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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
by Lion Kid Nov 19. 2017

여기 우리의 진심을 두겠소

영화 <더 테이블>

 진실에 편안히 기대볼 수 있는 작품

   몇 년 전의 7월 어느 날 아침, 지하철 경복궁역 출구 앞 카페베네였다. 두 남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자는 자리에 앉았고, 남자는 카운터로 향했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5분 정도가 흐른 뒤, 주문한 커피를 들고, 남자도 여자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주보았다. 아니, 마주보고 앉은 채,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다소간의 어색한 공기가 둘을 감쌌다. 침묵이 자아내는 어색함을 견뎌내지 못 한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은 에어컨 성능이 참 좋다고, 그래서 여름인데 더운 것도 잘 모르겠다고. 여자는, 그래 그러네, 라고 답했다.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그제야 자신이 여자에게 '너는 뭐라도 안 마실래?'라는 질문을 건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는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린 서로에게 궁금하지 않았던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의 말수는 이렇게나 줄어들었을까.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괜한 갈증에,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혼자서만 커피를 마시는 게 아무래도 조금 겸연쩍었다. 여자의 만류에도, 남자는 기어코 물 한 컵을 따라 여자에게 건넸다.


    간단한 근황과, 간단한 계획을 주고 받았다. 서로의 부재에도 멀쩡했던 근황이었고, 서로의 부재에도 멀쩡할 계획들이었다. 이런 이별도 있다는 것에 남자는 조금 감탄했다. 여자는 남자가 따라온 물을 마셨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래도 물이라도 따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여자도 어이 없다는 듯 조금은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두 사람은 한참을 침묵했다. 이윽고 여자가 말했다. 이제 일어날까? 난 여기 조금 더 있을래, 남자는 답했다. 그래 그럼, 갈게, 라고 그녀는 짐을 챙겼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여기 있겠다며, 여자가 물었다. 마지막인데, 인사는 해야지. 여자는 픽, 하고 살짝 웃었다. 남자는 악수를 건넸다. 여자도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잡은 두 손이 따뜻했다. 남자가 말했다. 잘 가고, 잘 살고, 그리고 안녕, 즐거웠어. 여자도 답 했다. 그래, 안녕. 여자가 카페를 나갔고, 남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따뜻한 음료를 시킬 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했다. 요즘처럼 에어컨 성능이 좋은 시대에, 차가운 걸 마시니 괜히 더 추웠다. 이 추위는 분명 에어컨 때문일 거라고, 남자는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이 두 남녀의 이야기는, 실은 나의 이별담이다. 기억도 안 나는 어느 카페에서 역시 기억도 안 나는 어떤 음료를 마시며 시작된 우리 두 사람의 연애는, 경복궁 출구 앞 카페베네에서 나는 커피를, 그 사람은 물을 마시며 마무리되었다. 세상에 좋은 이별이 있는 지는 모르겠다. 나쁜 이별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나쁘지는 않은 이별 인사를 나눈 것 같다고, 나는 그 날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찌됐든 담백한 안녕이었다. 그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이기도 했다. 시간이 어느정도 꽤 흐른 것 같다 싶을 때, 나도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쓰레기 통에 버리고, 카페를 나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7월의 어느 아침이었는데도, 한가롭기보다는 꽤나 분주했던 카페 안이었다. 나와 그 사람이 앉았던 두 자리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바로 앉았다. 조금은 이상한 감정으로 잠깐 그들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우리의 이별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역시 좋은 이별은 못 되었다. 생각해보면, '카페'라는 곳이야 말로 어쩌면 대학 입학 후에 집과 학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방문했던 장소가 아닐까 싶다. 내 삶의 많은 이야기들이 카페에서 시작, 진행, 혹은 마무리 되었다. 마치 그 시절의 연애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테이블'

