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봄이 내게로 건너왔다
'노력하면 다 된다.'
열일곱의 내게 이 문장은 진리였다.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땐 나의 성실함을 쓰다듬었고, 입시에 실패했을 땐 부족했던 땀을 탓했다. 세상을 원망하진 않았다. 결과는 늘 숫자였고, 숫자는 언제나 공정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날, 내 세계의 문법은 산산조각 났다. 노력만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현실은 짧은 물음표로 알려주었다.
"왜요?"
연락처를 왜 묻냐던 너의 무심한 되물음. 그 한 문장 앞에서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좋아한다.'
'네가 궁금해 미치겠다.'
'실은 온종일 너를 견뎌내고 있다.'
그런 말들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아이는 날 몰랐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너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것도 모른 채 마음만 앞섰다. 열심히면 될 줄 알았는데, 내 진심은 네게 아무런 무게를 갖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멀어지는 뒷모습만큼이나, 짝사랑은 무척 쓰라렸다.
책상에 앉아 귀퉁이에 적힌 너의 이름을 바라봤다. 햇볕에 바랜 그 잉크 자국은 끝내 누구의 이름으로도 읽힐 만큼 흐트러져 있었다. 난 애써 덧칠하지 않았다. 다시 마음에 담았다가 또다시 부서질까 봐. 그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상처가 아물 무렵, 우연이 찾아왔다. 그날 너의 옆에 있던 친구들, 그리고 내 친구들이 어딘가에서 서로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간직하는 마음, 절절했던 내 이야기가 친구들을 움직였다. 세상은 생각보다 좁았고, 친구의 연이 실타래처럼 엉켜 결국 우리를 한 공간에 밀어 넣었다.
까맣게 드리워진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리쬐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두웠다. 마음을 들켜버린 난 곁에서 겉돌 뿐이었다. 모두가 웃는 자리에도 내 자리는 없었다. 너의 시선이 머무는 곳. 줄곧 그곳을 따라다녔지만, 네 눈에는 내가 담겨있지 않았다.
내 조바심은 초라한 질문을 만들었다. 오늘 급식이 어땠는지, 숙제가 얼마나 남았는지, 하늘은 왜 이렇게 흐린 건지. 질문이라도 해야, 너와 이어질 수 있으니까. 나는 문자 메시지로 조심스레 줄을 당겼다. 너의 하얀 손이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줄. 어쩌다 한 번씩 답장이 왔지만, 너는 언제라도 손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질문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이윽고 침묵이 이어졌다. 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았다. 사랑은 공정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요는 위태롭지 않았다. 말이 끊기면 내가 버려질 것 같았지만, 문장을 꿰지 않아도 적막은 무너지지 않았다.
언젠가 적막 속에서 너의 인기척이 들렸다. 네가 멈칫거리던 찰나, 그 겨울 같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다 삼킨 사람처럼 입술이 얕게 움직였다. 그때 처음, 네 눈에 내가 비쳤다. ‘왜요?’로 멈췄던 시간이, 그제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사이를 잇던 끈에 무게감이 실렸다. 같은 자리에 서고, 나란히 걷고, 가끔은 네가 다니는 미술학원 앞에서 기다렸다. 내가 당기면 네가 한 걸음 끌려왔고, 때로는 갑작스레 네가 날 끌어당겼다. 줄다리기를 하던 손이 맞닿아 스칠 때쯤, 우린 친해졌다.
널 처음 보았던 때를 생각했다. 딱딱하게 얼어있던 운동장과 혼자만 다른 계절을 가진 것 같던 너. 돌아보니 난 그때부터 너를 앓았다. 마지막으로 줄을 당겼다. 떨리는 손을 천천히 뻗어 끝까지 당겼다. 오랫동안 눈으로만 쫓았던 네 손끝이 닿았다. 너의 온기가 번졌을 때, 아직 꺼내지 않았던 단 하나의 문장을 던졌다.
"우리 사귀자."
문장이 허공에서 가쁘게 흔들렸다. 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정적이 다시 우리 사이의 끈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끊어질까 봐, 나는 한 번 더 끌어당겼다. 너는 손을 놓지 않았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마치 '더 이상 당기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듯이.
그리고 너는 말했다.
"그래."
너의 봄이 내게로 건너왔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DP5Qxn8y-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