툼모 소년: 전교 꼴찌의 반란

"숨만 쉬었을 뿐인데, 성적이 불타올랐다”

by 토사님

1부. 꼴찌의 낙인 – 성적표 맨 아래에서 좌절하는 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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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와 종이학

지훈은 오늘도 시험지를 접었다. 정성스럽게, 마치 종이학을 접듯이. 국어 12점. 수학 6점. 영어, 음표처럼 생긴 점수. 사회탐구는 선생님이 답답해서 빨간색으로 “ㅠㅠ”라고 써놨다.

“지훈아, 이건 예술이야. 진짜. 점수가 비어 있으니까 마음이 넓어 보인다.”앞자리 승태가 뒤돌아보며 속삭였다. 그는 지훈의 오랜 조롱 동료였다. 안 친한데 꼭 친한 척 하는 종류의 인간. 지훈은 말없이 손가락 욕을 접은 종이학 사이에 슬쩍 끼워 넣었다.

성적표는 곧 공개될 예정이었다. 모의고사 성적 전교 순위 TOP 100 &하위 10.지훈은 그 리스트의 ‘하단 자석’이었다. 이름이 맨 아래서 자꾸 머무는 탓인지, 선생님도 그를 그냥 ‘지우개’ 취급했다. 어차피 지워질 아이. 김지훈은 오늘도 국어 시험지를 예술 작품으로 재활용했다.한때는 이 종이가 지식의 등불이었으나, 지금은 종이학이다. 그것도 아주 슬프고 납작한 학. 날개 대신 절망을 접고, 부리 대신 욕망을 접었다.

“국어 12점이면 거의… 감정평가사 수준이잖아.”앞자리 승태가 속삭였다. 정색은 안 하고 웃으면서. 늘 저렇게 웃는다. 자신이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되게 평균적인 놈이다. 평균이라 웃긴 게 아니라, 평균인 줄 모르고 웃기려 해서 웃기다.

지훈은 말없이 시험지를 접었다. 두 번 접으면 A5, 세 번 접으면 수치심. 네 번 접으니 종이학이 됐다. ‘오늘도 나는 배움의 날개를 접는다. 접고, 또 접는다.

뒤에서 누가 툭 말했다.“다 찍었냐?”

‘다 찍었냐’는 말은 한국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죽었냐?’와 같은 비중을 가진 인사말이다. 지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사람들의 눈이 보이기 때문이다. 눈은 거울이고, 사람들은 그 거울을 아주 잔인하게 쓴다.

칠판 옆 화이트보드에 담임이 써둔 붉은 글씨가 있었다.

“ 내일 종례 시간: 모의고사 전교 순위 발표”

아, 그거. 그 전설의 종이. 상위권은 박수를 받고, 중위권은 고개를 끄덕이고,하위권은 존재를 끊는다. 지훈은 이미 세 번째다. 세 번 꼴찌는 실수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다. 그냥 스타일이다.

책상 밑에 지난주 월요일에 사두고 잊어버린 바나나 우유가 굴러다녔다.이 시험지는 종이학이 되고, 그 우유는 폭탄이 될 것이다. 모두들 무언가를 잊고 사는 걸로, 서로를 이해하는 중이었다.

지훈은 학을 살짝 던졌다. 종이학은 공기 중에 0.3초간 체공하다가 공책 위에 기분 나쁘게 착지했다. 정확히 '인생이란 낙하'의 모양으로.

그때 학 한 쪽 날개가 찢어졌다. 지훈은 찢어진 종이를 내려다봤다. 한참을. 아주 천천히.

“아, 내 모습도 이렇게 조용히 찢어지고 있었구나.”

그는 학의 날개에 연필로 한 줄을 적었다. 국어 시험지에서 본 시였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 아래, 자신만의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나는 방향을 모른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는 없었고, 눈은 웃지 않았다. 입만 조금, 습관처럼 올라갔다.

그날 교실엔 종이학이 하나 더 태어났다. 제멋대로인 날개와, 누군가의 시 한 줄,그리고 아주 작지만 진짜였던 표정 하나를 가진 학. 그게 김지훈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학이 언젠가 하늘을 기억하게 되는 이야기다.


전교 순위표, 공개 처형

그날 7교시 종례 시간, 담임이 칠판에 칠흑 같은 종이를 붙였다. 누가 봐도 운명의 종이였다. 교실은 갑자기 군대 내무반처럼 조용해졌다. 종이에는 상위권부터 빽빽하게 이름이 적혔고, 누군가는 “아~ 내 이름 없네” 하며 환호했고, 누군가는 의자를 뒤로 빼며 절망했다. 지훈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

“하위권은 뭐, 늘 비슷하지. 뭐 보나 마나.”담임이 툭 내뱉었다. 그러곤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덧붙였다.“근데 이건 좀 대단하다. 0점 나왔다, 0점. 이건 뭐...”

교실이 ‘캬하하’ 하며 뒤집혔다. 지훈은 바닥에 붙은 껌을 응시했다. 누가 0점인진 몰라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딱,

“김지훈. 나와 봐라.”담임의 목소리가 터졌다. 교실에 웅성거림이 사라지고, 지훈은 천천히 일어섰다. 마치 사형집행장으로 걸어가는 사형수처럼.

