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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
by Lion Kid Dec 31. 2017

꿈 꾸지 않는 현실이,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

영화 <라라랜드>

꿈 꾸지 않는 현실로부터, 꿈을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
그때의 자신에게, 서로에게, 사랑에게, 뜨거움에, 불안함에, 그리고 치열함에,
모두들, 안녕.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돌아만 간다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슬픈 확신과 명징한 괴리를 이루며 종종 사람을 힘들게 한다. 기적처럼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때처럼 그렇게 화내지는 말아야지, 그런 식으로 아프게 말하지는 않아야지, 조금은 더 참아야지, 이런 부질없는 다짐들을 뱉어내지만, 그런다고 만약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님을 이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후회란 필연이자 숙명이다. 몇몇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인 절대 법칙들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딱 떨어지는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야구 경기에서의 투수 교체 타이밍과 비슷하다. 결국은 결과론적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언제나 뒤늦게 상상할 뿐이다. 혹시 그때 그랬더라면, 혹은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어땠을까.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에필로그는 이 서글픈 상상을 더없이 황홀한 뮤지컬 넘버로 승화했던 장면이었다. 보통의 뮤지컬들은 문학 원작을 각색하는 경우가 많고, 이 과정에서 줄거리 자체는 간소화되며 인물과 사건은 입체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전형적인 모습으로 기운다. <라라랜드>는 뮤지컬 영화의 장르적 보편성을 충실히 따라가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의외의 골목으로 극의 핸들을 틀어버렸고, 얼마간의 멍함과 당혹감 이후에 찾아오는 슬픔과 안타까움은 더욱 절절했다.


    찬란한 상상과 씁쓸한 현실의 극적인 대비 때문인지, 이 영화를 떠올리면 먹먹한 감정만이 우선 생각나곤 했다. 그 만큼이나 강렬했던 마무리였다. 누구나 한 번 쯤은 품어봤을 만한 '만약에 그랬더라면', 으로 시작하는 물음을 그리도 유려하게 표현해낸 영민함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작년 초 케이블 장르물로는 이례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시그널>이라는 드라마의 본질 역시도, '만약'이라는 질문과 소망이 사회적 차원의 상상으로까지 확장된 데 있었다. 영화의 말미까지만 해도 <라라랜드>를 그저 따뜻하고도 연말 분위기가 잔뜩 묻어나는 괜찮은 음악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다가,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서글픈 결말에 이윽고 꽤 놀랐고, 그렇게 다시 영화 전체를 곱씹다 보니 그 아름답고도 쓸쓸한 마지막을 위해 이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전개되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City of Stars'라는 노래도 참 좋았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에필로그의 감흥만은 못했고, 따라서 <라라랜드>에 수록된 OST들의 음원을 들을 수 있게 되자 나는 오직 'Epilogue'만을 반복하여 들었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에서 시작하여 클래식과 재즈 등의 다양한 장르들을 넘나들다 마침내 다시 조용한 피아노 독백으로 마무리 되는 이 곡은 7분이 넘는 어마어마한 러닝타임에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꿈 꾸는 사람들을 위한 응원가, Audition

    영화 <라라랜드>는 꿈과 사랑에 관한 신파적 음악 드라마다. 가난하고 기약없는 두 남녀 예술가가 서로의 꿈을 좇는 과정과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이 이 영화에 그려졌다. 신파라고 하여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억지 구성과 클리셰들로 신파를 전혀 개연성 없는 최루탄으로 만들어버리는 악의적 연출과 편집에 있다. 그런 점에서 <라라랜드> 역시도 잘 연출된 재미있는 신파 영화였다. 어차피 대부분의 영화들도 큰 골자에서는 '신파'의 척추를 따른다. 주요 뼈대 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것을 함께 지탱하는 관절이나 혈관이다. <라라랜드>에서는 '음악'이 그 역할을 한다. 걸작 <위플래쉬>를 잉태했던 제작진들 답게, <라라랜드> 역시 시종일관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지난 번 영화에서는 드럼을 때려 부서버릴 듯한 청각적 쾌감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다양한 색감들과 동화적 연출로 시각적 효과 역시도 극대화했다.


