목해야 하는 건 ‘도태된 자에 대한 잔인한 현실’입니다. 경쟁이 옹호되고 당연해질수록 경쟁의 ‘패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질까 두려워집니다. 경쟁의 링에서 배제된 사람을 어떤 이유와 어떤 논리로 품어야 할지에 대한 철학의 부재도 깊이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건과 욕망이 뒤섞이며 흔들리는 세상입니다. 흔들릴수록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평상심 즉 ‘중용’의 태도가 미덕으로 떠오릅니다. 중용의 태도는 내 상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전제되어야 가능합니다. 유동적으로 변하는 상황 속 좌우의 치우침 없이 오직 중앙에만 있겠다는 태도는 오히려 무감각과 부동의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용’이 행위자와 행위자 사이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으로, 분노와 분노 사이에서 아무것도 분노하지 않는 것으로 발동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중용의 가치를 말했던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향한 방법으로 ‘습관’(ethos)을 꼽았습니다. 습관은 나의 하루를 채우는 나만의 도식이자 판단 구조입니다. 특정 조건에서 반복되는 행위와 과정. 우린 이 도식을 다른 말로 알고리즘이라 부릅니다. 미디어로 접하게 되는 어떤 사안에 대해 습관적으로 판단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동시에 사회를 해석하는 나의 습관, 도식 즉 알고리즘은 어떤 형태일지에 대한 점검도 이어갑니다.


네 번째 - 알고리즘


최근 인터넷 강의를 신청해 틈틈이 공부했었습니다. ‘파이썬’이란 프로그램에 대한 기초 내용이었는데요. 기초 수학과 수학적 사고가 부족한 터라 겨우겨우 진도를 쫓아가는 수준이었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코딩’의 세계를 맛볼 수 있어 의미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론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코딩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제2외국어로 영어의 중요성이 커졌던 것처럼 이젠 컴퓨터 언어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제2외국어가 되어가는 듯합니다. 컴퓨터 언어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아마도 2016년 3월 한국 바둑의 아이콘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바둑 대결 이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대결에 전 세계의 관심이 몰렸습니다.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은 밀레니엄 시대 이후 가장 먼저 그려진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지구의 모든 생명을 정복한 인류가 부딪힐 마지막 천적은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 ‘지구 밖 존재’의 등장이거나 인류의 산출물 즉 ‘통제되지 않는 네트워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신의 능력을 넘보았던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인류는 자신이 만든 창조물의 도전과 공격을 두려워했습니다. 알파고와의 대결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희망과 함께 퍼진 건 미래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하나의 프로그램과 한 인간의 대결이었지만 전 세계의 기대가 뒤섞였습니다. 인간의 승리를 쉽게 낙점했지만, 최종 결과는 알파고의 4대1 압승. 알파고의 수 하나에 많은 사람의 탄식이 이어졌고,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한 알파고는 실수나 공격의 경향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최적의 수를 판단했고 바둑을 두는 그 순간에도 지난 데이터를 복기하며 완벽한 수를 놓아가는 알파고. 이 알파고엔 딥러닝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여러 알고리즘이 적용되었습니다.


알고리즘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나 방법을 공식화한 형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알고리즘 덕분에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기술뿐 아니라 일상이란 시스템을 유지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사회적 알고리즘도 있습니다. 거대한 단위인 국가 공동체에서는 사회 서비스의 일관된 질을 유지하기 위해 공통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범주화하고 그에 맞는 동일한 해법을 도출합니다. 상황에 따른 시스템의 대응을 패턴화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시스템을 구동되기 위해 설정한 최소의 상황은 ‘기준’이 되었고 이 기준은 뜻밖의 문턱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사람이 겪어내는 현실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국가 공동체에서는 개별 존재가 처한 삶의 위기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시각 정보를 전달하는 시신경이지만 정작 시신경 위로 사물이 맺히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맹점’이 되듯, 대상을 찾기 위해 마련한 기준 위로 사람이 놓이면 국가 시스템의 눈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서울 관악구의 임대아파트에서 북을 떠나 남에서의 생존을 꿈꾼 모녀가 숨진 지 두 달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두 달이란 시간은 알고리즘이 작동되는 시차와 같습니다. 미납된 요금의 징수를 위한 국가의 알고리즘이, 밀린 월세를 받기 위해 시장의 알고리즘이 작동되었고 이웃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에 독촉의 의미만이 담겨버린 건 알고리즘이 남긴 그림자입니다.


북에서의 배고픔을 떠나 다른 삶을 꿈꿨던 두 모자의 사인은 아사로 추정됩니다. 돈이 없어 물이 끊긴 집은 더 보금자리라 할 수 없었고, 차갑게 식은 두 사람이 바라보았던 냉장고엔 빨간 고춧가루가 전부였습니다. 아들은 장애가 있어 어머니의 보호가 필요했고,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홀로 직장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아동수당은 만 6세가 넘으며 중단되었고, 탈북 가족의 원활한 정착을 돕는 하나원 또한 정착 초기 가족이 아니면 지원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민센터에 제공하는 도움은 접수부터 서비스까지 많은 장벽을 홀로 넘어 신청해야 했습니다.


알고리즘은 세상의 범위를 제안하며 동시에 제한합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설계한 세상을 넘어 서로를 마주해야 합니다. 효율과 속도를 넘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각자의 세상이 알고리즘의 구조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알고리즘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는 재귀적으로 문제를 사고하는 능력입니다. 거대한 덩어리로 대상을 설정하기보단 더 작은 단위로 문제를 쪼개고 쪼개며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세대나 소득분위로 존재를 범주화시키는 것이 아닌 수치란 기준에 갇힌 개인의 삶을 꺼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알고리즘은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를 지배하는 최우선의 논리 구조로 정착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 또한 여전히 타인을 마주할 때나 세상을 바라볼 때 기존에 세운 패턴과 경험으로 정답을 찾으려 애쓸 것입니다. 비슷해 보이던 많은 것의 다름을 알게 되는 것, 편견과 시야를 가리는 내 안의 여러 논리 구조를 소거시키는 것이 사계를 보내며 새 시간을 준비하는 저의 가장 중요한 다짐이기도 합니다.


짧은 문단 속 네 개의 키워드를 통해 살아 낸 한국 사회와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시간에 대한 다짐이 담겨 표현이 단호하거나 의견을 너무 단정적으로 담진 않았나 하는 노파심도 떠오릅니다. 1년 전 이맘때, 노마드란 단어가 힐링, 욜로에 이은 새로운 청춘의 키워드로 선정되었습니다. 올해의 분위기는 ‘떠남’이 자유를 의미하던 작년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떠난다는 건 내가 머무는 여기보다 훨씬 나은 곳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우리는 계속 존재해야 하고, 존재하기 위한 순간의 선택과 결정이 계속해서 삶의 줄을 이어갈 것입니다. 새롭게 맞이할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엔 언제나 머물고 싶은 곳에 있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이곳을 늘 머물고 싶은 곳을 만들 방법을 고민하고, 변화를 위한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길 청합니다. 그렇게 머물며 더 많은 비평과 더 많은 상상을 그려낼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떠날 곳에 대한 상상보단 머물 곳을 향한 작은 걸음을 동행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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