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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센티 Jan 05. 2022

매일의 동화 13

모으기만 하는 준서

 모으기만 하는 준서가 있어.

  준서는 정말 보드가 갖고 싶었어. 왜냐하면 채연 이가 롱보드 타는 연예인을 멋있다고 했거든.

 롱보드쯤이야 금방 배울 것 같았지만 문제는 보드가 없다는 거였지. 그래서 엄마한테 부탁했어. 생일 선물로 롱보드를 사달라고. 이번만큼은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갖고 싶다고 말이야. 유치하지만 새끼손가락까지 걸었지.

 하지만 생일날 선물로 받은 게 무엇인지 알아? 바로 커다란 상자에 담긴 역사 전집과 과학 전집이었어. 베스트셀러라나 뭐라나?

 준서는 정말 실망했어. 아마도 그렇게 실망한 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도록 처음이었을 거야. 준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를 내는 준서에게 엄마는 이런 말을 했지.

 “네가 이 책을 다 읽는다면 보드를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될 거야!”

 멋진 어른? 엄마는 정말 뭘 모르는 것 같아.

 “멋지다는 말은 롱보드를 타고 공원을 신나게 누빌 때나 쓰는 말이야!”

 준서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 그런 대답을 했다가는 몇 달을 시달릴지 모르니까. 공원에서 멋지게 보드를 타고 채연 이의 환호를 받는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어.


 방으로 들어온 준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 그래서 책상에 올려져 있는 상자를 끌어내렸어. 책이 쏟아지고 나뒹굴었지만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어. 

 그때 널브러져 있는 책들 사이로 무언가 보였어. 손바닥만 한 파란색 종이, 그건 설명서도 아니고 광고지도 아니었지. 그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어.

 “이 상자에 당신의 성공을 모으세요. 100까지 모은다면 당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처음엔 누군가의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엄마의 말이 떠올랐지.

 “네가 이 책을 다 읽는다면 보드를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될 거야!”

 준서는 골똘히 생각했어. 

 ‘저 책을 다 읽느니 이 종이를 속는 샘 치고 믿어봐야겠어.’

 준서는 책꽂이에서 미로 찾기 책을 꺼냈어. 마지막 페이지를 완성하지 못했었거든. 준서는 열심히 집중해서 미로 찾기를 완성했어. 그동안은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쉽게 풀렸어. 준서는 기분 좋게 상자를 보았어. 하지만 상자는 아까처럼 텅텅 빈 채로 준서를 바라보고 있었지.

 다음엔 책상 한구석에 며칠째 자리 잡고 있던 나노 블록을 맞추기로 했어. 승진 이와 같이 한 개씩 샀는데 승진 이는 진작 다 맞추었다고 했었거든. 준서는 설명서를 보고 한 개씩 맞추어 나갔어. 손톱만 한 블록이 한 개씩 쌓일 때마다 영웅의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어. 한 30분쯤 흘렀을까 준서는 영웅의 모습을 완성했어. 귀찮게만 느껴졌는데 맞춰보니 제법 재밌더라고. 준서는 다시 상자를 보았어. 전혀 변화가 없어 보였어.

 준서는 마지막으로 다른 것을 해보기로 했어. 상자 안에 나온 파란 쪽지가 진짜이기를 바랐거든.

 준서는 내일로 미루려 했던 영어 인터넷 강의를 들었어. 단원 테스트를 하는 날이었거든. 평소 같으면 대충 들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아주 집중을 했어. 어렵기만 했던 영어들이 귀에 쏙 쏙 들어오는 것 같았어. 그래서인지 단원 테스트도 9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지 뭐야. 여태 받은 것 중에 가장 높은 점수였지.

 준서는 재빨리 상자 안을 보았어. 역시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야. 

 “에잇! 그럼 그렇지.”

 혼자서 투덜대고 있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어. 아마도 엄마는 널브러져 있는 책을 지적하고 싶었을 거야. 아니면 책상에 자리 잡고 있는 나노 블록이나 미로 찾기 책을 보며 잔소리를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컴퓨터 화면에 떠있는 영어 테스트의 결과를 보더니 금세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을 했어.

 “어머! 90점이나 받았어? 잘했어. 그것 봐, 하면 된다니까.”

 엄마의 칭찬을 들으니 준서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어.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바로 눈앞에서 엄마의 칭찬들이 떠다니는 거야. 준서는 무언가에 홀린 듯 약간 반투명처럼 비치는 그 글자들을 손으로 잡았어.

