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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지평선
by Lion Kid Jan 05. 2017

꿈 꾸지 않는 현실이,
꿈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

영화 <라라랜드>

현실이 바치는 서글픈 헌사이자 송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돌아만 간다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슬픈 확신과 명징한 괴리를 이루며 종종 사람을 힘들게 한다. 기적처럼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때처럼 그렇게 화내지는 말아야지, 그런 식으로 아프게 말하지는 않아야지, 조금은 더 참아야지, 이런 부질없는 다짐들을 뱉어내지만, 그런다고 만약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님을 이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후회란 필연이자 숙명이다. 어떤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인 절대 법칙들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딱 떨어지는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야구 경기에서의 투수 교체 타이밍과 비슷하다. 결국은 결과론적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언제나 뒤늦게 상상할 뿐이다. 혹시 그때 그랬더라면, 혹은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어땠을까.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에필로그는 이 서글픈 상상을 더없이 황홀한 뮤지컬 넘버로 승화했던 장면이었다. 보통의 뮤지컬들은 문학 원작을 각색하는 경우가 많고, 이 과정에서 줄거리 자체는 간소화되며 인물과 사건은 입체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전형적인 모습으로 기운다. <라라랜드>는 이런 장르적 보편성을 충실히 따라가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의외의 골목으로 극의 핸들을 틀어버렸고, 얼마간의 멍함과 당혹감 이후에 찾아오는 슬픔과 안타까움은 더욱 절절했다.


    찬란한 상상과 씁쓸한 현실의 극적인 대비 때문인지, 이 영화를 떠올리면 먹먹한 감정만이 우선 생각나곤 했다. 그 만큼이나 강렬했던 마무리였다. 누구나 한 번 쯤은 품어봤을 만한, 만약에 그랬더라면, 으로 시작하는 물음을 그리도 유려하게 표현해낸 영민함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작년 초 케이블 장르물로는 이례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시그널>이라는 드라마의 본질 역시도, '만약'이라는 질문과 소망이 사회적 차원의 상상으로까지 확장된 데 있었다. 영화의 말미까지만 해도 <라라랜드>를 그저 따뜻하고도 연말 분위기가 잔뜩 묻어나는 괜찮은 음악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다가,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서글픈 결말에 이윽고 꽤 놀랐고, 그렇게 다시 영화 전체를 곱씹다 보니 그 아름답고도 쓸쓸한 마지막을 위해 이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전개되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City of Stars'라는 노래도 참 좋았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에필로그의 감흥만은 못했고, 따라서 <라라랜드>에 수록된 OST들의 음원을 들을 수 있게 되자 나는 오직 'Epilogue'만을 반복하여 들었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에서 시작하여 클래식과 재즈 등의 다양한 장르들을 넘나들다 마침내 다시 조용한 피아노 독백으로 마무리 되는 이 곡은 7분이 넘는 어마어마한 러닝타임에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꿈 꾸는 사람들을 위한 응원가, Audition

