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과 『아무튼, 디지몬』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을 읽었다. 유명한 작품이라 제목은 자주 봤지만, SF 장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내용은 전혀 몰랐다. 한데 이야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촘촘해서 마음에 들더라.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허투루 담지 않았으면서도, 서로 잘 엮이는 걸 보면서, 작가가 플롯을 짜는데 많은 공을 들였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한 형사물 시리즈의 작가는 1년의 집필 기간 중 8개월을 플롯에 쓰고, 4개월을 실제 글쓰기에 쓴다고 했다.)
『천 개의 파랑』은 주인공 중 한 명이 휴머노이드 콜리라는 것만 빼면 SF보다는 요즘 세상이 배경인,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경마장과 승부 조작과 돈을 우선하는 세태 같은 무대와 사연과 인물은 소설 속 배경이 로봇이 일상화된 시대라는 것만 제외하면, 2025년의 일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행복한 결말을 향해 가는 듯하던 줄거리에 살짝 반전이 있는 건 조금 슬펐지만, 그렇게 해서 이야기의 얼개가 더 단단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을 읽은 김에 작가가 쓴 아무튼 시리즈 에세이 『아무튼, 디지몬』을 이어서 읽었다. 때로는 글쓴이를 조금 더 알게 되면 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소설이 재밌어서 작가의 다른 글도 읽어 보고 싶었다.
『아무튼, 디지몬』에서 만난 건 혹시 디지털 세계로 가게 되지 않을지 꿈꾸며 데스크톱을 껴안고 자기까지 해 본 소녀였다. 그 마음이 한국을 대표하는 SF 소설로 이어진 거라면, 디지몬 덕분에 좋은 작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포켓몬 세대도 아니고, 그 뒤에 나온 디지몬 세대는 더욱 아니라서 이 만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아이들이 포켓몬을 볼 때 곁눈질로 보며 기본적인 진화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다. 그런데 작가의 글을 통해 만난 디지몬은 자기감정이 뭔지 몰라 헤매던 소녀를 지탱하게 한 힘이면서, 만만치 않게 성서적 철학까지 녹아 있는 작품이었다. 그저 유치한 어린이 만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은 비록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었더라도, 어린이만의 세상은 아닌 거다. 어찌 보면 만화나 동화가 그리는 세계도 진짜 (어른들의) 세상과 별다를 바 없는 듯하다.
작가는 디지몬과의 추억 사이사이에 자서전 같은 이야기를 함께 풀어놓았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십 년 넘는 돌봄 노동의 시간이 소설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했고, 삶의 한순간,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작가를 지탱하게 해 준 선배나 아빠의 말들이 내게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만약 두 책 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소설을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디지몬과의 추억 여행에 빠져들며, 작가 천선란의 마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가 보면 좋겠다.
덧.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소프트뱅크가 ABB의 로봇 산업 부문을 인수한다는 기사가 뜬 걸 보았다. 요즘은 챗GPT와 마음의 치유를 얻는 대화를 한다던데, 이 같은 AI가 로봇과 결합한다면 언젠가 콜리 같은 휴머노이드를 보게 되는 것 아닐까 싶다. 물론 지금 같은(혹은 더 성장한) AI 지능을 갖춘 휴머노이드라면, 많은 것을 궁금해하는 콜리보다는 무수한 검색 결과를 조합해 적당한 답을 찾아내는(마치 구글 같은) 휴머노이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왠지 후자의 휴머노이드는 인간적이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