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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센티 Dec 24. 2021

매일의 동화 8

싹을 틔었다.

학교에서 허브 씨를 받아왔다. 조그만 씨앗들이 종이봉투 안에서 굴러다녔다. 작은 씨앗들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허브는 좋은 향기가 나요. 그래서 요리나 화장품에 많이 쓰이기도 하지요. 나중에 허브가 자라면 어떤 향기인지, 어떤 꽃을 피웠는지 꼭 말해줘요.”

 선생님이 종류가 다른 허브 씨를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말했다. 

 “선생님 페퍼민트 씨앗도 있어요? 치약 향이 나는 거요!”

 다인이가 아는 척을 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허브 종류가 굉장히 많은데 그중 무엇이 날지 모른다며 눈을 찡긋 하셨다. 그리고 내가 심은 씨앗이 어떤 허브였는지 글이나 그림, 사진으로 남겨오라고 했다. 꼭 해야 하는 숙제는 아니지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그마한 허브 씨를 손에 쥐자 가슴이 설레었다. 벌써부터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받은 씨는 어떤 씨앗일까? 어떤 모습으로 자랄까?

 집에 오자마자 허브 씨를 심을 곳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허브 씨를 심을 만한 곳이 없었다. 마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베란다에 그 흔한 화분이 한 개도 없었다. 엄마는 바쁘다며 화분 돌보는 일도 사치라고 했다.

 반짝반짝 빛나던 내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찾아 허브 씨를 담아두었다. 그리고 저녁에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녁 식탁에서 오늘 받아온 허브 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엄마, 선생님께서 허브 씨를 나누어 줬어.”

 “응.”

 엄마는 눈으로 스마트폰을 보며 대답했다.

 “그걸 심어야 한데.”

 “그래?”

 “그런데 우리 집에 화분이 없어.”

 “화분이 없어?”

 그제야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봤다.

 “응, 화분 하고 흙이 있어야 씨를 심지.”

 엄마는 눈을 위로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엄마가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나오는 행동이다.

 “얘는, 며칠 못 가서 내버려 둘 거면서. 그거 또 엄마가 다 뒤치다꺼리해야 하잖아. 귀찮아.”

 엄마는 딱 잘라 말했다. 엄마 입에서 귀찮다는 말이 나오면 끝나는 거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귀찮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되었다. 또 1년 전에는 보드게임을 하고 난 뒤 에도 그랬다.

 “아휴,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귀찮게 시리.”

 그 후로 절대로 보드게임을 하지 않았다. 작년 내 생일날 잡채를 만들고 나서도 그 말을 했다. 나는 엄마가 만든 잡채가 맛있었고 또 먹고 싶었지만 그 후로 엄마는 절대로 잡채를 하지 않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실오라기 같은 희망도 날아가 버렸다. 

 언젠가 엄마가 나를 돌보는 것도 귀찮다고 할까 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상자 안에 잠들어 있는 허브 씨가 눈에 아른거렸다.

 ‘다인이도 진우도 반 친구들 모두 허브 씨를 심었을 텐데, 나만 못 심겠네.’

 속이 상했다. 애써 감은 눈에 눈물이 고이려 했다. 저렇게 계속 두면 결국 씨가 말라서 아무것도 피우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갔다. 손에는 허브 씨가 들려 있었다.

 다행히 엄마는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종종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드는데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일거다. 전에 외할머니가 그랬었다.

 “네 엄마가 얼마나 겁쟁이였는지 아니? 어릴 때는 불도 못 끄게 했어. 심지어 자기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서 고생 좀 했지.”

 외할머니는 엄마가 된 게 신기하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서 나를 키우는 것도…….

 나는 집안 곳곳을 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화분이 없으면 어때? 그냥 심는 거지 뭐. 안 자라면 어쩔 수 없고.’

 보물을 숨기는 것처럼 한 개씩 심다 보니 재미가 났다. 그래서 한두 개만 심으려던 것을 몽땅 다 심어버렸다. 씨앗을 다 심고 나니 그제야 잠이 왔다. 

 꿈속에서 집안 곳곳에 허브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걸 보았다. 푸른 싹들이 계속해서 돋아났다. 예쁜 꽃을 피우는 허브도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디선가 싹둑싹둑 소리가 들렸다.

 “아휴, 웬 풀이야.”