    영화 <더 테이블>은, 한 작은 카페에서 하루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옴니버스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카페의 주인은, 손님들에게 음료를 내어 줄 때와 테이블을 정리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는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얼핏 지나간 책의 제목이 '녹턴'이었던 것 같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니, 영화에서와 비슷한 디자인의 책이 하나 있긴 있었다. 음악과 황혼에 대한 5개의 소설을 모은 책으로, 삶의 본질을 드러내며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는 책이라고 한다. 음, 역시 내가 삶의 본질을 못 보고 있는 건 부박한 독서량 때문인 건가. 아무튼. 이 책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책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래도 감독의 전작 <최악의 하루> 때문이다. <최악의 하루>를 보다 보면, 은희가 겪는 '최악의 하루'가 혹시 료헤이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은 아닐까,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어느 순간부터 피어나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을 궁지에 몰아넣기만 하고 구해주지 않던 작가 료헤이였지만, 그 날 최악의 하루를 보냈던 은희와는 저녁의 남산에서 아름답고도 환상적인 춤을 춘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쓴' 료헤이였고, 아마도 은희가 주인공인 이 소설만큼은 해피 엔딩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섞인 추측도 들었다. <최악의 하루>는 영화에서 장편 소설의 문학 특성이 보였다면, <더 테이블>은 에세이 모음집을 읽는 느낌이다. 책을 처음 펼치는 게 카페를 열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거라면, 책장을 넘기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고, 책을 다 읽고 덮는 것은 카페를 닫는 일이다. 영화 안의 네 에피소드들은, 그 에세이집의 수록 작품들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듯 하다.


    각 에피소드들은,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일상적이라면 일상적이며, 그럼에도 역시 비범하다면 비범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번잡한 프랜차이즈는 안되고, 아니면 '핫 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카페 역시도 부적격이며, 어느 골목의 조용하고도 작은 이 카페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비범하다면 비범하다는 것 역시 이 카페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 제목은 '더 테이블'이지만, 왜 '이 카페'의 테이블이어야 하는지 먼저 고민이 되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의 프랜차이즈 카페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촌 혹은 광화문의 스타벅스나 투썸 플레이스는 왜 이 영화의 배경이 될 수 없었을까. 첫 번 째 에피소드의 '주변에 갤러리들도 많고'라는 정유미의 대사로부터, 영화 속 카페의 위치를 얼핏 추론해 볼 수 있었다. 인사동이나, 북촌, 아니면 이 어디쯤에 위치한, 그러면서도 회사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과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서울 어느 골목의 작은 카페. 서울의 도심부에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길에 널린 게 카페다. 프랜차이즈 카페들, 혹은 분위기가 좋거나 특색있는 카페들 모두가 가리지 않고 이 길 위에 존재한다. <더 테이블> 영화 속 네 에피소드들의 주인공이 이 작은 카페로 온 것은, 정말 '굳이' 왔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듯 하다. 만남의 공간 자체가 그 만남의 성격을 규정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들이 굳이 골목의 조용한 한 카페를 찾은 이유는, 무엇을 마시고 하는 행위 자체 보다도, 어떤 안온한 '공간'이 더 절실히 필요했던 것 아니었을까.


    이들이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들은, 아마도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카페에서는 정확히 전달될 수 없는 언어들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건, 정확히 건네야 할 어떤 감정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영화 속 카페와 이 곳의 테이블은, 단순히 두 사람이 마주보며 자신의 음료를 마시는 물리적인 형태에서 그치는 공간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이 마주보고, 그 진심을 건네야했다. 진실의 사전적 정의는 '거짓이 없는 사실'이고, 진심의 사전적 정의는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A라는 말을 했다고 하면, '그가 A를 발화'했다는 명제에는 거짓이 없고 그러니 이는 진실이다. 하지만 A 자체가 발화자의 진심이었는지는, 오직 그 사람만 아는 일이다. 때로는, 진실 때문에, 혹은 그 진실을 지켜내기 위해, 작은 진심이 훨씬 더 큰 진심을 이기기도 한다. 감독의 전작 <최악의 하루>에서는, '진실이 진심을 어떻게 이겨요'라고 주장하는 운철의 대사가 등장한다. 이렇게 이야기한 그의 진실은, 주인공 은희 대신 전처와의 재결합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진실이 진심을 어떻게 이겨요, 라고 그는 얘기했지만, 진실은 그렇게 진심을 이겼다. 넬의 'Standing in the Rain'이란 노래 가사에는 '진심은 늘 무기력해'라는 구절이 있다. '진실이 진심을 이긴다'와 '진심은 늘 무기력해'를 합쳐보면, 무기력한 진심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가 되겠다. 진심이 무기력하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 가사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모래처럼 부서지고 파도처럼 흩어지네'라는 구절에서 그 뜻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무리 단단한 모래성과 높은 파도도 결국에는 쉽게 부서지고 흩어진다. 어떤 거대한 진실 앞에서 결국은 부서지고 흩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심의 속성일 지도 모르겠다. 진심은, 다른 한 편으로는 '지는 마음', 혹은 '지고야마는 마음'의 축약인 것은 아닐까.

