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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
by Lion Kid Dec 17. 2017

미쳤다가,  미쳤었다는 걸 깨닫는 일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미친 사랑의 열병,
끝난 사랑보다 더욱 아리는 것은 끝나가는 사랑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 어떤 감정이라고는 허되지 않는 한 사회가 있다. 이 사회에서 감정은 질병이다. 'Switched on Syndrome' 의 약자로서의 'SOS'는, 이 감정적 질병을 일컫는 용어다. 마치 암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들이 그러하듯, SOS에도 여러 단계가 있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환자는 치료 감호소로 끌려가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선진적'인 사회 시스템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토록이나 감정이 병리시되는 사회에 자살 사건이 발생한다.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시체 처리 과정을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 역시도 당연히 미동이 없다. 아니, 미동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 여자가 조금 이상하다. 손을 부르르 떠는 것이다. 남자는 이에 미심쩍음을 느끼고, 그녀를 주시한다. 그리고 계속된 응시와 관심 끝에, 그는 여자를 좋아하기 시작한다. 감정이 거세된 세상이기에,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무엇이라 부를지에 대해 무지했다. 하지만 남자는,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너에게 주고 싶다며,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감정이라고는 완전히 통제되고 증발된 사회에서, 그리고 그 어떤 감정이든 '질병'이자 심지어는 '범죄' 취급을 받기도 하는 사회에서, 사랑까지 나누는 이 둘은 그야말로 '미친' 사람들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말과 행동을, 두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 낸다. '미침'은, 사랑이라는 열병의 가장 명징하고도 가시적인 증상일 지도 모르겠다.

영화 <이퀄스>

   이는 드레이크 도리어스 감독의 영화 <이퀄스>에 묘사된 세상이다. 아주 감각적이고도 세련된 연출이 돋보이는 기법으로, 영화는 감정이 제거된 미래 사회와 그토록이나 척박하고 황량한 풍토에서도 자라는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해냈다. 사랑 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 자체를 병적으로 취급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그 안에서 싹트는 사랑이 훨씬 더 절절한 은유로 다가올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기꺼이 미치고 마는 남녀의 모습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학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재된 본능임을, 그리고 한 사람의 삶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그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제정신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내었을 그들의 행동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조차 모' 감정 하나 때문에 과감하게 이루어 진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미쳐버림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어마어마한 충동과 열정 그리고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한 꺼풀이 벗겨지고, 감정이 이성의 제어 밖에 놓인 채로 불덩이처럼 가슴 속에 굴러다니는,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미쳐버리는 일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눈 앞에 펼쳐진다.


    살면서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만큼이나 어마어마했던 각성과 전율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감정을 분리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연애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그렇기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경험이 전혀 낯설지 만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마음 안을 무작정 굴러다니는 녀석의 정체를 모르겠어서, 처음 느껴보는 이름 모를 감정에 한참을 고민했다. 다행히도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었던 덕분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나의 느낌을 겨우 명명할 수 있었다. 나 역시도 <이퀄스>에서 묘사된 사회와 비슷한 곳에 살고 있었다면,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꽤나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속절 없이 '사랑'의 감정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퀄스>에 나와있듯, 사랑은 그렇게나 뜨겁고, 강렬하고, 대단한 무언가니까. 그러니 내가 사는 세상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거나 병리시 되었더라도, 나는 아마도 마음 안의 감정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또 애써 무시하다가도, 결국에는 다시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삶의 한 페이지가 열렸음을 인정했을 테고, 그리고 그 충동과 욕망으로 때로는 스스로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 할 행동들을 감히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될 것임을 무기력하지만 동시에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미쳐버리고, 미쳐버릴 것만 같이 어지럽고 아득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아니 엄밀히 이야기하면, 사랑의 시작이자 도입부다.