 “엄마, 이것 봐!”

 “뭘 보라는 거야?”

 엄마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

 엄마가 방을 나간 뒤에 준서는 그 글자들을 상자에 넣었어. 그러자 상자 바닥이 아주 조금 파랗게 물들었어. 그리고 상장 안쪽에는 검은색 눈금 하나와 “1”이라는 숫자가 나타났지.

 준서는 생각했어.

 ‘이런 게 성공이구나!’

 준서는 기분이 좋아졌어.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실천만 하면 되는 거잖아?

 공원에서 멋지게 롱보드를 타는 모습이 그려졌어. 그 옆에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채연이의 모습도.

 ‘좋았어! 이런 성공이라면 금방 모을 수 있을 거야!’

 그날부터 준서의 성공 모으기가 시작되었던 거야.


  “어머, 준서 너 또 만점 받았다며?”

 “아유, 준서 엄마는 정말 좋겠다.”

 “준서야. 우리 은지 랑 친하게 지내렴. 같이 공부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동네 아줌마들의 칭찬이 쏟아졌어. 여기저기 글자들이 떠올랐지. 준서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그 칭찬들을 재빨리 손으로 잡았어. 그리고 주머니에 두 손을 꼭 집어넣었어.

 그래서 저 멀리 반갑게 손을 흔드는 채연 이에게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어. 채연 이가 살짝 토라진 것 같지만 뭐 어쩌겠어. 성공을 놓쳐버리면 안 되니까.

 준서는 현관 앞에서 엄마를 크게 불렀어. 손을 쓸 수 없으니 비밀 번호도 못 누르고 발로 현관문을 찼지. 준서의 엄마가 급하게 문을 열었어.

 “아휴, 얘는 번호 누르고 오라니까.”

 “엄마, 나 지금 아주 중요한 것을 손에 쥐고 왔단 말이야. 놓치면 어떡해!”

 엄마는 금세 미소를 지었어. 

 “그래, 알았어. 방금 은지 엄마랑 통화했는데 너 또 만점 맞아다며? 잘했어 우리 아들. 저녁에 뭐해줄까?”

 엄마의 입에선 칭찬이 흘러나왔어. 

 ‘왜 하필 지금 칭찬을 하고 난리 람. 더 이상 잡을손도 없는데…….’

 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어.

 “잠깐만!”

 준서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책상 밑 커다란 상자 뚜껑을 발가락으로 걷어냈어. 주머니에서 오늘 모은 성공들이 상자 안으로 쏟아졌어.

 상자 안이 파란색으로 물들면서 90이라는 숫자가 나타났어.

 “앗싸! 이제 10 남았다.”

 준서는 소리를 지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어. 

 ‘다음 달에 있는 학원들 시험까지 잘 보면 다 모을 수 있겠는데?’

 준서의 얼굴에 만족감이 차올랐어.

 그러다 아까 토라진 채연 이가 떠올랐어.

 채연 이는 준서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어. 비밀 상자에 성공을 모으고 있고, 다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준서는 이런 말도 했어.

 “성공을 다 모으면 너에게 멋진 걸 보여줄게.”

 준서는 채연 이에게 메시지를 보냈어.

「김채연, 뭐하냐?」

「…….」

「아까는 성공이 주머니에 있어서 인사 못했어. 화난 거 아니지?」

「…….」

 평소 같으면 바로 답장이 올 텐데 핸드폰은 한참이나 잠잠했어.


 준서는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어.

 신호가 한참 간 후에야 채연 이가 전화를 받았지. 

 “야! 김채연, 너 왜 답장 안 해?”

 “뭐? 다짜고짜 무슨 말이야?”

 수화기 너머 채연 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어.

 “내가 계속 문자 했는데 답도 없고. 아까 인사 안 받아줘서 화난 거 아니야?”

 준서의 목소리가 점점 더 올라갔어.

 “나 지금 얘기하느라 몰랐거든. 그리고 너야 말로 공부하느라 내 문자에 바로 답 안 하잖아. 약속도 어기고. 오늘 우리 조별 모임 있는 거 또 잊었지?”

이번에는 채연 이의 목소리가 화 나 있는 것 같았어. 그 말에 준서는 멈칫했어. 오늘 조별 모임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거든.

채연이, 승진이, 서진 이와 같은 조가 되었다고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동안 조별 모임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게 생각났어. 시험공부하느라 바빴거든.