    평소처럼 전체 노래들을 임의 재생으로 듣다가, <라라랜드>의 주제가들 중 하나였던 'Audition (The Fools who Dream)'이라는 트랙이 플레이 됐고, 순간 어딘가가 탁, 막히는 듯 한 먹먹함이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당시는 영국에서 여행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고작 열흘 정도 지냈다고 영어에 귀가 트였을 리 없으니, 이건 엠마 스톤이 노래하는 와중에도 정말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을 잘 해 준 덕분인데, 어쨌든 곡의 가사가 아플 정도로 와닿았다. 엠마 스톤이 역할을 맡은 주인공 미아는, 그토록 추운 파리 센 강에 맨발로 뛰어든 본인 이모의 이야기를 건네며, 그녀가 그 이후 한 달을 감기로 고생했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뛰어내릴 것을 말했다고 노래했다. 그렇게 시작된 노래는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복돋아 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다. 바보같고, 미친 것 같아 보여도, 때로는 그런 무모함이 세상을 다채롭게 만들 열쇠일 지도 모른다고도 미아는 덧붙였다. 나를 울컥하게 한 건, 그녀를 그토록 고생스럽게 했던 센 강으로의 투신을 기꺼이 한 번 더 반복하겠다는 미아 이모의 발언이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마음은 정말로 쉽게 가지기 힘든 것이다. 멀찍이만 보였던 순간들의 인과관계를 한참 지난 후에야 미약하게 파악해내며, 그 당시에 그저 바보 같았던 스스로의 모습을 지금에서야 조금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다시 반복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는 그녀 이모의 마음이 부럽기도 하고, 또 내게는 그럴 만한 순간이 마땅히 없다는 게 조금은 울적하여, 노래를 들으며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Audition' 넘버의 부제는 '꿈을 꾸는 바보들(The Fools who Dream)'이다. 이 문구를 보자 근 2년간 음악 및 방송 생태계를 뒤흔들었던 101명의 소년 소녀들의 생존 경쟁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특히 시즌 1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걸그룹 지망생들이 일사분란하게 하늘로 손을 찌르며 '우리는 꿈을 꾸는 소녀들'이라고 외치던 광경은 정말로 다소 무섭기까지 했다. 아무리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데뷔를 위한 열망과 간절함까지 이런 식으로 소비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있었고, 사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우선 시각적으로도 무척이나 낯설고 압도적인 충격이었다. 꿈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빈번히, 또 사려 없이 사용되어 그 자체로 어떤 수준의 감동과 감흥을 건네기에는 다소 부족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비단 미디어만의 탓은 아니더라도, 생활의 관점에서도 꿈이라는 개념이 다소 경원시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밥벌이라는 현실에 근접할 수록 더욱 그렇다. 꿈은 무슨 꿈,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면 그걸로 족한 거지, 정도의 자족적 사고 방식이 오히려 지배적이다. 평소에도 진지하게 꿈이라는 개념을 고민해본 적은 마땅히 없었고, 현실이 닥쳐온다는 조급함이 커짐에 따라서는 아예 꿈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Audition'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내게는 엠마 스톤의 이모처럼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만한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어쩌면 센 강에 맨 발로 뛰어들 정도로 바보 같았고 미쳤던 무모함이 그 동안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찬란했던 시절에의 안녕

    그 누구도 꿈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라고 단정적이고도 정확히 정의내릴 수는 없겠으나, <라라랜드>라는 영화에 담담하게 제시된 하나의 관점에 따르자면, 그것은 아주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한 달을 감기로 고생하고도,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만한, '미쳤나 싶을 정도로 바보 같은 무모함을 껴안은' 강렬한 충동이자 간절함이다. 꿈의 요건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하고도 빡빡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꿈' 정도로까지 불릴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싶기도 하다. 나는 그 동안 <라라랜드>를 신파적 구성의 잘 만든 뮤지컬 멜로 영화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참신한 장르와 그에 걸맞은 비범한 전개로, 후반부의 서글픔을 폭발시킨 영민한 작품이라는 게 이 영화를 떠올릴 때의 주된 감정이었다. 하지만 'Audition'이라는 넘버를 한참 듣다 보니, 이 영화를 언급하는 데 있어 '꿈'이라는 단어가 빠져서는 안 되겠단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도 무모하게 꿈을 좇으며, 아플 정도로 빈약한 가능성에 괴로워하고 손톱만큼의 작은 희망에도 크게 기뻐하던 바보같은 시절을 공유한 동반자였다.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은, 이제는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두 사람에게, 그들이 미치도록 또 마음껏 꿈꿨던 시간의 상징일 것이다.


     <라라랜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영화 말미에 두 주인공이 한낮의 언덕에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었다. 말했다시피 나의 영어 실력이 좋아서는 절대 아니고, 그저 두 주인공이 천천히, 또박또박, 반복하여 발음해 준 덕분에 이 장면 만큼은 자막 없이도 영어 대사를 얼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기억에 의하면, 남자는 'When'을, 여자는 'If'를 반복했다. 이 나라의 영어 문법 교육에서는 저 두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모두 시간과 조건의 부사절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명명하지만, 'When'과 'If'는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확신을 함축하지만, 후자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다가올 미래를 'When'이라 생각했든 'If'라고 여겼든, 그 자리에 그시간에 두 사람은 서로를 평생 사랑할 거란 맹세를 나누었다. 그래서 곧바로 닥쳐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더욱 아릿하게 다가왔다. 'If'는 참 슬픈 단어다. 'If'의 이면에는 항상 'If not'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동화와 마법같은 분위기로 연출된 영화의 줄거리는 뜻하지 않게 'If not'으로 흘렀다. 관객들에게 여운을 주고 싶었거나, '자,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라고 말하고 싶었거나, 혹은 이게 당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거나, 어쨌든 영화는 끝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못한 두 사람을 그려냈다.


