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십일센티 Dec 20. 2021

매일의 동화 6

달님이

“얘, 너 몇 살이니?”

 계단에 앉아 신나게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여자애가 다가왔어요. 빨간색 티셔츠와 남색 바지를 입은 여자애는 얼굴이 하얗고 귀까지 오는 곱슬머리가 제멋대로 춤추고 있었어요. 새침하게 묻는 여자애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어요.

 “나 아홉 살.”

 나는 다시 스마트폰에 눈을 돌리고 대충 대답했어요. 한참 게임이 잘 되고 있었고 새롭게 친구를 사귀는 건 정말 귀찮았거든요. 하지만 여자애는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내 옆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게임하는 걸 구경했어요.

 “우와! 정말 신기하다. 이건 뭐야?”

 “뭐긴 뭐야. 게임이지.”

 여자애가 신경 쓰여 게임에 지고 말았어요. 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거실엔 외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켜고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소리가 엄청 큰데 잘도 주무셔요. 하루 종일 켜있는 텔레비전이 피곤해 보였어요.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뒤로 텔레비전을 끄지 않아요. 나는 살그머니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고 채널을 돌렸어요.

 “할아버지 안 잔다.”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고 코 고는 소리도 들렸는데! 하는 수 없이 리모컨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왔어요. 주머니에서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는 순간 귀신같이 엄마가 나타났어요.

 “너, 또 게임하려고 했지?”

 엄마는 나를 흘겨보곤 가방에서 학습지와 일기장을 꺼내 놓았어요.

 “외갓집 왔다고 놀 생각만 하지 말고 숙제나 해!”

 흥! 외갓집에 놀게 뭐 있다고 그러는지 몰라요. 정말 아~무것도 없거든요. 집 밖은 온통 논과 밭뿐이에요. 유일한 친구가 스마트폰인데 엄마는 그마저도 못하게 해요. 

 외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입원한 뒤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돌본다며 방학이 되자마자 나를 강제로 외갓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외할머니가 없는 외갓집은 엄청 크고 쓸쓸했어요. 엄마는 그런 외갓집에서 부지런히 움직였어요. 지금도 내 앞에 숙제들을 늘어놓고 바람처럼 사라졌어요.

 나는 슬그머니 다시 밖으로 나왔어요. 마당 구석에 아까 그 여자애가 쪼그려 앉아있었어요. 남의 마당에 허락도 없이 잘도 있어요. 여자애는 작은 돌멩이를 던지고 받으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어요.

 “뭐해?”

 이번엔 내가 말을 걸었어요. 여자애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어요.

 “공기놀이, 같이 하자!”

 “공기놀이?”

 문구점에서 봤던 공기와는 전혀 달랐어요. 돌멩이라 아플 줄 알았는데 부드럽고 단단하니 손에 잘 잡혔어요. 여자애는 묘기를 부리듯 단숨에 20점을 먼저 채웠어요. 나도 오기가 생겨 열심히 했지만 한 번도 이기질 못했어요. 

 “깔깔깔! 나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키는 나보다 작은 게 공기 가지고 잘난 척하는 게 얄미웠어요. 이번엔 다른 놀이를 했어요. 

 땅바닥에 커다란 정사각형을 그리고 땅을 따먹는 게임이었어요. 돌을 세 번 쳐서 안으로 들어오면 내 땅으로 만들 수 있어요. 처음엔 여자애 땅이 많았는데 점점 내 땅이 많아졌어요. 아파트도 세우고 놀이터도 만들고 공원도 마트도 지을 수 있게 되었죠.

 “이것 봐라. 나 땅 부자야!”

 이번엔 내가 거드름을 피웠어요. 

 “피!”

 여자애는 새침하게 돌아섰어요. 움직일 때마다 춤추는 곱슬머리가 무척 귀여웠어요.

 이번엔 비석 치기를 했어요. 세워져 있는 돌을 쳐내는 게임이었는데 단계가 올라갈수록 어려운 방법으로 돌을 쳐내야 했어요. 이건 우리 둘이 막상 막 하였죠. 하지만 결국 여자애가 이기고 말았어요. 비록 졌지만 하나도 속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신이 났죠!

 잠깐 쉬는데 여자애가 내 스마트폰을 궁금해했어요. 아마 여자애 엄마는 스마트폰을 절대로 못 보게 하나 봐요. 내 친구 중에도 스마트폰을 못 보는 친구가 있는데 이유가 100가지도 넘어요. 나의 소중한 보물 1호지만 기꺼이 여자애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도 시켜주었지요. 여자애는 한참을 빠져보더니 눈을 비볐어요.

 “재미있는데 눈이 너무 아프다.”

