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었던..
어렸을 땐 강아지를 무척 키우고 싶었다. 부모님을 몇 번이나 졸랐지만, 결국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군대를 가게 되었다. 전역하기 일주일쯤 전이었을까. 휴가를 나왔는데, 집에 못 보던 강아지가 있었다. 작고 귀여운 요크셔테리어 강아지 ‘꼬맹이’를 처음 만난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하찮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던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갑작스럽게 조우한 이 작은 생명체는 처음 본 순간부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었다.
내가 군대에 가 있는 사이,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께서 집에 혼자 있는 동생을 위해 분양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게 많은 노력과 책임이 따르긴 했지만, 매일 변함없이 반겨주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하고 순수하게 즐겁기도 했다. 처음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낯가림 없는 성격과 예쁘장한 외모 덕분에 어딜 가든 사랑받는 아이였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그날은 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왜 문단속을 하지 않았던 걸까. 그 당시엔 디지털 도어락이 없던 시절이라 열쇠로 문을 잠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짝만 밀어도 문이 열려버리는 옛날 빌라였기에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다. 꼬맹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하루 종일 동네를 울며 뒤졌던 기억이 난다. 낯선 누군가를 따라갔다는 목격담도 들었다.
꼬맹이와 지내던 몇 달간의 행복한 기억을 뒤로하고 결국 찾는 걸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사랑을 주던 그 아이는 누군지 모를 사람을 따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원래부터 동물을 좋아하던 우리 남매는 다음 동물로 고양이를 선택했다. 매력적인 눈매, 복슬거리는 털, 도도한 성격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아기 고양이 랑이를 처음 만났을 땐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고양이라는 생물 자체가 주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너무나 예쁘고 귀엽기도 했지만, 쫓아가면 달아나고 가만히 있으면 와서 애교 부리는 그 성격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보통 연애를 할 때 밀당을 한다고 하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랑이는 커가면서 점점 더 도도한 성격으로 변했다. 아기 때는 마냥 빨빨거리며 장난치기 바빴는데, 성묘가 되었을 땐 마치 집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내 입장에서는 랑이와의 관계에서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언제나 쿨한 관계를 유지했고, 랑이는 딱히 나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몇 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랑이의 성격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외출을 싫어하고, 장난감에는 금방 싫증을 내며, 조용히 집 한구석을 지키다가도 어느 순간 다가와 양 볼을 내게 문질렀다.
동생과 내가 각자 결혼을 하면서 랑이는 자연스럽게 동생이 데려갔다. 양육에 대한 지분도 동생이 더 컸으므로 우리 둘 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더라도 얼마 후 동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위아랫집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랑이를 마음만 먹으면 자주 볼 수 있었다. 랑이가 10살이 넘었을 즈음부터는 너무나 익숙한 가족이 되어 있었기에, 아마도 신경을 덜 쓰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 두 부부에게도 각각 아이가 생겼고, 일과 육아로 바쁜 삶을 살 때에도 랑이는 언제나 같은 곳에 있었다. 랑이가 내 아들을 피해 도망 다닐 때에도, 조카가 모르고 꼬리를 밟아 털이 한 움큼 빠졌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몰랐다. 랑이는 늙어가고 있었다.
랑이가 떠나기 며칠 전, 나를 보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온몸을 파고드는 암세포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랑이는 한 번 더 만져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면 어김없이 양 볼을 내게 문질렀다. 그것이 랑이만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랑이는 바라는 게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든 만져주길 바라며 어딘가에서 나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느 날, 아들이 체험 학습 교실에서 아주 예쁘고 화려한 베타피쉬 한 마리를 데려왔다. 물고기는 아주 작았지만, 오랜만에 동물을 키운다는 생각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어린 아들이 이 작은 생명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결국 양육의 몫은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데려온 다음 날, 바로 어항과 먹이를 구매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생명체라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원하는 대로,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만 ‘티라미슈’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베타피쉬는 유전적으로 개량된 종이라 지느러미가 꽤 화려하고 예뻤다. 특히 티라미슈는 몸통부터 꼬리지느러미까지 붉그스름한 노을이 지는 듯한 색을 띠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거울을 보여주면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세우며 공격하려는 듯한 행동을 하는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마치 교감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베타피쉬는 사람을 알아본다고도 해서, 키우는 맛이 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물고기는 수명이 짧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물고기에게 정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티라미슈는 어느덧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매일 밥을 주고, 거울로 놀아주고, 물을 갈아주다 보니 그것이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가끔은 퇴근하고 집에 오면 티라미슈가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티라미슈는 이별의 징후를 가장 강하게 보여주었다. 점차 행동이 둔해지고, 밥도 잘 먹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티라미슈는 그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저무는 노을의 마지막 찰나 같은 색을 띠며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현재 우리 가족은 나와 아내, 아들과 딸,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라게 브라우니까지 다섯이다. 가장 불안한 상태로 맞이했던 소라게는 생각보다 훨씬 잘 적응해 주었다. 절대로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된다고 해서, 물과 밥만 갈아주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들도 내 지시 없이는 건드리거나 관심을 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소라집 속에서 나오지 않을 때도 걱정이 됐지만, 집을 들춰보지는 않았다.
처음 2주 동안 소라집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우리 가족은 브라우니가 정말 죽은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아침, 브라우니가 축 처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고, 색깔도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소라집 속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우리 집에 온 후 처음으로 탈피를 한 것이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신기했다. 널브러져 있던 것은 허물이었고, 소라집 안에는 위험한 탈피 과정을 (탈피 도중에 죽는 소라게도 많다고 한다) 무사히 마치고 더 튼튼해진 브라우니가 곤히 쉬고 있었다.
가장 짧게 살 줄 알았던 브라우니는 어느덧 우리와 함께한 지 2년이 되었고, 탈피도 두 번이나 했다. 사실 가장 보잘것없어 보였던 소라게가 가장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 역시 쓸데없는 관심보다, 믿음에서 오는 무관심이 더 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