   <이퀄스>에 묘사된 세계보다 우리의 세상이 훨씬 더 괜찮은 건, 사랑의 뜨거움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고 찬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감정에 죄의식이나 의구심을 가지지 않아도, 또한 자신을 병자로 여기지 않아도, 마음 속에서 폭발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하고, 이를 충분히 견뎌내고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그 전율에 진심으로 탄복할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한 축복이다. 우리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도 이 아찔한 각성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작의 축복을 마냥 축하할 수는 없게 만드는 참 안타까운 게 하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사랑이 꺼져가는 슬픔 역시도 느껴야 한다는 씁쓸함이다. 이건 <이퀄스> 안의 세상보다도 더 불행하게 보인다. 그렇게나 뜨거웠고, 열정적이었고, 또 감당이 안 될 만큼 행복했던 감정이 차갑게 식어버려서, 온전히 미쳤있었던 날들이, 그러니까 말하자면 미쳐있는 줄도 몰랐던 그날들이, 실은 미쳤던 순간들이었음을 깨달아버리는 일은 너무도 비극적이다. 사랑에 빠졌다는 자각이 매 번 쉬운 건 아니지만, 그토록이나 특별했던 사랑이 이제는 식어버린 사랑임을 각성해버리는 순간만큼 슬프고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스 감독이 <이퀄스>에서는 사랑의 본능성과 그 뜨거운 아름다움을 그려내었다면, 그 전작 <라이크 크레이지>에서는 사랑이 식어버리는, 혹은 그 감정이 죽어버리는 모습을 아주 현실적으로 연출해냈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감독에게 있어 사랑은, 감정 자체가 질병이자 범죄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마저도 모든 금기를 초월할 정도로 뜨겁고도 원초적인 무언가였던 듯하다. 세계를 극단으로 설정함으로써, 그는 사랑의 힘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도리어스 감독의 가장 최신작인 <뉴니스>에는, 데이팅 앱과 다자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그려져있다. <뉴니스>를 <이퀄스>와 대비해서 관람하면, 감독은 마치 사랑의 사고실험가가 되어 양 극단의 상황을 설정해놓은 채로 이 감정을 여러 각도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아마, 감독이 사랑의 사고실험가가 된 연유에는, <라이크 크레이지>에서 앓았던 '미친 사랑의 열병'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현실적인 연애 스토리'라는 평을 참 많이 듣는 영화다. <라이크 크레이지>의 현실성은 <이퀄스>와 대비했을 때 더욱 명징하다. 이는 단순히 <이퀄스>가 SF영화고, <라이크 크레이지>가 그렇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현실성'은 <라이크 크레이지>에 묘사된, 연애와 사랑의 보편적 생애다. <이퀄스>가 SF의 힘을 빌려 사랑의 힘을 예찬했다면, <라이크 크레이지>는 있는 그대로의 사랑과 현실을 담담하면서도 아프게 그려내었다. 동거, 장거리 연애, 이별, 그리움, 그리고 재회에 대한 어리석은 간절함과 실망, 거기에 따라오는 체념과 좌절까지,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에는 한 사랑이 피어나서 지기까지의 현실이 섬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이퀄스>에서는 사랑 자체의 아름다움과 열망을 '감정이 소거된 세계'의 모습과 대비시켰다면, <라이크 크레이지>는 오히려 연애의 생애가 남기는 발걸음을 충실하고도 성실히 따라 걷는 수행기 또는 '사랑의 관찰 일기'에 가깝다.