    오늘도 평소처럼 전체 노래들을 임의 재생으로 듣다가 'Audition (The Fools who Dream)'이라는 트랙이 플레이 됐고, 순간 어딘가가 탁, 막히는 듯 한 먹먹함이 찾아왔다. 고작 영국에서 열 흘 정도 지냈다고 영어에 귀가 트였을 리 없으니, 이건 엠마 스톤이 노래하는 와중에도 정말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을 잘 해 준 덕분인데, 어쨌든 곡의 가사가 아플 정도로 굉장히 와닿았다. 엠마 스톤은 그토록 추운 파리 센 강에 맨발로 뛰어든 본인 이모의 이야기를 건네며, 그녀가 그 이후 한 달을 감기로 고생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또 다시 뛰어내릴 것을 말했다고 노래했다. 그렇게 시작된 음악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복돋아 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다. 바보같고, 미친 것 같아 보여도, 때로는 그런 무모함이 세상을 다채롭게 만들 열쇠일 지도 모른다고도 노래는 덧붙였다. 나를 울컥하게 한 건, 그토록 고생했던 센 강으로의 투신을 기꺼이 한 번 더 반복하겠다는 그녀 이모의 발언이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마음은 쉽게 가지기 정말로 힘들다. 한참이 지나서야 미약학게나마 파악된 순간들의 인과관계를 바라보며, 그 당시에 그저 바보 같았던 스스로의 모습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반복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는 엠마 스톤 이모의 마음이 부럽기도 하고, 또 그럴 만한 순간이 마땅히 없다는 게 조금은 울적하여, 노래를 들으며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Audition' 넘버의 부제는 '꿈을 꾸는 바보들(The Fools who Dream)'이다. 이 문구를 보자 딱 작년 이 맘 때 방영되기 시작했던 101명의 소녀들의 생존 경쟁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걸그룹 지망생들이 일사분란하게 하늘로 손을 찌르며 '우리는 꿈을 꾸는 소녀들'이라고 외치던 광경은 정말로 다소 무섭기까지 했다. 아무리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데뷔를 위한 열망과 간절함까지 이런 식으로 소비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있었고, 사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우선 시각적으로도 무척이나 낯설고 압도적인 충격이었다. 꿈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빈번히, 또 사려 없이 사용되어 그 자체로 감동과 감흥을 건네기에는 다소 부족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또 비단 미디어만의 탓은 아니더라도, 꿈이 생활의 관점에서는 다소 경원시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밥벌이라는 현실에 더욱 근접할 수록 더욱 그렇다. 꿈은 무슨 꿈,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면 그걸로 족한 거지, 따위의 사고 방식이 오히려 지배적이다. 평소에도 진지하게 꿈이라는 개념을 고민해본 적은 마땅히 없었고, 현실이 닥쳐온다는 조급함이 커짐에 따라서는 아예 꿈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Audition'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내게는 엠마 스톤의 이모처럼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만한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어쩌면 센 강에 맨 발로 뛰어들 정도로 바보 같았고 미쳤던 무모함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찬란했던 시절에의 안녕

    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누구도 정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겠으나, <라라랜드>라는 영화에 담담하게 제시된 하나의 관점에 따르자면, 그것은 아주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한 달을 감기로 고생하고도,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만한, 미쳤나 싶을 정도로 바보 같은 무모함을 껴안은 강렬한 충동이자 간절함이다. 꿈의 요건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하고도 빡빡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꿈' 정도로까지 불릴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싶기도 하다. 나는 그 동안 <라라랜드>를 신파적 구성의 잘 만든 뮤지컬 멜로 영화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참신한 장르와 그에 걸맞은 비범한 전개로, 후반부의 서글픔을 폭발시킨 영민한 작품이라는 게 그동안 이 영화를 떠올릴 때의 주된 감정이었다. 하지만 'Audition'이라는 넘버를 한참 듣다 보니, 이 영화를 언급하는 데 있어 '꿈'이라는 단어가 빠져서는 안 되겠단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도 무모하게 꿈을 좇으며, 아플 정도로 빈약한 가능성에 괴로워하고 손톱만큼 작은 희망에도 크게 기뻐하던 바보같은 시절을 공유한 동반자였다.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은, 이제는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두 사람에게, 그들이 미치도록 또 마음껏 꿈꿨던 시간의 상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굉장할 정도로 찬란했던 영화 말미의 상상 장면은, 한 편으로는 서로가 꿈을 꾸며 함께 존재했던 통째로의 그 시절에 현실이 바치는 서글픈 헌사이자 송가에 가까웠다. 차가운 강물에 겁 없이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던 무모함과 바보같음을 함께 나누었던 서로와 그 시절에 띄우는 절절하고도 애틋한 작별 인사였다. 이제는 꿈 꾸지 않는 현실로부터, 꿈을 꿀 수 있던 지난 날에게. 그때의 자신에게, 서로에게, 사랑에게, 뜨거움에, 그리고 치열함에, 모두들, 안녕. <라라랜드>가 남긴 먹먹함은, 두 주인공이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에서만 기인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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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하지만, 방대하지는 못 한 관심사. 경계에서 피어난 것들을 헤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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