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내가 영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아빠 때문이었다. 만화가라는 불안정한 직업, 나이 차이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 우리는 같은 성, 같은 본이었다. 동성동본 혼인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동성동본 혼인법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면 아빠는 늘 말씀하셨다.
"법이 바뀐다고 해도 동성동본은 안 된다."
돌이켜보면, 그건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이 사랑을 마음 놓고 허락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이 만든 방어막. 하지만 그 방어막은, 아빠가 떠난 순간 무너져버렸다. 그의 품에 안겨 울고, 그의 목소리에 마음을 기댄 걸 보면 내 마음은 이미 다른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세상을 떠난 아빠에게 몹시 미안해졌다.
월요일 아침, 교실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분주함이 밀려들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림책, 색종이 교구함 옆에 정돈된 색연필, 그리고 아이들이 들어오기 전의 짧은 고요.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선생님, 이제 안 아파요?”
1주일 만에 유치원으로 돌아온 내 손을 잡고 아이들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무너진 감정을 애써 세우고,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 일주일, 한 달을 살았다.
"아빠다."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아빠가 떠올랐다. 하지만 매일 걸려오는 영우의 전화가 내 삶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큰 힘이 됐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가고 싶은 곳이나.”
그의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원고 마감에 시간을 쪼개 사는 그에게, 내 욕심을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럼, 놀이공원 갈까?”
“근데… 난 놀이기구 못 타요.
갑자기 풀죽은 영우 목소리가 귀여웠다.
“나도 잘 못 타. 같이 무서워하면 되지.”
드디어 영우와 함께 가는 첫 번째 소풍, 나는 김밥을 싸고 싶었지만 절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유치원 주방에 불을 켰다. 맛은 장담 못하지만 정성만큼은 최고였다. 김밥을 들고 기다리는 내 앞에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을 드리운 그가 나타났다.
“원고 당기느라 밤샜지?”
“잠보다 더 큰 문제는, 오늘 처음으로 고속도로 타는 겁니다.”
임시 번호판을 갓 떼고 나온 차, 초보운전의 첫 장거리였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 놀이공원 간판이 보였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고 숨을 내쉬었고 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운전 잘하네. 고생했어.”
유치원 소풍으로 몇 번 왔던 곳이지만, 내가 주인공으로 온 건 처음이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걷던 길, 이제는 그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우리는 대관람차를 타고, 솜사탕을 나눠 먹고, 커플 머리띠까지 맞췄다. 나는 내내 웃었고, 그는 그런 나를 그리듯 바라봤다.
벤치에 앉아 쉴 때마다 그는 화구통을 꺼내 그림을 그렸다. 만화 속 골목길, 벽에는 '지연이 바보'라고 낙서를 그려 넣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그의 표정을 내 가슴속 도화지에 새기고 있었다.
“미안해. 네 시간 빼앗는 것 같아서.”
“아니에요. 나는 오히려 좋아요. 덕분에 이렇게 나왔어요. ”
그의 대답에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엔 내가 작업실로 가기로 했다.
그의 시간에 나를 끼워 넣는 방법, 그게 어쩌면 우리 다운 데이트인지도 모르니까.
동물원으로 향했다. 일본원숭이 우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새끼 원숭이가 어미 품에 안겨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뭐야. 귀엽다. 메롱.”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철조망을 가볍게 두드리며 원숭이 흉내를 냈다. 새끼가 반응하듯 몸을 꿈틀거리자 나는 손짓까지 해봤다.
"지연, 장난 그만..."
그때 어미 원숭이가 나를 향해 달려와 주먹을 날렸다.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고, 그가 순식간에 내 앞에 섰다.
“선배, 진짜 원숭이한테 맞을 뻔했어요.”
그는 웃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식 건드리면, 어미는 목숨 걸어.”
어미 마음을 잠깐 잊고 상처를 준 원숭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란 나를 꼭 잡아주는 그의 손이 따뜻했다. 그날, 우리는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놀이공원 한구석, 회전목마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나는 팝콘을 먹고, 그는 화구통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가끔 그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었다. 그림을 보느라 잔뜩 찌푸린 미간, 집중하는 눈빛.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사랑은, 이별이라는 아픔이 뚫고 들어와 그 틈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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