툼모 소년: 전교 꼴찌의 반란

"숨만 쉬었을 뿐인데, 성적이 불타올랐다”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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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님과의 거리감

지훈은 책방에 가지 않았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일상은 정해진 대로 흘렀고, 지훈은 정해진 대로 멍했다.

학교 복도. 친구들의 말은 배경음처럼 들렸다. 수업 시간엔 칠판이 눈앞에 있었고,문제집도 손에 있었지만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단지 ‘앉아 있는 존재’였다. 존재감이 아니라, 존재. 도사님도 연락하지 않았다. 카톡은 오지 않았고, 알림은 더더욱 없었다. 지훈은 하루에 한 번은 《열반책방》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마다“내가 먼저 연락해야 하나?”하는 질문이 목젖을 긁고 올라왔다가“그래봤자 뭐 달라지나”라는 핑계로 다시 삼켜졌다.

집에 돌아와 책을 폈다. 진짜로 폈다. 하지만 진도는 그대로였다. 지식이 아니라, 의심이 쌓이는 페이지였다.

“나는 진짜 뭐가 문제였을까.”

그날 밤, 지훈은 꿈을 꿨다. 아니, 꿈을 안 꿨다.’평소엔 도사님이 나왔다.책방, 책, 계단, 허허로운 철학. 하지만 오늘은 그 흔한 그림자 하나조차 없었다.

무의 꿈. 진짜 깜깜한 잠. 공백 같은 밤.

그는 새벽에 잠에서 깼다. 손을 뻗어 시계를 봤다. 03:19 AM 바깥은 고요했고, 머릿속은 더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시끄러운 침묵.

《열반책방》 안, 도사님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지훈은 없었지만, 의자는 그대로 있었고, 찻잔은 깨끗이 놓여 있었다. 차를 내리지 않은 날에도 의식처럼 차를 준비하는 사람. 그게 도사님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도사님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공기에게 말하듯이.

“이제는, 내가 먼저 부를 수 없다.”

수진의 말 한마디

점심시간. 교실은 보통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급식 쟁반에서 부딪히는 스테인리스 소리, 마요네즈를 뿌리느냐 마느냐에 대한 토론, 그리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정보 전쟁. 지훈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김밥 도시락. 단무지가 눅눅했다. 공부도 눅눅했고, 의욕도 눅눅했고, 기분은 거의 흐느적거리는 김밥 상태였다.

그는 젓가락을 들고,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다. 맛은 있었지만, 기분은 안 씹혔다. 그때, 수진이 지나갔다. 평소처럼, 말없이. 그런데 이번엔—딱 한 마디가 따라왔다.

“너 요즘은 진짜 안 하더라.”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말이 너무 짧아서 오히려 몇 글자를 되새김질해야 했다.“응?”그는 되물었다. 반사적으로, 마치 귀가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수진은 멈추지 않았다. 가볍게 웃고, 다시 말했다.

“공부. 아예 안 하잖아. 그 전엔 조금이라도 하더니.”

그리고 그냥, 지나갔다. 그녀는 눈빛을 남기지도 않았고, 미소도 길게 두고 가지 않았다. 말만 두고 갔다. 정확히 지훈이 앉은 자리에, 말 한 마디를 툭 놓고 간 셈이었다.

지훈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단무지가 떨어졌다. 노란 건 노란 대로 흩어졌고,생각은 생각대로 정지했다.

“...그것마저도 내가 놓고 있었구나.”

지훈은 생각했다. 다짐도 아니고, 후회도 아닌—그냥 아주 정확한, 사실의 인정.

그날 점심, 지훈은 밥을 다 먹지 않았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갑자기 마음 어딘가가 너무 꽉 찼기 때문이었다.

무심한 종이학

목요일 5교시. 지훈은 교실 맨 끝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배운 건 없고, 배만 고팠다. 마음은 ‘종례 후’에 가 있었고, 정신은 ‘진즉 퇴사’했다. 그는 국어 교과서를 접었다. 그건 공부를 포기한 게 아니라, 종이접기를 시작한 것뿐이었다.

처음엔 학을 접었다. 그다음엔 크레인 비슷한 무언가. 결국엔 이름을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나왔다. 날개는 삐뚤고, 부리는 처박혀 있고, 꼬리는 사라졌다.

“이거 나잖아.”

지훈은 그 생명체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체념의 모형을 직접 만든 사람처럼. 머릿속에 스친 장면: 그때도 종이학을 접고 있었다. 그땐 시험지를 접었다. 지금은 그냥 아무 쓸모없는 종이를 접었다. 무의미의 진화.

“난 변한 게 없네.”

그 순간, 책상 밑에서 툭— 소리 하나. 뭔가 떨어졌다. 도사님이 준 책. 며칠 전 받은, 표지도 없고 제목도 없고 설명도 없던 ‘공허의 표상’그 책에서 무언가 삐져나와 있었다.

하얀 종이쪽지. 접힌 채로, 구겨지진 않고 살짝 말려 있었다. 지훈은 그것을 펴보았다. 글씨. 도사님의 필체. 정확히 말하면, “깨끗한 붓글씨를 흉내 낸 볼펜체”.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금 머리가 차가운 건, 공부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다.”

지훈은 그걸 읽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 감정도 안 난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건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음속 어딘가가 가만히 ‘움찔’했는데, 표정은 요지부동.

그는 종이학을 다시 집어 들었다. 머리 부분을 살짝 펴서 눈을 그렸다. 눈 두 개 찍히자, 그 학은 딱 자기가 보기 싫은 사람 얼굴이 됐다. 지훈은 피식 웃었다.

“이 자식, 생각보다 나랑 닮았네.”

돌아오는 발걸음, 그리고 다시 호흡

밤이었다. 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펼치지 않았고, 음악도 없었고, 심지어 핸드폰도 침묵을 지켰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시간:“결심이 조용히 결정되는 시간.”

지훈은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펜을 쥐었던 손. 얼굴을 가렸던 손. 책을 덮었던 손. 그리고 이제, 문고리를 잡을 손. 그는 일어섰다. 가방도 챙기지 않았다. 공책도 펜도 없었다. 오늘 필요한 건, '명확한 발걸음' 하나뿐이었다.

《열반책방》밤 9시 12분. 불은 켜져 있었다. 도사님은 그 자리에 있었다. 문이 열릴 때 도사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말은“기다렸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의 예의”였다.

지훈은 조용히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도 않았다. 긴장했다기보단, ‘자기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막 알아낸 사람’처럼 앉았다.

도사님은 말없이 찻잔을 밀어주었다. 따뜻했다. 그게 오늘은 마음에 닿았다.

지훈은 말했다. 정말 작게, 근데 그 말은 지금까지 그 어떤 큰소리보다 단단했다.

“이젠…조금이라도 움직여볼게요. 아무것도 안 한 건, 결국… 저였던 것 같아요.”

도사님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숨부터 쉬자.”

지훈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번엔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호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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