   <라이크 크레이지>의 주인공 애나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 유학생이다. 그녀는 미국인 제이콥과 같은 수업을 들었고, 서로 스파크를 주고 받던 이들은 사랑에 빠졌다. 수많은 밤을 함께하고, 또 다정한 말들을 속삭이며, 그들은 어느 연인들처럼 아주 달콤하고도 행복한 순간을 한껏 만끽한다. 두 사람이 각자의 옷과 자세만 약간씩 바뀐 채 '오랜 날 오랜 밤' 동안 한 침대에서 부둥켜안고 있던 장면들이 연속사진처럼 상영되던 장면은, 이 영화의에서 가장 감각적으로 와닿았던 인상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미친 사랑의 열병을 함께 나누던 그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영국인 애나의 비자 만료 시한이었다. 곧 있으면 비자가 만료될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둘은 잠시 동안 헤어져있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갓 사랑을 시작한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이들도 사랑의 불꽃 앞에서는 없이 미약한 존재들이었다. 기어코, 그들은 '미친' 짓을 저지르고야 만다. 주인공 애나가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때의 만료된 비자가 그들에게 부메랑이 될 거라곤, 사랑의 도입기에서 한껏 미쳐있던 그들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현실적' 이유 때문에, 애나는 추후 미국으로의 재입국을 거부당하고 만다. 현실의 벽 앞에 선 두 사람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다. 각자 중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또 그리움과 외로움에 서로를 미친듯 헤매다가, 마침내 비자 문제가 해결되자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다시금 피어오를 거라는 환상과 희망을 가진 채 재회한다. 하지만 애나와 제이콥 사이를 지배하는 공기는 '예전같지 않음'이다.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었다. 비자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게 괜찮을 줄 알았던 그들이었지만, 사랑의 현실과 민낯은 비자의 그것보다 더욱 냉랭했다.

함께 샤워하는 애나와 제이콥. 둘의 사랑은 예전같지 않다.

   사랑 때문에 불법 체류까지 감행했던 두 사람들이었다. 사랑 하나면 다 될 줄 알았던, 철없고도 미쳐있던 연인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의 사랑도, 별 수 없이 식어버렸다. <이퀄스>와 <라이크 크레이지> 두 영화 모두 현실적인 여건이 문제였다. 전자의 것은 감정을 부인하고 억누르도록 강요했고, 후자의 문제는 두 사람의 자유로운 만남과 교류를 방해했다. 두 영화에서의 연인들 모두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고대한다. 그래서 <이퀄스>의 두 사람은 다른 세상으로의 탈출을 꿈꾸고, <라이크 크레이지>의 연인들은 영국에서 결혼까지 하며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라이크 크레이지>에서는 그토록이나 애썼던 비자 문제가 어느 날 해결되고, 그래서 더 이상 이 두 사람을 방해하는 현실적 문제가 사라졌음에도, 한 번 식은 사랑은 다시 피어나지 못했으며, 되려 원인 모를 어색함 만을 낳았다. 영화 말미에 두 사람의 샤워 및 목욕 장면은 이를 응축해낸 순간이었다. 적확히 말하자면, '원인 모를 어색함'이 정말로 '원인 모를' 것은 아니었을 테다. 그렇게나 뜨거웠던 미친 사랑의 열병이었지만 이 마저도 식어버렸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까. 다만, 이를 삼켜내기가 너무 따갑고 아파서, 쉽게 인정할 수는 없었을 테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데 벌 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듯, 그래서 애나가 불법 체류자가 되는 것에도 그 이유 없던 사랑만이 유일한 이유였듯, 두 사람의 사랑이 이전 같지 않아진 것에도 결정적인 계기 같은 건 없었다. 사랑이 타오를 때처럼, 이 사랑은 그냥 식어버렸다. '그냥' 식어버릴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사랑이 내포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이지 않을까.