 우리는 다시 놀이를 했어요. 여자애는 재미난 놀이를 많이 알고 있었어요. 이번엔 여자애 보물 1호인 검은색 고무줄을 꺼내 나무에 묶었어요. 노래에 맞게 발재간을 부리며 고무줄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무척 재미있었어요. 나는 가장 기초 단계인 ‘장난감 기차’를 배웠어요.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어요. 먼 산 위에서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했지요.

 “가야겠다. 늦으면 엄마한테 혼나.”

 여자애가 간다니 서운했어요. 외갓집에 온 뒤로 아닌 최근 들어 가장 신나게 논 하루였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른 체 놀기만 했어요. 

 “근데 너 이름이 뭐야? 난 하늘이야.”

 “난 달님이! 엄마가 보름달 뜨는 밤 나를 낳았데. 그래서 달님이라고 불러. 진짜 이름은 너무 이상해서 안 알려줄래.”

 여자애가 혀를 쏙 내밀었어요.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어요.

 “내일 또 놀러 올래?”

 “약속은 못해. 밭에 풀이 산을 이뤘거든. 오늘은 밭 매다 몰래 나온 거야.”

 달님이는 엄마일 을 잘 도와주는 착한 아이인 듯했어요. 순간 빨래 개는 것도 싫어했던 내가 부끄러웠어요.

 달님이는 노을을 등지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어요.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집안으로 들어왔지요. 엄마는 부엌에서 외할머니의 냉장고를 청소하느라 바빴어요. 화석처럼 굳어버린 음식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정 봉지들이 한가득 이었지요. 마법처럼 계속해서 무언가가 나왔어요. 미리 나와 싱크대에 처박혀 있던 음식들은 서서히 녹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어요. 

 “아휴, 엄마는 뭘 이렇게 쟁여두었담. 아끼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엄마의 눈에도 할머니와의 추억이 녹아내리고 있었어요. 

 나는 슬그머니 주방을 나와 안방에 있는 할아버지에게로 갔어요. 할아버지는 낡은 여행 가방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어 보고 있었어요.

 빛이 바랜 사진들을 예전에 한번 본 적 있어요. 엄마와 이모들의 어린 시절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요. 할아버지는 나를 흘끗 보더니 다른 사진첩을 꺼내 주었어요. 이건 전에 본 적 없는 아주 낡은 사진첩이었어요. 가죽으로 된 겉표지는 많이 헤졌지만 단단하고 무거웠어요.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어요.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구경했어요. 사진 속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색이 있는 사진보다는 색이 없는 흑백 사진들이 훨씬 많았지요. 앗! 그런데 낯익은 모습이 보였어요. 여자애 다섯 명이 나란히 서있는 사진이었는데 그중엔 오늘 종일 놀았던 달님이랑 닮은 아이도 있었어요.

 “할아버지 이 앤 누구예요?”

 나는 그 여자애를 손으로 가리켰어요. 할아버지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어요. 

 “외할미 사진이지. 허허허. 네 나이쯤 됐을 게다. 이게 여기 있었구먼.”

 할아버지는 그 사진을 바짝 끌어당겼어요. 

 “네 할미 어릴 적 소원이 하루 종일 노는 거였단다. 아픈 어미도와 일하느라 놀 틈이 없었다고 그러더구나.”

 할아버지의 눈 속에 달님이의 모습이 어른거렸어요.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오늘 하루 종일 같이 놀았던 달님이 가…….

 밤이 깊어갔어요. 몸은 피곤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어요. 엄마의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창밖에 매달린 청개구리 소리가 화음을 이뤘어요. 처음엔 개구리 소리가 무서웠는데 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다녔어요. 한 달째 중환자실에 누워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외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하늘이 얼굴에 보름달이 떴네!”

 외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을 하며 볼을 만져 주었어요. 외갓집에 오면 먹을 것을 계속 내어 놓으며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죠.

 외할머니가 그리웠어요. 이젠 내 눈에서 할머니와의 추억들이 방울방울 흘러내렸어요.

 어느 순간 잠이 들었나 봐요. 꿈속에서 달님이를 또 만났어요! 

 “달님이 네가 우리 할머니야?”

 달님이는 대답은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내 손에 공깃돌을 올려놓았어요. 우리는 꿈속에서 신나게 놀았어요. 공기놀이, 비석 치기,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서로 이기고 지고 반복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어요. 꿈속에서도 해가 졌어요. 달님이가 또 인사를 해요.

 “이제 가야 해. 하늘에 보름달이 뜨기 시작했거든.”

 나는 달님이에게 손을 흔들었어요.

 아침이에요. 겨우 눈을 떴는데 급하게 외출 준비를 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어요.

 “하늘아, 큰 이모한테 연락 왔어! 할머니가 눈을 떴데! 엄마 병원 다녀올 테니까 할아버지랑 있어.”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매일의 동화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