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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
by Lion Kid Nov 26. 2017

당신이 정말로 미안하다면

영화 <어나더 어스>

속죄의 깊이와 정도, 그리고 용서의 시기는 가해자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법은 자력구제를 금지한다. 따라서 피해자는 스스로 응분의 조치를 가하기보다는, 제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경우, 법은 충분히 정의로우면서도 권위있고, 믿음직하면서도 따뜻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피해자의 억울함과 울분, 그리고 자연스레 기인한 복수심을, 법이 정당한 절차와 권능으로 충분하게, 하지만 넘치지 않게 대리 행사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력 구제의 선택지를 내려놓고 법률적 판단에 집행의 책임을 위임한다. 이는 물론, 법이 마땅히 제 구실을 해낼 수 있으리란 최소한의 기대라도 피해자가 견지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자력 구제를 택할 수밖에 없던 소년과, 그를 괴롭힌 가해자, 그리고 자신 아들의 결백을 왜곡되게 맹신했던 어머니까지. 장강명 작가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 세 사람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한 아이가 있었다. 남자 중학생 소년이었다. 아이는 조금 남달랐다. 불행하게도,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남다름'이 '틀림'으로 간주되는 곳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조금 더 예민한 감수성과 까칠함의 발로였는지, 아이는 유난히도 SF 소설과 영화를 좋아했다. 그 날 학교에 갔던 아이의 가방에는 영화 CD가 한 장 있었다. 제목은 <바디 에일리언>. '남다름'이 '틀림'으로 간주되는 세상은, '몰상식'과 '검열'이 정당한 검문으로 포장되던 뻔뻔하고도 폭력적인 세계였다. 아이의 담임 교사는 그 '검열'의 집행자였다. 집행에 있어 어느 정도의 인권 제한은 당연하다고 믿는 몰상식함이 그의 삶과 언행에 배여 있었다. 아이의 가방에서 <바디 에일리언> CD를 찾아낸 담임은, 외설적인 단어들로 아이의 취미를 모욕했다. 담임은 SF에 대해 무지했다. '바디'와 '에일리언'에서 음란물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게 담임이 가진 세계의 한계였다. 그가 더 나빴던 것은, 자신의 좁디 좁은 지식과 세계관으로 학생들을 통제하고 재단하려는 데에 있었다. 효율이란 두 글자는 담임의 독선과 폭력에 복무하는 하나의 명분이 되었으리라.


   <바디 에어리언>을 담임에게 걸린 소년은 그게 음란물이 아니라고 또렷하게 말했다. 아닌 걸 아니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매를 맞을 이유가 없었다. 담임은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는 담임의 정곡을 찔렀다. 가방 검사는 인권 침해라고, 담임에게 쏘아 붙였다. 화난 담임은, 아이만을 열외시킨 채 반 전체의 학생들에게 매를 휘둘렀다. 모두 다섯 대 씩. '집행의 폭력'에서의 열외는, 곧 '집단적 폭력'의 발초가 되었다. 아이는 괴롬힙을 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디 에얼리언>이란 제목 만을 보고 음란물을 떠올리고, 그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 담임을 믿을 수는 없었다. 제도권의 방어책은 아이를 충분히 포용해주지 못했고, 아이에게는 그것에 대한 기대조차 없었다. 그렇게 자력 구제를 부추기던 세상이었다. 아이는 결국 직접 칼을 빼들었다. 가해자를 찔렀고, 죽였다. 그리고 순서대로 소년 교도원과 교도소, 정신병원을 거쳐 사회에 나오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아이의 불행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소년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죽였던 가해자의 어머니가, 오히려 소년의 삶을 방해하고 재기를 망치고 있었다. 소년에게는 누구보다 끔찍했던 가해자 학생이, 우습게도 그의 어머니에게는 그저 예쁜 한 아들이었을 뿐이었다. 괴롭힘에 대한 정당방위로 칼을 휘둘렀다는, 그래서 사건의 발단이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았다. '엄마 같은 마음'이라는 핑계로, 그리고 '가슴이 낳은 아들'이란 명분으로, 그녀는 사사건건 어른이 된 소년을 스토킹했고, 어디서든 그녀 아들의 결백을 우겨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며, 어른이 된 소년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걸 지독하게 방해했다. '학교 폭력을 당하다, 괴롭힘을 못 이기고 급우를 찔러 죽인 학생'이라는 수사어에서, 가해자의 어머니는 '학교 폭력'이란 네 글자의 존재를 있는 힘껏 부정했다. 그녀에게 소년은, 자신의 아들로부터 고통 받은 피해자가 아니라, 끔찍한 살인자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결국, 그녀 아들의 살인자를 찔렀고, 죽였다. 소년은 그렇게 죽었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았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었으며, 가해자의 가족은 다시 피해자가 되어 복수를 행하였다. 끝없이 이어질 수 있던 폭력의 악순환이었다. 여기서 작가는 SF적 요소를 주입했다. '소년'에게 시간을 앞서 볼 수 있는 '초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우주 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어른이 된 소년은, 자신이 죽인 남자 아이의 어머니가 이번에는 되려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뻔히 알고도, 그 길을 택하고 칼에 찔린다. 피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오히려 그 어머니를 위해, 자신이 죽인 아이는 죄가 없다는 유언까지 남겼다. 당시의 괴롭힘에 대한 복수였지만, 어쨌든 살인이었고 폭력이었다. 기어코 자력 구제로 소년을 죽이고야 마는 가해자 어머니의 천박함과 비정함을, 그는 마치 순교를 하는 것 처럼 마지막 유언으로 이 연쇄사슬 위에 얹힌 폭력의 먼지를 걷어낸다. 이 지독한 악순환에서 그의 죽음이 마지막 폭력일 수 있도록, 그는 스스로 속죄와 화해의 텍스트를 완성했다. 그 자신의 죽음으로 아주 오래도록 끈질겼던 폭력의 연쇄고리를 기어코 끊어낸 것이다. 사실상 자살이었지만, 굳이 가해자의 어머니가 최후의 폭력의 집행자가 되어, 그를 직접 찌르고, 피를 보고, 그래서야 그 폭력의 끝에서 지난 과거와 마침내 화해할 수 있도록 그는 의도했다.

