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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규 Feb 27. 2024

[에세이]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간만에 집에 혼자 남았다. 가족들은 김장을 하러 할머니댁에 갔고, 나는 나라에서 해준다는 취업상담과 누군가의 졸업공연에 가기 위해 남기로 했다. 아아, 이 고요한 평화. 거실에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티비로 내 취향의 음악을 크게 듣는다. 푹 쉬었으니 이제 운동 갈 준비를 해볼까. 기운을 내려면 뭐라도 챙겨먹어야 한다.


집을 한바퀴 둘러보니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우유와 생크림이 남아있었고, 다른 한 켠에는 스테비아 방울토마토와 바질이 생기를 잃고 물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엊그제 마트에서 사온, 양상추의 색이 변하기 시작해 무려 90%할인을 받은 모둠샐러드팩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주는 간만에 사촌들이 집에 놀러온 덕분에 여러번 외식을 하고 맛있는 것들을 배달시켜 먹었어서 그 관성으로 뭘 또 시켜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나에게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사둔 나의 유제품과 풀들을 상하기 전에 요리해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지난주의 나야. 너의 원대했던 계획을 내가 오늘 이뤄주마.


마음을 먹고선 가장 먼저 푸실리를 삶아 깨끗하게 씻어 물을 뺀 후 샐러드에 올려 오리엔탈 소스를 뿌렸다. 새콤한 맛으로 입맛을 돋아줄 전형적인 식사의 시작이다. 오늘은 고기와 단백질을 좋아하는 평소 나의 식단에 미뤄둔 그린쿼터제를 도입해주는 날이다.


다음엔 팬을 옮겨 버터에 밀가루를 볶아 우유와 생크림을 넣고 토마토와 바질을 넣는다. 거기에 냉장고에 상주하는 네 종류의 치즈(브리,까망베르,체다,크림치즈)를 적절히 녹여 맛에 복잡함을 더해줬다. 하지만 맛의 완성에는 역시 대기업 석학들이 만든 공장제 통조림 소스가 최고다. 냉장고 한구석 얼마 남지 않은 시판 로제크림소스를 부어 섞었다. 겨울철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줄 로제크림스프 완성이다. 



 

이제 메인으로 넘어가야지. 지금까지와 조금 겹치지만 오래된 재료들을 보내줘야하니 별 수 없다. 토마토와 바질에 치즈를 썰어넣고, 한국인의 채소-마늘과 언젠가 선물받은 비싼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다. 그 위에 미국에서 사온 핑크솔트와 통후추를 갈아 간을 맞추고 향을 더한다. 맛소금과 네모난 통에 담긴 순후추도 맛있지만 이럴 땐 허세를 조금 부려도 괜찮겠지.


이제 알단테로 적절하게 삶아낸 스파게티 면을 넣어 치즈가 녹을때까지 잘 섞어주면 성시경 파스타로 유명한 산뜻한 한 접시가 완성된다. 여기에 언제 먹어도 맛있는 돼지고기를 마트시식코너 스타일로 강하게 간을 해 튀기듯 구워 토핑으로 올린다. 느끼할때쯤 얼음과 레몬즙을 섞은 제로사이다를 마시면 따가운 액체가 목을 훑으며 내려간다. 좋다. 더 바랄게 많지 않다.


하지만 제과/제빵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으로써 이대로 끝낼수는 없다. 우리집에는 직접 만들어 선물하고 가족용으로 따로 빼둔 디저트가 종종 남아있다. 오늘 냉장고에는 은은한 얼그레이 향이 나고 가운데가 크림처럼 부드러운 얼그레이 바스크치즈케이크가 20시간째 숙성되고 있었고, 상온에는 어제 구운 먹음직한 휘낭시에가 레몬 아이싱을 덮은 채로 바삭함과 쫀득함을 잃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 



 

그리고 커피를 배우다보니 요즘은 아메리카노보다 에스프레소가 더 매력있게 느껴진다. 쫀득하게 뽑아낸 에스프레소에 수제크림을 올린 에스프레소 콘파냐와 수제 디저트를 마음에 드는 그릇에 담아 책상위에 올려두고선 설거지와 마치고 달달한 크림에 디저트를 찍어먹으면 기분 좋은 하루가 완성된다.


식사 후 디저트에 곁들이는 커피 한잔 힐링타임이라니. 혼자지만 구색을 갖춘 식사가 꽤나 그럴듯하다. 나는 이런 하루가 좋다. 쇼츠나 틀고 누워서 가만히 불안을 느끼고 지나간 과거만 추억할 바에는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하고, 스스로를 챙기고, 나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 더 가치있는 것으로 바꾸는 하루.  


 

그런데 가끔은 이런 일상도 의미없게 느껴질때가 있다. 왠지 허전할 때가 있다. 과하게 차린 밥상이 미처 다 비워지지 못해 밀폐용기에 담겨 형태만 바뀐 채 냉장고로 다시 들어가고, 따끈했던 디저트는 식어갈 때. 혼자 아주 멋지고 기분좋은 하루를 보냈는데 전화를 걸어 나눌 곳이 없을 때. 인스타에서 좋은 카페나 전시를 알게 됐는데 함께 가고싶은 사람이 떠오르지 않거나 이미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된 얼굴만 떠오를 때.


인생은 원래 혼자고 버티다보면 좋은 날이 온다던 말에 밑줄 그은 날도 있지만 곁에 있는 존재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고 어딘가에 시간을 쏟고 노력을 쏟는게 별 의미없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요즘 혹시 좀 외로운가 싶은 생각도 해보지만 당연하게도 혼자 기분좋고 맛있는 식사를 챙겨먹은 날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교를 다녔던 4년 동안 뭘 하면서 지냈는지 나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전혀 아니고, 이제껏 꿈이라고 생각하고 달려왔던 것들이 정말 내가 바라는 일인지 의심되고, 내가 노력하고 애정을 쏟았던 대상은 언제 벌써 내 곁을 떠났는지 사진만 남았고, 내가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 갈피가 안 잡히는 시기가 종종 온다. 이런걸 보통 사춘기라고 불렀었나? 

나의 사춘기는 이렇게 막막함으로 온다. 일상이 방향 없이 흩어지는것만 같은 감정으로 찾아온다. 지금껏 여러 경험과 시간을 지나오면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냥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져 온듯한 착각. 어른이 되면서 얻는게 단단한 마음과 지혜가 아니라 낡아가는 몸과 상처받은 마음같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럼 그냥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예를 들어 혼자서 멋진 식사를 챙겼던 날은 언젠가 결혼을 하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옆에 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내주는 주말을 선물해줄 예행연습이라고 말이다. 이 글도 언젠가 써낼 내 인생 걸작의 습작이라고. 이건 전부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 위에 한 점이라고 믿어보자. 

지난 글에서 황현산 선생님의 책을 읽고 '희망은 희망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옮겨 적었던 것처럼, 김연수 작가님의 책을 읽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바라보는 오늘을 떠올렸던 것처럼 다시 생각해보자. 오늘의 고민과 외로움과 고통은 지나고보면 아무것도 아닐것이다. 의미없나 생각했던 모든 행동들은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 되어 안온하고 평화로운, 행복한 삶을 향한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분명 오늘의 삶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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