진심에 대한 이야기, 영화 <더 테이블>

    네 쌍의 인연들이 이 영화에 등장한다. 각각의 인연에 있어서 불과 몇 분에 남짓한 시간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들 인연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우리는 그들이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서만 그들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에피소드들의 중반까지는 스크린 상의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를 파악하는 데 주로 소비된다. 네 번을 반복해야 하는 이 추리 과정은 영화를 밀도있게 관람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단 하나의 에피소드를 전체 러닝타임동안 다뤄야 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와 주된 대화를 파악한 후에는 상당한 지루함을 느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네 쌍의 인연들은, 각자가 빚어온 진심을 건넨다. 발화된 언어들은 '진실'로 수렴된다. 네 번 째 에피소드에서의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다르다'는 대사는, 진심과 진실의 차이를 명징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녀(임수정)에게로 가고 싶은 남자(연우진)였고, 당연히 그의 진심은 '싫냐고'라고 물어보는 그녀의 질문에 '아니, 안 싫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싫어'라고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남자가 있고, 자신은 또 그럴만한 능력이 못 되며,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결혼 날짜까지 잡은 상태다. '싫냐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그의 대답을 채근하던 그녀에게, 그는 동문서답 같은 대답들을 하다가, 마침내 '싫어'라고 또렷하게 말 한다. 곧 결혼할 그녀에게, 그리고 이미 다른 사람이 있는 그녀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진실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는 그의 진심을 '싫어'라는 대답으로 감추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싫어'는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카페 밖으로 나온 그들은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 남자는, '어제도 당신과 자고 싶었고, 또 어제 꿈에서는 당신과 여기저기를 걸었다'는 말을 건넸다. 그건 아마도 남자의 진심이 투영된 소망일 테다. 그럼에도 그러면 안 된다는, 혹은 그럴 수는 없다는 진실 앞에서, 그의 힘없는 진심은 부서지고 흩어졌다. '싫어'라는 대답으로 진실의 단단함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자신의 진심을 있는 힘껏 부딪혀 들어낸 아픈 대답이었기에, 그 충격의 여진이 스크린 너머 객석에까지도 다소 아릿하게 전달되었다. 더 강하게 부딪힐 수록, 그 통증이 훨씬 더 크다. 그 아픔으로, 이제 두 사람은 볼 수 없는 사이라는 또 하나의 슬픈 진실이 정립됐다.

네 번 째 에피소드, '송가'

    결국 이 영화는 '진심'에 관한, 그리고 그 진심이 어떻게 전해지고 또 숨겨지는 지에 관한 작품이었다. 진심은 전해지거나 숨겨짐으로써 발화라는 진실을 만들어낸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그 언어는 더 이상 발화자 만의 독점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청자에게는 발화된 진실만이 도달할 뿐이다. 들린 진실과 발화자의 진심은 일치할 수도, 혹은 그 둘 사이에 괴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 영화의 네 번 째 에피소드에는, 전자의 발화된 진실을 '사람이 가는 길', 그리고 후자의 진심을 '마음이 가는 길'이라 표현했다.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들에도, 이 '길'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첫 번 째 에피소드는 이젠 스타가 된 한 배우(정유미)와, 그녀에게 연달아 '추억'을 언급하며 스스로의 과시욕을 충족하려 하는 전 남자친구(정준원)의 이야기였다. 찌질하기 그지 없는 이 남자의 진심은, 결국 내가 이 스타 배우와 연애했었고, 또 지금도 이렇게 대면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나도 오랜만에 만난 네가 이렇게 눈치가 없을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객석에까지 전해지는 남자의 찌질함과 작은 그릇을 당사자인 그녀가 느끼지 못 할 일은 없었을 테다. 하지만 그녀는 같이 사진을 찍자는 남자의 요구에도 응하고, 자신과의 만남이 주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도, 다음에 또 연락해도 되지, 라고 못나게 묻는 남자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아마도 여자에게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남자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고, 따라서 남자의 못난 행동들에도 '겉으로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남자의 입에서 유난히 '추억'이란 말이 많이 나왔는데, 그녀에게 테이블에서의 시간은 남자와의 추억이 붕괴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붕괴되는 추억과 감정의 파편을 붙잡고, 그녀는 마치 남은 애틋함을 소진하겠다는 듯 남자의 무례함과 찌질함을 포용해주었다. 그녀에게도 사람 가는 길과 마음 가는 길이 달랐다. 다만, 그녀의 마음은 반대 방향으로 조금 더 늦게 출발했고, 그래서 피상적인 진실로는 그 둘의 애틋함과 '추억'을 지켜낸 셈이 되었다.