    기약없고 불안한 미래를 꼭 붙잡고 함께 견뎌내던 영화 속 두 젊은 연인도, 결국 안타깝게도 해피 엔딩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 까지 함께 있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으로의 해피 엔딩이라 한다면, 분명 <라라랜드> 속 두 주인공의 결말은 해피 엔딩은 아니다. <라라랜드>에는 아름다운 화면과 노래들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그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되려 울컥했다. 바로 전까지 평생 사랑할 거라 얘기했던 두 주인공이, 영화의 표현만큼이나 찬란하고 환상적으로 사랑했던 그들이, 결국 5년 후에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먹먹한 재회를 맞이하는 건 꽤나 유효한 슬픔을 야기했다. 두 사람의 아름답고 마법같던 사랑을 표현하던 음악과 영상이, 이제는 '혹시라도 달랐더라면'이라는 'If'와 '만약에 헤어지지 않았더라면'이라는 'If not'을 그려내는데 동원되었다. 지난 찬란함과 현실이 대비되며, 돌이킬 수 없는 날들에 대해 만약이란 녀석이 자아낸 슬픔으로 인하여, 울컥함과 먹먹함은 배가 되었다. 사랑했던 날들보다도 찬란했던 영화 말미의 상상 장면은, 한 편으로는 서로가 꿈을 꾸며 함께 존재했던 그 시절에 현실이 바치는 서글픈 헌사이자 송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차가운 강물에 겁 없이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던 무모함과 바보같음을 함께 나누었던 서로와 그 시절에 띄우는 절절하고도 애틋한 작별 인사였다.


    이제는 꿈 꾸지 않는 현실로부터, 꿈을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 그때의 자신에게, 서로에게, 사랑에게, 뜨거움에, 불안함에, 그리고 치열함에, 모두들, 안녕. <라라랜드>가 남긴 먹먹함은, 두 주인공이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에서만 기인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꿈 꾸지 않는 현실이,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

    작년 이맘 때, <라라랜드>를 처음 관람하고 나서 '동화같던 그 날들을, 그리워하려고 해'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했었다. 그날은 밴드 넬의 새 싱글 '그리워하려고 해'가 발매된 날이었고, 지금 이 글을 작성하면서도 오랜만에 '그리워하려고 해'를 듣고 있다. 의도치 않게,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라라랜드>에 관한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꿈 꾸지 않는 현실이,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라는 이 글의 제목을 곱씹어보며 나의 지난 1년을 되돌아봤다. 아직까지 '감기로 한 달을 고생하더라도 센 강에 다시 뛰어들' 만 한 선택지들은 없지만, 그래도 올 한해에는,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정도의 결정들까지는 없지 않았다. 매사에 불만과 투정이 참 많은 나인데, 언젠가는 이 날들을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이라며 그리워하고, 또 가끔은 부러 '그리워하려고 할' 것을 생각하니 괜히 서글프고 동시에 조금은 감사하다. <라라랜드>가 '꿈 꾸지 않는 현실이,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 보낸 송가였고 헌사였다면, 반대로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이 '꿈 꾸지 않을 현실'에게 지금의 찬란함과 온기를 미리 조금이라도 보내놓을 수는 없을까, 라는 상상도 잠시 해보았다. 미래에도 지금의 찬란함과 온기를 전달해줄 수 있는 매개체는 '추억'이다. '기억'과 '추억'의 이름이 서로 다른 건, '추억'이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유난한 기억을 만들고 그 유난함을 자꾸 되새겨야 '추억'이라는 특별함이 겨우 생성되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좋은 헤어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은 헤어짐은 아마 존재할 테고, 한 사람과의 관계가 마무리되었다고 그 사람과 보냈던 모든 시간이 무의미하거나 나쁘게 기억될 필요는 없다. <라라랜드>가 해피 엔딩은 못 돼도 역시 새드 엔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쨌든 그들 삶에서 서로가 함께했던 시간은 빛나고 찬란했던, 그리고 더없이 따뜻했던 날들이었을 테니. 세바스찬의 재즈바 이름은, 그의 전 연인 미아가 지어준 'Seb's'였다. 이곳에서 '한 곡 더 들을까?'라는 남편의 질문에, 미아는 '괜찮다'라고 답하고 가게를 나온다. 그러나 한 곡으로도 충분히, 그녀는 세바스찬과의 'If' 혹은 'If not'을 떠올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시간이 그저 나쁘게만 받아들여졌다면, 세바스찬이 자신의 재즈바 이름을 그렇게 짓지도 않았을 것이고, 미아 역시 굳이 그의 음악을 들으며 'If'나 'If not'을 상상하지 않았을 테다. 잘 몰랐고 그래서 무모했던 청춘의 연인들이, 서투르면서도 치열하게 사랑하며 꿈을 그리던 날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이 되어 두 사람의 삶에 아릿한 차란함으로 수놓아졌다.