새로운 삶이라는 가능성이 있었던 <어나더 어스>

   속죄를 작품으로 한 작품은 많다. '속죄양 모티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쩌면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의 아주 흔한 주제가 '속죄'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훌륭한 작품들이 꽤 있다. 영화 <피에타>가 그렇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가 그렇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어나더 어스>가 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읽으며, 이 영화가 유독 많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책에 간간히 배치 되어있는 SF적 요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급된 이들 작품이 훌륭하게 느껴진 이유는, 주인공들이 모두 성실하게 자신만의 속죄를 이행했다는 데 있었다. 법이 내린 '죗값'을 다 치루고도, 별개로 자신만의 속죄를 피해 당사자에게 행했다. 폭력과 복수, 그리고 분노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과 희망, 그리고 용서와 관용의 출발점으로써 자기 자신을 설정하는데 그리 망설이지 않았다.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처럼, 때론 죽음까지 감행할 정도였다. <어나더 어스>의 주인공 주인공은 그 중에서도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의 주인공 남자와 가장 흡사한 방식의 속죄를 행했다. 이 영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영화 <어나더 어스>의 여주인공 로다에게는 보장된 미래가 있었다. 우리의 지구와 완전히 똑같은 제 2의 지구(바로 제목의 'Another Earth'다)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 그녀는 명문대 입학(무려 MIT 대학이다)을 축하하는 파티에 참석했고, 술을 마셨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음주 상태로 핸들을 잡았고, 그렇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제 2의 지구 소식을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운전하다가, 결국 일가족이 타고 있던 승용차를 그대로 박아버렸다. 그 때문에 차에 타고있던 아내와 어린 아이는 모두 죽고, 유일한 생존자인 남자는 혼수상태에 놓였던 후에 깨어나서는 매일 같이 술에 쩔어 폐인같은 생활을 이어 나간다. 사고를 낸 여주인공은, 당연히, 징역 살이를 해야 했다. 꿈꿨던 명문대 생활도 당연히 없다. 이럴 경우,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한 순간의 실수로 치부하며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출소 이후 로다는 상당히 무기력했다. 명문대에 입학할 만큼 똑똑한 그녀였지만, '지적인' 사회활동을 권유받았음에도 그녀는 굳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택한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해야, 그렇게라도 힘이 들어야, 역설적으로 그나마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 아닐까. 그러던 로다는, 자신이 사고를 낸 장소에 방문한다. 거기서 사고의 생존자인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다. 집에 돌아와 사고의 전황을 인터넷에 검색하고, 이윽고 그녀는 그 남자가 자신이 낸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걸 깨닫는다. 로다 자신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음에, 스스로의 인생을 변명하고 억울해하는 대신, 그녀는 당시 사고에서 살아 남은 남자의 집을 찾아간다. 속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용기가 선뜻 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무료 청소 서비스라며 거짓말로 소개하고, 그렇게 그의 집을 청소하며 남자의 삶을 사소하게나마 낫게 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성의를 다해 청소를 하고, 그 남자의 대화 상대도 되어 주며, 남자가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재진입할 수 있게끔 협조하던 로다였다.