   라이크 크레이지(Like Crazy)라는 제목처럼, 어쩌면 사랑이란, '미쳤다가, 미쳤었다는 걸 깨닫기까지의 과'일 지도 모른다. 미친 듯 보일 정도로 뜨겁고 열렬하게 사랑에 임했던 두 사람의 감정이 식어 버리는 과정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또 담담히 찾아 왔다. 세상 어느 환각제보다도 더욱 달콤하고 행복했던 사랑의 열병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잠시 멈추었던 이성이 다시금 감정을 앞서며 사랑에 빠졌던 스스로의 지난 모습이 객관화 되는 일이, 사랑의 시작에서 권태기, 혹은 이별까지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약속들을 함께 맹세했던 그 사람의 마음이 저무는 것도 참 슬픈 일이지만, 스스로의 사랑이 식어버리거나 끝나버리는 일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아픈 일이다. 평생 모르고 살던 행복과 설렘을 사랑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이 축복같은 시간과 감정이 사라지고,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공허함은 그저 허탈하기만 하다. 미쳤던 날들이, 미쳤었던 날들이었음을 깨달아버리는 아픈 순간이, 어쩌면 지독히도 비인간적인 <이퀄스> 안의 세상을 미약하게나마 동경하는 때가 아닐까 싶다. 그딴 기쁨이나 축복 따위는 필요 없으니, 아예 모든 감정 자체를 느끼지 않게 되어 이런 허무함이나 아픔도 마주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겠다면서 말이다.

식은 사랑은 더 이상 예전 같지 못하다.

   끝난 사랑보다 더욱 아리는 것은 끝나가는 사랑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더욱 지속되기를, 그것도 이전처럼 타오르기를 바란다면, 소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쓰라림은 훨씬 더 크다. 차라리 이별을 결심하면, 그래서 이 사랑의 마지막까지도 비장하게 각오한다면, 사랑의 냉각을 비교적 더 작은 파동으로 겪을 수 있다. 하지만 <라이크 크레이지>에서처럼, 식은 사랑임에도 이전과 같은 뜨거움과 타오름을 기대한다면, 그래서 이미 구겨져버린 종이를 어떻게든 다시 깨끗하게 펼치려 애를 쓴다면, 그건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니 사랑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여행은 더욱 쓰라 테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이 여행에 관한 기행문이었다. 사랑이 식는 일은, 이것 역시도 아마 진화의 결과였으리라. 지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는 일이나 혹은 꺼져가는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애를 쓰는 일이,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그래서 그 마음이 그대로라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누릴 수 없기에,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진화 시스템이 숱한 마음고생과 상처 끝에 선사한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만남에는 당연히 끝이 있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함에 있어 지난 사랑이 더 이상 발목을 잡으면 안 되니, 이를 위해서라도 지난 사랑은 차디차게 식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사랑의 방식은 진화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식은 사랑인 걸 뻔히 알면서도 미련한 기대를 계속 품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언젠가 영화 <연애의 온도>를 밤늦게 다시 본 적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꼬옥 움켜쥐었다. 사랑이 죽어간다, 라는 표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사랑의 임종을 지켜보는 듯했다. 내 사랑도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의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존 인물들의 사랑도 아닌 고작 영화에서의 사랑이 서서히 지는 것 뿐이었는데, 모든 죽음이 그러하듯 이들 사랑의 죽음 역시도 참 괴로웠다. <라이크 크레이지>에서도 <연애의 온도>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을 받았다. 꺼져가는 사랑에 있는 힘껏 인공호흡을 해대던, 그러나 이내 사랑의 맥박이 멈추었음을 감지하고야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이, 그리고 적나라하게 영화에 담겨 있었다. 참 힘겨운 사랑이었는데, 그것마저도 결국은 식어버렸다. 소생의 가망이 별로 없는 사랑이었음을 그들 자신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을텐데, 이를 뻔히 알면서도 부질없는 희망을 가지고 마침내 사랑의 바닥이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드러내기 전까지 모르는 척하며 사랑을 긍정해내는 일은, 관객의 입장에서도 참 보고 있기 힘겹고 잔인한 일이었다.

