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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레밸 May 15. 2022

뼈문과, IT기술영업 책으로 배웠어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문송합니다'를 외치는 나는 뼛속부터 문과다. 이런 내가 6년 전 IT기술영업을 시작했다. 현재 회사의 내 직무 채용공고에는 '이공계 우대' 항목이 생겼지만, 내가 입사할 때까지는 문과도 괜찮았다. IT기술영업이란 인식보다는 파워포인트를 활용해서 제안서 작성 업무를 수행하는 B2B영업직무라고만 생각해서 입사했었다. 신입사원 연수시절에 네트워크의 기초를 배우며 새로운 분야를 접하게 된다는 설렘도 가득했었고, 자기계발에 좋은 기회로 삼고자 했다. 또한 엔지니어링 기반의 기술컨설팅이 필요할 때는 STAFF부서나 협력사의 지원을 받으면 되겠구나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기술영업에 두려움은 없었다. 네트워크를 비롯해 IT 기본지식과 고객 컨설팅을 위한 상품지식은 공부해서 쌓으면 된다고 자부했다.


그렇게 1년차 때, 부서 필드트립 형태로 사업별 STAFF 조직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내부 인트라넷에 있는 모든 상품자료를 정독했고, 인터넷을 활용해서 IT지식을 쌓았다. 회사 내부망 접속을 위한 고정IP 설정에도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는 수준이었지만, 네트워크의 기초인 OSI 7 Layer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이해가 안되니까 무작정 암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준비기간을 마치고 난 현장 영업부서로 가겠다고 손 들었다.


일에 대한 두려움은 적은 편이라 관리고객을 배정받을 때도 크게 걱정은 없었다. 모르면 찾아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이런 당찬 포부는 고객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쪼그라 들었다. 고객과 첫만남이니 명함만 건네고 돌아오려는 나에게, 고객 담당자는 답변이 필요한 질문들을 시작했다. 현재 자신들이 사용 중인 상품의 문제점부터 새로운 장비도입에 대한 의견까지... 전문성 있어 보이고 싶은 나머지 이해하는척 고개를 계속 끄덕였지만, 고객사 전산실에 들어가서 RACK 속에 있는 무수한 장비들을 마주한 순간, 고개 끄덕임조차 멈춰버렸다. 글을 통해 배웠던 상품과 기술 지식들은 장비운영 측면에서 크게 필요한 내용들이 아니었으며, 고객 담당자는 기술지식 뿐만 아니라 오랜 운영경험을 바탕으로 상품에 대한 이해도도 나보다 높았다. 난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며 이실직고하고, 확인해보고 연락준다며 고객사에서 빠져나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대면해서 컨설팅을 제공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반복되는 깨달음은 고객사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직 나에게는 쪼그라든 당찬 포부가 남아있었고, 만발의 준비를 해서 고객사를 향하고자 다짐했다. 내가 생각해낸 준비는 어떤 질문이 나오더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자료를 출력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객과의 대화를 리딩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새로운 상품과 기술을 이야기하고, 출력물을 활용해서 멋진 설명을 펼치는 것이다. 적지 않은 강사생활과 발표경험으로 준비된 자료를 가지고 스피치하는 것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수많은 제안서를 출력하고 제본하기 시작했다. 내 가방이 출력물들로 가득 차는 것에 비례해서 나도 자신감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이번에도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다.


내가 준비한 자료로 고객과 대화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고객은 내 설명을 가만히 들어주지 않았다. 출력물을 테이블에 꺼내놓는 순간 고객담당자가 낚아채서 눈으로 후루룩 읽어냈고, 대부분 관심없는 내용인지 설명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순간 대화의 주도권은 다시 고객 담당자에게 넘어갔고, 몇몇은 오히려 내가 준비한 자료에 대한 보충설명을 내게 해주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나니, 사무실 내 자리에는 동일한 제안서와 출력물들이 파쇄기로 옮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지금은 고객과 대화를 리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경험보다 값진 스승은 없다는 말이 곧 진리였다. 실제 몸으로 부딪히면서 알게된 지식들이 어느덧 다른 사례에도 응용이되고, 수년간 고객과 새로운 기술분야로 소통해오면서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향상됐다. 여기서 처음과 달라진 가장 큰 차이는 '듣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기술영업 새내기일때는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컨설팅이란 그런 것인줄 알았다. 하지만 컨설팅은 고객이 필요로하는 것을 제공하거나, 고객 본인도 모르는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선 말하기보다 '듣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즉, 고객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고객니즈과 고충사항을 청취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대화도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며 고객도 나와의 만남에서 의미를 찾게 된 것이다. 그 후, 고객니즈에 대해서는 빠른 피드백을 주고자 행동했더니,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리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 고객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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