영화 <어나더 어스>

    그런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로다는 제 2의 지구로 가기 위한 사연을 이전에 쓴 적 있었고, 그 사연이 채택되어 그녀는 어나더 어스(Another Earth), 즉 또 다른 지구에 갈 수 있는 티켓을 받은 것이다. 그녀의 사연은 이랬다. 전과자인 자신이 이 곳 지구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제 2의 지구로 가는 일에는 적임자일지도 모른다고. 제 2의 지구는 마치 우리의 지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행성이다. 이 지구의 A라는 사람이, 거기서도 거울처럼 존재한다. 하지만 '깨진 거울'처럼, A라는 사람들의 인생은 서로 미묘히 다르다. 그러니 그곳에서라면 그녀는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서는,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아 일가족을 몰살시킨 사고를 내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여자는 그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새출발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녀는 남자에게 이야기한다. 제 2의 지구로 가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마침내 남자에게, 자신이 가족을 죽인 범인이라는 걸 진실하게 털어놓고, 그러면서도 용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끝내 괜찮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로다는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 삶의 마지막 희망을 그에게 줌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속죄를 구한다. 제 2의 지구로 가는 티켓을 남자에게 양도한 것이다. 거기서는, 남자의 가족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삶의 최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에서조차, 그녀는 남자에게 속죄를 행했다. 로다 스스로 '죗값을 충분히 치루었다'라며 자의적으로 판단내릴 몰염치함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삶이 그녀를 시련에 빠뜨린 게 아니라, 그저 그녀가 잘못을 했을 뿐이라고. 로다 스스로는 가해자이며, 그렇기에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고, 또 자신의 잘못에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용서의 권한은 오직 피해자만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일렉트로니카 밴드 캐스커의 이준오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며, 죗값을 다 치렀다는 말처럼 바보같은 말이 세상에는 또 없다고, 이야기한 적 있었다. 속죄의 깊이는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소녀의 속죄는 담백했지만 그래서 진실했다. 정말 죄송하다고,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이것이 그녀 속죄의 전부였다. 본인 역시도 4년의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으며, 꿈꾸던 대학 생활도 못 한 채 청소부로 전전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변명하기 바쁘다는 점에서, 로다의 짧지만 담백한 속죄는 오히려 더 큰 울림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를, 또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상처를 안겼던 그들의 행위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어쩌다의 '실수'로 비롯된 결과라며, 되려 타인이 느낀 상처의 크기를 일축하기도 한다. 진실된 용서 대신, 자신만은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오히려 뻔뻔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들도 흔하다. 말 뿐인 속죄는 차고 넘친다. '잘못했다'고 했으니, 혹은 그에 따라 법이 정한 '벌'을 받았으니, 자신은 죗값에서 자유롭다고 믿는 어리석음이,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팽배하다. '탄원서'를 매개로 '합의'라는 허울 좋은 거래가 오가기도 하며, '적당한' 죗값을 지불하면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이, 그리고 당당하고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여주인공은 남자에게 자신의 기회를 양보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어나더 어스>와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함께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미래의 인생이 꼬이게 된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들의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조차 않는 듯하다. 그리고, 가능하면 피해자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과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진심으로 노력한다. 그들 최선의 미안함으로 잘못을 반성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속죄의 절차를 이행한다. 그 '사고'가 없었다면 창창했을 자신의 미래를 비탄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혹은 '정당 바위'였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그들 행위의 결과를 그 자체로 감내하고 상대를 위로한다. 이것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는 특히 극적인데, 피해자였던 자신이 우발적 가해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찔러 죽인 학생 어머니의 왜곡된 믿음을 끝내 지켜준 것이다. 동시에, 이후 또 다른 폭력이 발생하는 걸 그 자신의 죽음으로써 예방한다. 이 정도로 진정성 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려나온 속죄는, 어쩌면 그래서 문학 작품에서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잘못했다'는 말들이 뉴스만 틀면 횡행하는 세상이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는 경우가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죄형법정주의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자력 구제를 금지하는 제도의 원칙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아니다. 이는 사회를 유지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자력 구제를 허용한다고 생각해보자. 세상의 혼란과 혼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 '괴리'에 대해서만큼은 분명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생의 '재수 없는' 실수를 '죗값을 치뤘다'는 안일한 양심으로 마음 편히, 그리고 반성 없이 남은 생을 살아갈 가해자들이, 더 진심으로 속죄를 빌고 용서를 구할 보완적 방책은 없는 걸까. 핑계 대기에 바쁘고, 자신의 아쉬운 인생을 들먹이는 서툰 속죄로 '할 일을 다 했다'며 가책을 털어버리는 건, 누군가의 표현처럼 '참혹한 짓' 아닌가. 말 한 마디로 모든 걸 퉁 치는 되도 않은 사과보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게 더 진심 어린 방식으로 용서를 구할 방법은 없는 걸까. 진심 어린 속죄가 소설과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현실이 증멸할 수는 없을까. 용서의 주체는 오로지 피해자에게 있으며, 그 결정권의 주체성은 누구에게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보고,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20분도 안 되어 끝났을 영화가, 그 한 마디가 끝내 나오지 않아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 되었다고 평한 적 있었다. 양심과 상식이 있다면, 그 어떤 상황이든 진심어린 사과가 우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의 금액으로 지난 가해를 '퉁'치려는 천박한 사고방식 대신, 책임있는 사과로써 용서의 기회를 구하기를 바란다. 이는 양심과 인권과 존엄의 영역이다. 그 어떤 명분도 이를 초월하거나 침해할 수는 없다.