“이건 뭐 어떻게 된 거냐? 다 찍은 것도 아니고, 안 낸 거냐?”“...다 풀었습니다.”“그래서 0점이 나왔다는 거냐?”“네.”순간, 옆자리 수진이 기침을 참다 실패했다. 지훈의 짝사랑 수진, 뇌가 반짝거린다는 소문이 있는 전교 2등, 모범생.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았지만, 이미 입가에 ‘안쓰러움’과 ‘혐오’가 50:50으로 섞여 있었다.지훈은 그 순간, 세상 모든 산소가 뇌를 피해가고 있다고 느꼈다. 칠판 앞에서 담임 선생님이 A3 사이즈의 종이를 ‘탁’ 붙였다. 너무 조용해서 풀 테이프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아주 사소하고, 아주 선명하게. 마치 누군가의 자존심이 천천히 벗겨지는 소리처럼. 종이에는 검정 글씨가 빼곡했다.전교 모의고사 성적 순위표. 지훈은 그걸 멀리서 바라봤다. 그중 대부분은 남의 이름이었다. 단 하나만 빼고. 맨 마지막 줄.

김지훈 – 0점 – 전교 210등 정확히 말하면, 210명 중 210등. 0점. 완벽한 정답의 반대말. 순위표가 아니라, 인생의 가장 아래 줄에 붙어 있는 이름표 같았다.

“야, 진짜네. 0점이다.”

앞자리 승태가 감탄처럼 내뱉었다. 감탄은 아니었다. 그건 웃음의 탈을 쓴 판결문이었다. 지훈의 존재에 대한 가석방 없는 선고. 승태는 늘 웃는다. 문제는, 자기가 웃긴 줄 안다는 데 있다.

“지훈이형, 이건 레전드다. 이 정도면 국어시험이 지훈이형을 포기한 거 아냐?”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면 ‘포기’라는 단어는 이미 시험지 한가운데 적혀 있었다. 다만 그건 글씨가 아니라, 여백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 성적표를 보러 갔다. 그 광경은 축제였다. 누가 누구보다 높이 있느냐, 누가 너보다 위에서 너를 내려다보느냐—순위표는 공부의 인기도표가 아니라, 존재의 키 순서처럼 보였다.

동준의 이름이 가장 위에 있었다. 전교 1등. 반장. 얼굴 잘생김. 축구 잘함.‘인간형 자존심 압축팩’

누가 “우와~ 동준이 또 1등이야!” 하자그는 턱을 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어.”

그 말은너는 운도 없지?’의 고급 버전이었다. 지훈은 교실 뒤편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성적표를 보러 가지 않았다. 이미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가보지 않아도 아는 곳, 그게 바닥이다. 영원히 탈출 못하는 감옥같은 곳.

그때—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빛이 있었다. 그 빛은 지훈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흰 셔츠는 창가의 햇빛에 반사돼 조금 신화 같았다. 그녀는 성적표 앞에 섰고, 아주 짧게 지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고, 감정도 없었다. 그건 관심도 아니고, 무시도 아니고, 그냥… 투명함’이었다.

지훈은 알고 있다. 무관심은 때로 조롱보다 더 아프다. 왜냐면 조롱은 적어도,‘보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담임이 말했다.

“지훈이는… 뭐랄까. 이건 진짜 예술이다. 정직하게 하나도 안 맞는 거, 그거 쉬운 거 아니야.”

아이들이 웃었다. 그 웃음은 웃음이 아니라, 전류였다. 온몸으로 들어와, 속을 간질였다. 비웃음도 아니고, 악의도 아니었다. 그냥 습관처럼 짜여진 ‘웃음 리액션’

“아예 안 푸는 게 더 멋있긴 해.”“그니까. 그냥 철학이야, 철학.”

그 말은 패배자에게만 주어지는 박수 소리의 흉내였다. 지훈은 일어섰다. 가방도 안 챙겼고, 교과서도 안 챙겼고, 자존심만 챙기고 싶었는데—이미 누가 가져간 모양이었다.

그는 교실 문을 열었다. 문이 살짝 삐걱거렸다. 그 소리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서, 더 크게 들렸다. 그리고 나갔다. 마치, 이 교실에서의 모든 기억을 자동 저장 없이 종료하는 듯이.


자존심이 깨지는 소리

지훈은 고개를 숙인 채 교실 문까지 걸었다. 가방은 책상 위에 그대로였다. 수첩도, 연필도, 국어 0점 시험지도. 단 한 가지만 챙겼다. 그것은 사라지고 싶은 감정’이었다. 등 뒤로 무언가 따라오는 기분이 있었다. 발소리도 아니고, 손길도 아니었다. 말해지지 않은 말들이 눈에 달라붙는 느낌.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야.”

짧고 낮은 목소리. 동준. 전교 1등. 반장. 수학 올백. 선생님들 모두에게 ‘기특하다’는 감정을 빌려 쓰는 학생.

지훈은 천천히 돌아봤다. 그 돌아봄엔 질문도, 기대도 없었다. 그건 단지,

불렸기 때문에 반응하는 사람의 조건 반사.”

동준은 책상에 턱을 괴고, 교실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그냥 전학 가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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