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폭포수 모델이 부활할까.

오히려 지금, 폭포수처럼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 다시 중요해졌다

by 기웃

AI가 기획자의 일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예전에는 머릿속에만 있던 아이디어를 문서로 옮기고, 화면 흐름을 잡고, 사용자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는 데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지금은 다르다. AI에게 한두 문장만 던져도 개요가 나오고, 정책 초안이 나오고, 화면 설명과 사용자 여정까지 순식간에 정리된다.

이 변화는 분명 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을 하다 보면 더 선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AI 시대에도 기획의 본질적인 스킬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AI를 기획 생산성의 혁명으로 받아들인다. 그 말은 맞다. 다만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말이 곧 기획이 쉬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문서를 빨리 만드는 능력보다,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 정확히 정의하는 힘이 훨씬 더 크게 드러난다. AI는 잘 정리된 질문 앞에서는 놀랄 만큼 유능하지만, 질문 자체가 흐리면 그럴듯한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다.

결국 기획자의 핵심 역량은 여전히 같다.

문제를 잘 정의하는 힘, 우선순위를 세우는 힘,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기준을 세우는 힘,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맥락을 잃지 않는 힘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능을 기획한다고 해보자. AI는 경쟁 서비스 비교, 요구사항 초안, 사용자 스토리, 정책 문구, 심지어 일정표까지 순식간에 만들어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획자의 역할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프로젝트에서는 오히려 그다음부터가 더 중요하다.

이 기능이 정말 필요한가, 지금 우리 사용자에게 가장 큰 문제인가, 이 타이밍에 개발 리소스를 쓰는 게 맞는가, 출시 후 운영 비용은 감당 가능한가, 다른 기능과 충돌하지는 않는가. 이런 질문은 여전히 사람이 붙들어야 한다.

AI는 답을 잘 만드는 도구이지, 답의 방향을 책임지는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요즘 오히려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폭포수 모델 같은 사고 방식이다.

물론 과거식 폭포수 모델을 그대로 가져오자는 얘기는 아니다. 요구사항을 처음에 다 얼려놓고, 뒤로 갈수록 변경을 막는 식의 경직된 방식은 지금 같은 환경과 잘 맞지 않는다. 시장도 빠르게 바뀌고, 실험 주기도 짧고, 제품은 출시 이후에도 계속 수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애자일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현장에서는, 생각 없이 애자일만 외칠수록 더 많은 혼란이 생기기도 한다.

왜 그럴까.

AI 덕분에 우리는 무엇이든 빨리 만들 수 있게 됐다. 기획 문서도 빨리 나오고, 화면 시안도 빨리 나오고, 프로토타입도 빨리 나온다. 문제는 그 속도 때문에 팀 전체가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상태로 다음 단계에 너무 쉽게 넘어간다는 점이다. 정의가 덜 된 문제, 합의되지 않은 목표, 모호한 성공 기준을 안고도 일단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중간에 방향이 흔들리고, 회의는 많아지고, 수정은 반복되고, 결과적으로는 더 느려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일종의 현대적 폭포수 감각이다.

즉 개발 프로세스를 경직되게 운영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초반에는 문제 정의와 목적 정렬, 사용자 가치, 정책 기준, 예외 케이스 같은 것들을 한 번 깊게 내려가서 정리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예전 폭포수 모델이 문서 중심이었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사고 중심의 폭포수에 가깝다.

초반에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질문하고, 충분히 반박해보는 시간 말이다. AI가 초안을 빨리 만들어주는 시대일수록, 사람은 그 초안을 더 깊게 검토하고 구조화해야 한다. 문서를 쓰는 시간은 줄어들 수 있어도, 판단하는 시간까지 줄여버리면 안 된다.

기획자는 종종 빠르게 많이 만드는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하지만 오래 일할수록 느끼는 건, 좋은 기획자는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라 정확하게 줄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하지 않을 것을 정하고, 지금 안 해도 될 것을 미루고, 핵심이 아닌 것을 걷어내는 사람이다. AI는 후보를 무한히 늘려주지만, 기획자는 그중에서 지금 해야 할 한 가지를 골라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본질적인 기획 스킬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사용자를 이해하는 힘, 사업 맥락을 읽는 힘, 리스크를 예상하는 힘, 조직 안에서 언어를 번역하는 힘. 개발에게는 구현 가능한 문제로, 디자이너에게는 경험의 기준으로, 운영에게는 정책의 규칙으로, 리더에게는 우선순위의 이유로 설명해내는 능력 말이다.

AI는 이 과정을 보조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현장의 복잡함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AI 시대일수록 기획이 더 중요해진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문서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을 구조화하는 기획이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역설적으로,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합의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폭포수적인 태도가 다시 힘을 가진다.

빨리 쓰는 것보다 먼저 깊게 생각하는 것.

많이 만드는 것보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것.

AI가 해주는 일보다, AI에게 무엇을 맡길지 판단하는 것.

결국 시대가 바뀌어도 기획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도구는 변하지만, 문제를 정의하고 방향을 정하고 팀의 사고를 정렬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일이다.

어쩌면 AI 시대의 좋은 기획자는

가장 빠르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늦게까지 본질을 붙드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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