용서의 권리는 오직 피해자에게만 있다

    속죄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글의 흐름과 다소 무관하더라도, 언젠가 방문했던 영국 리버풀의 노예제 박물관을 꼭 언급하고 싶다. 이곳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삶이 황폐화 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 자신들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후손들 역시 얼마나 심각한 트라우마와 후유증, 그리고 여러 문제들 속에 봉착하여 살고 있는지도 소개되었다. 오래 전 왕성했던 노예 사업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생존이 아니라 잔존하고 있다. 그 어떤 사과로도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는 현재 진행중이다. 리버풀의 노예제 박물관은, 자신들의 만행을 계속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건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기억일 테다. 이 박물관으로 견학 오는 학생들 역시, 자신들 도시에서 자행됐던 수치스러운 역사에 마냥 떳떳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린 마냥 떳떳하지는 못한 그 부끄러움을, 염치나 양심, 혹은 윤리의식이라 부른다. 염치나 양심, 혹은 윤리 의식 모두가 결여된 국가의 입에서 나오는 '화해'니 '협력'이니 하는 것들은 위선에 가깝다. 세상에 자본의 논리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지만, 그것이 판단 잣대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단, 또 사람과 집단 등 피해-가해 관계가 성립하는 어떤 상황에든 적용되는, 명확하고도 명료한 진실이다. 피해자들이 완전히 용서하지 않는 한, '죗값을 전부 지불한' 가해자는 세상에 없다는 것. 그 용서를 위해, 가해자들은 끊임없이 속죄해야 한다. 세상에 몇 없는 보편적 당위가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이것일 테다. '내가 얼마나 더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따위의 참혹한 소리는 되도록 지양하기를 바란다. 속죄의 깊이와 정도, 그리고 방식은 가해자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가해가에게는 용서의 시기를 확답받을 권리 또한 없다. 이게 너무 어렵다면, 그래서 진정성 있는 속죄의 용기가 없다면, 부디 뻔뻔스러움이라도 없기를 바란다. 자신의 인생도 있지 않냐며, 자신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반성' 대신 '탄원'을 호소하거나 요구하는 건더없이 천박한 행위다. 피해자의 순결성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어 진흙탕 싸움 속에서 본질을 흐리는 일 또한 없기를 소망한다. 이것마저도 너무 요원한 이야기같아서, 조금은 서글프다. 아무래도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나 영화 <어나더 어스>의 가장 큰 판타지는, '우주 알'이나 '제2의 지구'가 아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비는 가해자들의 태도에 있는 듯하다. 그래도,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 거기에 그 잘못이 누군가의 인생과 존엄을 황폐화했다면, 속죄까지는 못 되더라도 염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이 정말로 미안하다면 말이다.


    영화 <어나더 어스>의 수록곡들이 참 좋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음악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곡의 제목은 'Forgive'다. 진정성 있는 속죄와 반성이 있을 때, 비로소 겨우 용서를 구할 자격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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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달랐을 뿐, 잘못되진 않았어." 잡다하지만, 방대하지는 못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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