첫 번 째 에피소드, '149'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 뒤, 4개월 가까이 연락이 없다가 이제야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두 번 째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란 책에는,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라는 구절이 있다. 남자(전성우)와 여자(정은채)는, 서로를 정확하게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서로에게 정확하게 사랑받지도 못한 채 지난 4개월을 보냈다. 다시 만난 남자에게, 여자는 그가 그녀의 집에 두고간 시계를 돌려주었다. 영화 <만추>를 이야기하며, 이동진 평론가는 '결국 사랑은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라는 한줄평을 남기기도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돌려준 남자의 시계는, 그녀의 사랑, 혹은 기다림의 상징이다. 어느 순간 감정이 복받쳐 오른 그녀는, '우리 집에서 고작 하루 있었던 사람'일 뿐인데, 그런 당신으로부터 내내 연락이 없어서 마음이 상했고, 그럼에도 또 자기가 연락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았다며, 그 동안의 심경을 토로한다. 이는 사람과 마음의 길이 같았던 발화였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역시 체코에서 그녀를 위해 산 시계를 여자의 손목에 채워준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도 그녀를 잊은 건 아니라고, 남자 본인 또한 그녀를 기다리고 늘 생각했음을 시계라는 클리셰에 가까운 메타포로 증명하였다. 남자가 그녀를 매 번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매일마다 시계 태엽을 맞추며 시계에 약을 줬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도 그녀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그는 이어 이야기한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게 되면 아무래도 자신처럼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남자는 스스로를 변명하고 해명하며, 그는 여행 중에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샀던 기념품들을 '진열' 하다시피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정확한 마음을 정확한 방식으로 건넨다. 실은 자신이 파스타를 조금 잘 하는데, 같이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겠냐고. 카페를 나선 두 사람은, 나란히 같은 길을 걸어간다. 두 사람의 사람가는 길과 마음가는 길이 모두 같았고, 그 일치는 설렘과 반가움의 감정을 함께 불러왔다. 어쩌면 두 번 째 에피소드의 이 마무리 때문에, 이 후 네 번 째 에피소드에서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게 더 아리게 와닿았던 것 같다.

두 번 째 에피소드, 그리움이라는 돛을 달고 긴 새벽을 지나'

    세 번 째 에피소드에서도 두 번 째 에피소드에서처럼 미처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 한 진심을 전하고, 또 미처 듣지 못 했던 정확한 진심을 건네 받는 순간이 존재했다. 그러나 완벽한 정확함까지는 못 되었다. 상견례와 결혼식을 앞 둔 여자(한예리)는, 또 다른 중년 여성(김혜옥)을 이 카페에서 만난다. 중년 여성에게 그녀는 상견례와 결혼식 자리에서 자신의 어머니 역할을 대리해줄 것을 의뢰한다. 중년 여성을 몇 년 전 딸을 잃은 경험이 있다. 결혼을 앞 둔 젊은 여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중년 여성의 딸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딸의 상견례 자리(혹은 결혼식. 기억이 불확실하다.)에 참석하기 위해 사놓은 옷도 결국 못 입었고, 그런 상태에서 딸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옷을 직접 준비하겠다는 중년 여성이, '이럴려고 산 옷은 아닌데..'라며 말을 흐리는 장면에서 그녀의 상심을 조금 헤아릴 수 있었다. 고객과 피의뢰인 관계였던 두 사람이, 다소 모녀간의 모습처럼 보이게 되는 어떤 시점이 있었다.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젊은 여성의 말에, 중년 여성의 피의뢰인이 자연스레 말을 놓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젊은 여성은,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이 '느림보 거북이'었다고 말한다. 느림보 거북이란 여섯 글자를 가만히 입에서 굴려보던 중년 여성은, 상견례 자리에서의 대사를 연습삼아, 아마 자신의 딸상견례에서 하고 싶었을, 그리고 어떤 일이 그녀와 딸 사이에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딸이 살아있는 동안 한 번 쯤은 몹시 전해주고 싶었을, 자신의 진심을 건넨다. 이 정확한 진심의 수신인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 늦은, 그래서 영원히 전할 수 없는 자신의 진심을, 중년 여성은 고객의 의뢰를 기회삼아 따뜻하게, 하지만 서글프게 전한다. 이를 들은 젊은 여성 고객에게도 중년 여성의 진심어린 애틋함이 전달됐을 테고, 아마도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마음을 그녀는 느꼈던 것 같다. 젊은 여성은, 잠시 침묵한 뒤에, '잘 하셨어요'라고 그녀에게 얘기한다. 이 '잘 하셨어요'가, 중년 여성의 죄책감과 심리적 부채를 조금은 덜어주었기를, 그래서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기를, 이들의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속으로 조금 바랐다.