미친 사랑의 열병에서, 식은 사랑의 비가로

    특히 <라이크 크레이지>를 보며, 나는 '사랑의 임종'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냥' 시작되어 '미칠 정도로'까지 타올랐던 이들의 사랑은, 말 그대로 '그냥' 식어버렸다. 둘 중 누구 하나가 불치병에 걸리거나 이와 등가의 대단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아닌, 조금은 빡센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너무도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연애인데, 이런 보통의 연애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식어버렸다. 세상에. 사랑이 '그냥' 그렇게 식어버리다니.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대부분 일어나는 이별의 맨얼굴이다. 현실의 밋낯인 것이다. 사랑을 한 생명에 비유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그리 이질적인 일은 아니다. 유약했던 초창기를 거치고, 찬란했던 한 때를 지나, 별다를 것 없는 권태로운 날들을 보내다 이내 저물고 마는 삶 자체가 연애 혹은 사랑의 생애주기와 퍽 닮았기 때문이다. 이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지난 사랑에 있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헤어짐 그 자체보다도, 영원이라고 믿었던 이 사랑이 끝날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라는 점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사람들이 생로병사의 엄중한 원칙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이 운명은 당장 오늘 태어난 갓난아이한테도 예외가 아니듯, 대부분의 연애 역시도 이별로 그 마지막을 맞이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누구도 갓난아이의 우렁찬 울음과 천진한 미소에서 '죽음'을 떠올리지 않듯, 사랑이 물씬 피어나는 연애의 최고점에서 언젠가 닥쳐올 '이별'을 상기해내는 연인들도 드물다. 삶이든 사랑이든 모두 유한한 건 마찬가지인데, 마치 영원한 시간이 주어진 듯한 착각에 종종 빠져버리곤 한다는 것도 둘 사이의 공통점이다. 이 사랑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 연애 역시도 실은 별다를 것이 없다는 새삼스런 사실을 느낄 때부터 더욱 강하게 든다. 노력할수록, 그리고 손을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연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으로만 치닫는다. 그러고 보면 별별 치료법과 눈물의 기도로도 임종 직전의 사람에 새 생명을 부여할 수는 없는 무거운 무기력함과 참 닮았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아프고 지쳤듯,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에서 사랑에 미쳐있던 연인들의 사랑의 온도 역시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그 지나온 길들과,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사랑의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저 가슴 저밋했다. 누구보다도 시끌벅적하고 찬란하게 사랑하던 이들의 사랑이 저무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고, 사랑은 저리도 차갑게 식어버릴 수 있었다. 그저 흔해빠진 평범한 연애였을 뿐인데, 그 현실이 그렇게 불편하고 아팠다. 못내 외면하고 싶었던, 보편적 사랑의 보편적 과정이었고, 그 보편적 결말도 눈에 보여 마음이 아릿했다.


   <이퀄스>의 세상을 미래 사회로 그려이유에는, 이런 공허함과 허탈함마저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수동적인 방어체계의 발로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사람들조차 사랑을 느꼈고 이 감정을 나누었다. 어쨌든 이 미친 감정은 감당이 안 될 만큼 뜨거우며, 그렇기에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상대방에게 주고픈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따라서 사랑이란 아무리 거부하고 부정해도 우리가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는 게 <이퀄스>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그러니, 다만 바랄 수밖에. 이번 사랑만은 다르기를. 이번 사랑만은, 미래에 귀속되는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도, 부디 이 순간의 내가 미쳤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 하기를. 그렇게 이번 사랑만은 스스로를 영원히 속일 수 있기를. 아주 어렵고, 또 번번히 좌절된 기대지만, 새로운 사랑을 할 때마다 늘 새로운 기도를 마음에 품게 된다. 미쳤었던 지난 날들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힘들기에, 그렇게 찾아오는 사랑의 찬바람이 너무도 차갑기에, 이번 만은 다르기를, 나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그저 바라는 것이다. 아주 어려운 일인걸 알면서도, 무력하게 소원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도 마땅히 없다.