 한 달 전, 선생님은 ‘멋진 이웃’이라는 글자를 칠판에 커다랗게 적었어.

 “이번 조별 모임 과제는 멋진 이웃에 대해 알아보는 거예요.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과제이니까 열심히 해보도록 해요.”

 ‘멋진 이웃?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라는 건가?’

 준서는 속으로 생각했어. 

 “우리 소방관 아저씨에 대해 알아보는 건 어때? 지난번 뉴스에서 봤는데 화재를 진화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더라.”

 승진이가 먼저 의견을 냈어.

 “난 우리 상가 문구점 할머니를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채연 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어. 준서는 놀라서 채연 이를 바라봤어. 우리 상가의 문구점 할머니라면 만날 같은 옷을 입고 허리가 구부러진, 눈도 잘 안 보여서 계산도 잘 틀리는 그런 할머니 엇거든. 

 “에이, 그건 아니다!”

 서진이가 한마디 하자 채연 이가 다시 말을 이었어.

 “아니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그 할머니 진짜 멋지신 분 이래. 평생을 아껴서 모은 전 재산을 꿈터 대학교에 기부하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돈으로 꿈터대학교 꿈터홀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진짜? 와, 대단하다. 나 꿈터홀에서 열리는 공연 몇 번 보러 갔었는데.”

 승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어. 

 “그럼 우리 그 할머니에 대해 알아보자!”

 서진이도 맞장구를 쳤어. 

 준서는 생각했어. 

 ‘그게 멋진 거야?’

 하지만 준서는 말하지 않았어. 머릿속엔 내일 볼 시험 문제들로 꽉 차 있었거든. 그리고 어차피 이 과제는 중요한 시험이 아니었으니까.

 

 준서는 재빨리 외투를 걸치고 방을 나섰어. 지금이라도 가면 많이 늦지는 않을 것 같았거든. 현관문을 막 나서려는데 엄마가 준서를 불렀어.

 “아들, 어디가?”

 “엄마, 나 조별 숙제 있어. 빨리 가야 해.”

 엄마는 재빨리 준서의 어깨를 잡았어.

 “조별 모임은 다음에 가고 엄마가 말했던 홀리 어학원 알지? 거기에서 전화 왔어. 오늘 테스트 스케줄 잡혔데. 통과하면 다음 주부터 바로 다닐 수 있을 거야.”

 홀리 어학원이라면 수제들만 간다는 유명한 어학원이야. 들어가기도 힘들뿐더러 학원비가 무척 비싸기도 하지. 하지만 엄마는 그 어학원에 준서를 보내고 싶어 했어. 준서가 멋진 어른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준서는 마음이 흔들렸어. 만약 홀리 어학원에 다니게 된다면 다음 달 학원 시험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거든. 홀리 어학원의 가방을 메고 다니면 여기저기 칭찬이 쏟아질게 뻔하니까.

 준서는 결국 엄마의 차를 탔어. 차에 올라타서 채연 이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열었는데 채연 이의 문자가 와 있었어.

 “이번엔 꼭 올 수 있지?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애들 화 많이 났어. 그동안 조별 모임도 제대로 참석 안 하고 네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말이야.”

 준서는 채연이의 문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오늘도 약속을 어긴다면 친구들하고 완전히 멀어질 것 같았거든. 왕따가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엄마가 시동을 켜기도 전에 준서는 차문을 열고 내렸어. 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엄마에게 준서는 소리쳤어.

 “엄마,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게.”

 준서는 조별 모임이 있는 채연 이의 집으로 뛰어갔어. 가서 자신의 상황을 친구들에게 설명하기로. 그러면 친구들에게 미움도 안 받고 홀리 어학원의 테스트도 받을 수 있으니까. 

 벨을 누르니 채연 이가 반갑게 맞이해 줬어. 승진 이와 서진이도 준서를 맞이해 주었지. 서진이의 표정이 조금 쀼루퉁했지만 준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나 금방 가 봐야 해. 오늘 홀리 어학원 테스트가 있는 날이거든. 미안, 다음번에는 꼭 약속 지킬게.”

 갑자기 친구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서진이가 큰 소리를 냈어.

 “야, 박준서!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준서는 당황했어.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고 홀리 어학원 테스트라면 이해할 줄 알았거든.