 엄마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가위로 허브를 잘라 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엄마 왜 그래? 내가 심은 거야!”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계속해서 허브를 잘랐다.

 “아휴, 쓸데없어! 귀찮을 뿐이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울면서 잠에서 깼다. 허브가 자라면 엄마가 분명히 잘라낼지도 모른다. 엄마가 미웠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주말 동안 허브 씨 심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친구는 허브 씨를 시골 할머니네 가져다 심었다고 했다.

 ‘나도 외갓집에 가져가 심을걸.’

 하지만 엄마는 바쁘다며 외갓집에 가지 않을게 분명했다. 정말 엄마는 바빴다. 주말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내 숙제는 꼼꼼히 봐줬다. 내 숙제 봐주는 건 귀찮지 않은 모양이다. 이건 좀 귀찮아해도 되는데…….

 며칠 집안은 조용했다. 엄마가 말하는 귀찮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바빴고 나는 나대로 바빴다. 이번 달부터 학원이 한 개 추가되어 숙제가 늘었다.

 나는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었는데 엄마는 수학학원을 새롭게 등록시켰다. 내 꿈은 웹툰 작가지만 엄마는 내가 변호사나 회계사가 되기를 바랐으니까.

 내 허브 씨 들도 잠잠했다. 친구들은 벌써 싹이 났다고 하는데 내가 심은 씨앗들은 전혀 소식이 없었다.

 ‘다 죽었나 봐. 물이라도 줄걸.’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속이 상했다. 그래도 한 개쯤은 나올 줄 알았는데…….

 그 뒤로 허브 씨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새 웹툰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정아, 밥 먹자.”

 나는 후다닥 공책을 덮었다. 엄마가 힐끔 쳐다보았지만 다행히 묻지는 않았다.

 저녁 메뉴는 카레였다. 엄마가 종종 해주는 메뉴다. 한번 하면 냄비 가득 만든 뒤 3일 동안 먹을 때도 있었다.

 엄마가 카레를 먹으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카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네.”

 나는 카레를 듬뿍 떠서 코끝에 가져와 냄새를 맡았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이상한 냄새 안 나는데.”

 “그래? 풀냄새 같은 거 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진 않네.”

 엄마는 다시 카레를 입안에 떠 넣었다. 저녁 식탁에선 항상 피곤한 얼굴이었는데 오늘따라 표정이 밝아 보였다.

 “저녁 다 먹고 엄마랑 산책이나 갈까?”

 엄마의 입에서 산책이라니! 저녁 식사 후가 엄마가 제일 바쁜 시간이었다. 밀린 집안일도 밀린 회사일도 해야 했으니까. 내가 머뭇거리자 엄마가 다시 물었다.

 “왜? 할 거 많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산책이나 가자.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네!”

 엄마랑 나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어둠이 살포시 내려앉았지만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봄이었다. 이제 막 싹을 틔운 나무에서 꽃봉오리들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와 오랜만에 산책이라 기분이 좋았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러자 엄마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유정이 기분이 좋아 보이네. 자주 나와야 하는데……. 엄마가 미안.”

 나는 더 크게 콧노래를 부르며 엄마 옆에 바짝 다가갔다. 그런데 엄마 곁에서 상쾌한 풀냄새가 났다. 

 “엄마, 엄마한테서 풀냄새가 나!”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아까부터 계속 나더라니까. 왜 그러지?”

 엄마가 코를 킁킁거리며 몸을 들썩였다. 

 “괜찮아, 엄청 좋은 냄새야!”

 내가 말하자 엄마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전에 허브 씨를 심었을 때였다. 나는 제일 먼저 허브 씨를 자고 있는 엄마의 가슴속에 심었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 허브 씨가 싹을 틔운 것이다! 

 8시가 되자 공원 울타리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전구들이 빛났다. 하늘에 있는 별들을 그대로 내려놓은 것 같았다.

 “어머! 너무 예쁘다.”

 엄마가 말할 때마다 허브 냄새가 났다. 이 허브는 분명히 사람 마음을 기분 좋게 하는 허브겠지?

 나는 공원에 피어난 별빛들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엄마가 부디 가슴속에 있는 허브를 잘 키워서 꽃을 피우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손에서도 허브향기가 났다. 상큼하면서도 달콤했다. 그날 마지막 씨앗을 손에 꼭 쥐고 잠들었던 게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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