세 번 째 에피소드 '엄마의 편지'

    네 번 째 에피소드를 먼저 소개한 것은, 결국 이 에피소드에서의 '왜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라는 대사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번 째 에피소드가 끝나고, 오늘 하루라는 수필집은 마무리 된다. 기억이 맞다면, 이렇게 하루가 끝날 때 즈음 카페의 주인 역시도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두 주인공이 카페를 나간 뒤, 카페의 주인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그들이 마신 컵을 정리한 후에, 가게의 불을 끈다. 일상의 편린들로 이루어진 '오늘'이란 에세이집은, 역시 '오늘'이 될 '내일'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유효한 스테디셀러다. 오늘 하루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사연들이, 이 가게에서, 또 이 테이블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들이 입을 댄 잔과 컵, 또 앉았던 의자와 손을 올렸던 테이블은, 내일과 그 다음 날, 또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이 카페가 문을 닫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이 찾아와서 역시 잔과 컵에 입을 대고, 의자에 앉으며, 또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릴 테다. 영화 <아무르>에서 노년 부부가 죽고 그녀의 딸 이자르 위페르가 그들의 의자에 앉는 장면을, 신형철 평론가는 이젠 죽음이 딸에게 '상속'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잔과 컵, 의자, 그리고 테이블 역시 임의의 누군가에게 상속될 테고, 그들 또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거나 삼켜냄으로써 하나의 발화된 진실을 만들 것이다. 조금은 이어달리기 같은 일이다. <아무르>에서 상속된 것이 '죽음'이었다면, <더 테이블>에서 내일의 사람들에게 상속될 것은 일상의 '희로애락'일 듯 하다. 그 감정들 중에서도, 스타벅스나 투썸 플레이스는 안 되고, 반드시 이 가게의 이 테이블 위에서 다루어야 할 어떤 사연과 이야기가, 마치 바톤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지지 않을까.


    영화 음악에 조예 같은 건 진작에 없으니,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보며 내 나름대로의 BGM을 붙여보았다. 첫 번 째 부터 네 번 째 에피소드들까지, 순서대로 라즈베리필드의 '149', 아를의 '그리움이라는 돛을 달고 긴 새벽을 지나', 디어클라우드의 '엄마의 편지', 그리고 로로스의 '송가'다. 준비성이 없는 사람이라 미처 영화관에 메모장을 들고가지 않았고, 따라서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보며 떠오른 노래들을 영화가 끝나자마자 메모장에 기록해두었는데, 지금 보니 썩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순전한 자평을 내리는 중이다.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는 지하철을 탔는데, 아마도 영화의 잔상 때문인지 별 거 아닌 것들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저 의자에는 누가 앉았을까, 혹은 저 손잡이에는 누가 기대었을까. 그 사람은 얼마만큼의 고단함과 슬픔, 혹은 기쁨을 안고 지금 내가 앉은 이 의자에 앉았던 걸까. 우린 참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와 참 많은 걸 공유하며 살고 있다는, 그런 새삼스러운 자각도 들었다. 그 많은 공간과 도구들 중 '카페 테이블'은, 가장 인기있고 대중적인 감정 교류의 장일 지도 모르겠다. 어떤 날들 중에 가끔은, 번잡함과 소란함은 잠시 내려놓은 채 마음과 마음이 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그런 날도 있다.