그런 순간이 있었음을

    올 해 열렸던 밴드 넬의 클럽 공연에서 보컬 김종완은, "어렸을 때는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없어, 황당하고 무모하다', 이런 얘기들이 되게 듣기 싫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모함이나 이런 것들이 그때만 가질 수 있는 멋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많은 걸 알아갈수록 걱정도 많아지고 두려움도 많아지는 것 같은데, 요즘에는 '무모한 것 같아' 이러면 칭찬으로 들려요."라는 멘트를 한 적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곡 '청춘연가'는 '그땐 잘 몰랐고, 그래서 무모했고, 또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것 같아'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넬의 '청춘연가'는 <라라랜드> 속 'Audition'의 답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모하고, 또 잘 모르던 시절에 꾸던 꿈이, 먼 미래에는 그리워지고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그러니 '차가운 센 강에 뛰어들 정도'로의 '무모함'과 '잘 모름'을 애써가며 마음 안에서 지워낼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Audition'의 화자에게 긍정의 답을 보내는 듯한 느낌이다.


   하필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쓴 글이, <라라랜드>로 시작해 밴드 '넬'로 끝나버리는 다소 두서없는 모양새가 되고아 말았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라라랜드>가 음악 영화고, 거기에 이 글은 <라라랜드>의 OST들 중 하나였던 'Audition'을 듣고 쓴 글이며, 그러니 음악 이야기를 해야 했고, 내게 '음악'이라 하면 또 '넬'을 빼놓을 수 없었다는, 다소 구차한 변명을 사족처럼 적어본다. 작년 말부터 올 해 중반까지 꽤 오랜시간 여기저기를 여행했었는데, 여행기마다 하나씩의 음악을 선곡하여 그날의 기억을 나름의 방식으로 남겨두었다. 한 해라는 1년의 여정을 마치게 된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로는, 넬의 '청춘연가'를 선곡했다. '잘 몰랐고, 그래서 무모했고, 또 그래서 꿈 꿀 수 있었던' 지금의 청춘과 현실은, 언젠가의 머지 않은 미래에는 '그랬던, 그리고 그럴 수 있던 지난 날'이 될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 올 '꿈 꾸지 않는 현실'을 살아내면서,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에 응당 누렸어야 할 '잘 몰랐음'과 '무모함'이 부족했고 미약했다며 후회하고 아쉬워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기를, 이렇게 또 다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른 한 해를 맞으며 소망하는 바다.


    "그땐 잘 몰랐고 그래서 무모했고 또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것 같아
     상처를 주고 받고 하는 게 사람이고 굳이 그걸 겁내진 않았던 것 같아

     뭔가 좀 낯설고 익숙하진 않아도 또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것 같아

     부서질 정도로 힘껏 부딪혀 보고 그런 걸 겁내진 않았던 것 같아

     시간은 날 어른이 되게 했지만 강해지겐 하지는 않은 것 같아

     시간은 날 어른이 되게 했지만 그 만큼 더 바보로 만든 것 같아" (넬, '청춘연가' 중에서)


    한 해 동안 브런치에 여행기와 영화 후기들을 비롯한 이런저런 글들을 올리며, 많은 응원을 받았고 또 새로운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글들을 너그러이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 그런 영화같은 삶을 살고 있거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위클리 매거진 이름을 <어쩌면 우리도 영화처럼>이라고 거창하게 지었습니다. 총 12화의 글들 중 반환점을 넘어 쓰게 된 첫 글이자, 한 해의 마지막에 발행한 글이 영화 <라라랜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글이 발행된 날짜도 12월 31일이네요. 살아온 2017년 한 해의 무수한 시간들 중 어떤 날들은, 먼 미래에도 무척이나 그리워할 만한, 그러니 말하자면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은 불행하게 그러나 또 조금만 불행하게, 조금은 아프게 그러나 또 조금만 아프게, 그렇게 다음 한 해를 살아가고, 살아가려고 애쓰다, 가끔은 글도 쓰고, 또 가끔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기도 해보며, 그렇게 또 아주 가끔씩은 즐거운 날들을 보내보기도 하겠습니다. 무력하게, 하지만 아낌없이 치열하게,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행복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채로, 그러면서도 붙잡고 싶은 것들은 가능한 많이 붙잡으며, 그렇게 다가올 한 해를 견디고, 버티고, 즐기며, 살아가고, 또 살아가려고 애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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