 “내가 뭐가 너무해? 사정이 있다잖아. 미안하다고도 했고. 홀리 학원의…….”

 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진이가 따발총처럼 말을 쏘아붙였어.

 “이거 조별 과제야.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그동안 우리가 이것저것 알아보는 동안 너 뭐했어? 아무것도 안 했잖아. 만날 공부한다고 빠지기나 하고.”

 채연 이와 승진 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서진 이와 같은 마음이란 게 느껴졌어. 준서는 화가 났어. 이깟 조별과제가 뭐라고…….

 “이게 뭐가 중요해? 난 더 중요한 것을 모으고 있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준서는 친구들에게 소리쳤어. 그때 채연 이가 한마디 했어.

 “준서야, 네가 모은다는 그것 때문에 요즘 너 정말 이상해. 그게 그렇게 중요해? 다 모으면 뭐 할 건데?”

 준서는 멈칫했어. 

 분명히 롱보드를 갖기 위해서 모으기 시작했는데, 롱보드는 이미 지난 학기 시험에 만점 받은 기념으로 받았거든. 얼마 타지도 않고 베란다에 처박아 두었지만 말이야. 

 준서는 현관에 선 채로 돌이 되어 갔어. 친구들의 눈빛이 메두사의 머리카락 같았지.

 한참을 멍하니 서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그랬어?”

 홀리 어학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 엄마는 준서를 흘끗 돌아보며 차갑게 말을 했어. 

 테스트 결과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야. 

 “…….”

 “어쨌든 결과는 저녁에 알려준다니까 조금 기다려보자.”

 엄마는 준서가 앉은 쪽의 창문을 내리면서 말을 했어. 준서의 눈에 멀리 있는 우리 상가의 간판이 들어왔어. 준서는 채연이의 말이 떠올랐어.

 “엄마, 우리 문구 주인 할머니 알지?”

 “.......”

 “그 할머니가 평생 모은 돈을 꿈터 대학교에 기부했다고 하더라고. 그럼 멋지게 성공한 거야?”

 “응? 무슨 그런 소리를 하니?”

 때마침 걸린 빨간 신호등 때문에 엄마가 차를 멈추고 준서를 바라보았어.

 “그럼 멋지게 성공한 건 어떤 거야?”

 준서는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았어.

 “누가 봐도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직업을 갖는 거 아닐까?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엄마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

 “걱정하지 마. 준서는 멋지게 성공한 어른이 될 거야.”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어. 엄마가 말했던 멋지게 성공한 어른이 생각한 것보다 멋지지 않은 것 같았거든.

 

 저녁을 먹는데 홀리 어학원에서 전화가 왔어. 

 “준서 너 테스트 통과했데! 다음 주부터 학원에 다닐 수 있다고 하네. 아유, 기뻐라! 잘했어 아들.”

 엄마는 아주 기뻐하며 칭찬을 쏟아 내었어. 눈앞에서 칭찬들이 떠다녔어. 하지만 준서는 그 칭찬들을 잡지 않았어. 대신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어.

 밖에서 엄마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어. 아마도 준서의 테스트 결과를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고 있나 봐.

 준서는 책상 밑에 있는 상자를 열었어. 아직도 눈금은 90이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지. 준서는 한참이나 상자를 바라보다 발로 툭툭 상자를 건드렸어. 90이라는 숫자가 무색할 만큼 상자는 가벼웠고 준서의 발놀림에 따라 쉽게 움직였어. 준서의 더 세 개 상자를 쳤어. 그러다 실수로 상자를 엎어 버린 거야!

 글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 준서가 모은 성공들이 말이야. 성공들은 방안을 맴돌더니 열어놓은 창밖으로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어. 

 “어, 안되는데! 안되는데. 조금만 모으면 되는데…….”

 준서가 채 손 쓰기 전에 성공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렸어.  

 그런데 이상하지? 준서의 성공들이 창밖을 빠져나가자 무겁기만 했던 준서의 마음들이 가벼워지기 시작한 거야. 그리고 비어있던 마음들이 왠지 모를 설렘으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어. 준서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어. 파랗게 물들었던 상자는 원래의 누런 종이 색으로 돌아와 특유의 꼬릿 내를 풍겼어.

 준서가 그 상자를 버렸냐고? 아니. 준서의 상자는 다시 책상 밑으로 들어가 있어. 준서는 새로운 성공을 모으기로 했거든. 그런데 아직도 어떤 것을  할지 정하지 못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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