    이 영화를 본 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정갈하다'였다. 특별하거나 눈길을 사로잡는 자극은 없지만, 매일 먹는 가정식이 그렇듯 지루하기보다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꽃병을 비롯한 소품들의 분위기도 그랬고, 잔과 컵을 정성스레 닦는 모습에서도 정갈함을 느꼈다. 손님이 떠나면 테이블을 깨끗이 치워졌고, 닦아졌다.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유난히 가까워지고 싶은 날에 이 곳을 방문한 손님들은, 각자의 진심을 이 위에 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게 입을 통하여 마침내 발화되었든, 아니면 끝내 삼켜낸 한 줌의 덩어리였든, 이 테이블은 그 모든 진심을 머금고 있을 테다. 이는 몇 번의 걸레질로도 닦아낼 수 없는 무형의 얼룩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음이 머무는 곳.

    언젠가, 미처 꺼내지지 못 한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라는 다소 궁상맞은 상상을 했던 적 있었다. 어쩌면 그 언어들 중 많은 것들은, 그 날 그 때 우리의 테이블 위에서 숨 쉬고 있겠구나, 라고 역시나 궁상맞은 추측을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잠깐 하기도 했다. 우린 우리의 진심을 이 곳에 둔 채 테이블을 떠났고, 말끔히 정리된 테이블 위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진심이 보태졌겠지. 영화 <더 테이블>은 일상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일상이 단순히 반복되는 관성적 일상은 아니다. 습관처럼 찾는 대로변의 번잡한 카페가 아니라, '굳이' 찾아 들어온 어떤 작고 조용한 가게에서의 이야기였으니까. 이 궁상맞은 상상 안에서, 나는 도처에 널린 프랜차이즈 카페들을 마다하고 굳이 이런 조용하고 고즈넉한 카페를 찾았던 나의 경험들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 곳의 테이블들에, 진심이란 얼룩을 조금 더 많이, 혹은 칠칠맞게 흘렸던 듯도 하다. 그날들에 이 테이블 위에서 흘렸던 진심들 중에는, 고마웠다는 말, 덕분에 행복했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그리고 가끔은, 아직도 많이 사랑한다는 말도 있었다. 물리적으로 전해지지 못 한 진심들은 후회나 미련, 혹은 고통이 되었고, 종종 나를 괴롭혔다. 지금도 모든 기억들이 말끔한 추억으로 승화된 건 아니지만, 시간이 꽤나 흐름에 따라 순간의 감정들은 어느 정도의 아릿함으로 해소되는 수준에는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영화 <더 테이블>에서 가장 큰 뭉클함을 느꼈을 때는, 오히려 모든 에피소드들이 끝나고 카페의 불이 꺼질 때였다. 테이블 위에 어떤 사연이 놓이고 또 어떤 진심이 오가는지 상관없이, 시간은 시간대로 흘렀고, 테이블은 역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이 에세이집 안에 어떤 이야기들이 수록되었든, 오늘이란 책은 그렇게 덮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끔은, '시간은 어쨌든 흐른다'나 '그 곳은 그대로 있었다'라는 별 것 아닌 진실이 꽤나 울컥한 위안을 선물할 때가 있다. 영화 <더 테이블>은 이 별 것 아닌 진실에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히 기대볼 수 있던 작품이었다. 소란스럽듯 조용했고 조용한듯 소란스러웠던 이 하루도, 마치 책을 덮는 것 처럼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오늘이 끝나고 내일 역시도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 테이블 위에서 시작되고, 진행되며, 혹은 마무리 될 거라는 사실이, 참 뭉클한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지나가는 곳'이라는 카피 문구가, 그래서 조금 더 와닿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마음이 지나가기 전에 머무르기도 하는 곳이, 역시 영화 속 카페의 테이블이었다. 우리들의 이야기, 그 중에서도 특히 조금은 더 아릿하고, 애틋하고, 애잔한 것들이, 피어나고, 만개하고, 소멸하는 곳, 어느 작은 카페의 <더 테이블>이었다.


    *기존의 <시각의 지평선> 매거진 속의 글들을 재구성 및 편집하여 <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이라는 이름의 위클리 매거진으로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기존 매거진의 글 일부는 잠시 비공개로 보관해두었습니다. 12주의 연재 후에 다시 공개 전환할게요. 새 위클리 매거진의 영문 주소는 'brunch.co.kr/magzine/filmborderstory'입니다. 'Film Border Story'라는 이름이 다소 너무 거창해보이기도 하지만, 스크린과 저 사이의 경계에서 잉태된 생각과 감정들이 이 매거진 안 글들에 실릴 예정이기에 이 제목을 골랐습니다. 서로가 가진 시각의 지평선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또 다른 세상이 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 그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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