미쳤다가, 미쳤다는 걸 깨달았다가, 그래도 다시금 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사랑에 대해 이렇게까지 체념적인 자세일 필요는 또 없다는 생각이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분명 사랑의 현실을 씁쓸히 묘사해낸 영화다. 하지만 제이콥이 애나에게 선물한 의자에 각인된 'Like Crazy'라는 문구처럼,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했던 시절은 한 사람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든 중요한 표식을 남길 테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게 그 자체로서 마냥 아프기만 한 건 아닐테니, 보다 더욱 중요한 건 그 사랑이 어떻게 기억되는가 아닐까. 모든 인생이 생로병사의 엄중한 원칙 위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하루하루마저도 전부 무의미하거나 무채색일 필요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안에서도 찬란한 빛으로 채색될 건 분명히 있을 테니. <이퀄스>에서처럼 감정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사회에서도 균열이 발생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축복이 엄청나며 이 열정을 억누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사랑에 관하여 마냥 무기력할 필요는 없다. 사랑이 우릴 미치게 한다면, 기꺼이 사랑에 미쳐 그 뜨거움과 아름다움을 한껏 음미해야지, 어떡하겠나. 이 사랑의 영원성을 기도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의 달콤함과 황홀함에 '미친 듯이' 취해도 보고, 또 가끔은 그 사랑 때문에 '미친 짓'도 감행해 보면, 그러면 또 어떠랴. '그리고, 그래서, 그래도, 그럼에도, 그렇기에, 그런데, 그러나' 너를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또 '진심으로 미친듯이' 너를 사랑한다고, 미친듯한 진심과 사랑을 애써 감추지 않으면서 말이다.


     '미침'은, 사랑이란 색채를 빛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도료들 중 하나니까. 그러니 이렇게 마무리짓고 싶다. '미쳤다가, 미쳤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게 사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사랑이란, '미쳤다가, 미쳤었다는 걸 깨달았다가, 그래도 다시금 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For Anton"

     <라이크 크레이지>부터 <이퀄스> 그리고 최근의 <뉴니스>까지, 도리어스  감독의 영화 음악들은 모두 정말 좋다. 특히 <이퀄스>와 <뉴니스>는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이 돋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즐겨듣는 음악은 <라이크 크레이지>의 OST들이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이 영화 OST를 트랙 순서대로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적도 많았다. 그러니 <라이크 크레이지>를 다루면서는, 이 영화의 음악이 참 좋다는 사실 역시 어떻게든 꼭 언급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꼭, '안톤 옐친'이란 배우의 이름과 함께. <뉴니스>의 맨 마지막 장면에는, 검은 화면에 "For Anton"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라이크 크레이지>의 남자주인공이었자 유망한 배우였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한 안톤 옐친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 문구를 보고,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마음이 다소 시큰해짐을 느꼈다. <라이크 크레이지>와 <이퀄스>, 그리고 <뉴니스>를 도리어스 감독이 연출해낸 사랑의 트릴로지로 보면, <라이크 크레이지>는 이들의 시작과도 같았고, 이 영화가 있었기에 도리어스 감독과 그의 이 작품들에 관심을 갖고 관람할 수 있었다.


    지난 몇 개월동안 혼자 여행을 하며, 나는 하루에 하나씩 음악을 선곡하고 그렇게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며 그날들의 소란했던 일과를 음악과 함께 기억하곤 했다. 아주 먼 곳으로의 여행을 떠난 안톤 옐친을 추모하며, <라이크 크레이지>의 OST였던 'Twin Stars'를 이 글의 플레이리스트로 선곡했다. 세상 수많은 영화들 중 <라이크 크레이지>는 내게 있어 유난히 반짝이는 별 같은 작품이었고, 그는 이 작품에서 더없이 빛나는 주인공이었다.


    글은, 기존 <시각의 지평선> 매거진에 발행했던 '미쳤다가, 미쳤었다는 걸 깨닫는 일', 그리고 '사랑의 임종' 두 글을 재구성 및 편집 후 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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