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by 안순나

사람의 마음에도 계절이 있다.

봄의 설렘, 여름의 격렬함, 가을의 서늘함, 겨울의 고요함.

그 속에서 피고 지는 수많은 인연이 있다.

어떤 인연은 짧아 찬란하고, 어떤 인연은 길어 무겁다.

그러나 모두가 한 시절을 함께한 인연,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부를 수 있겠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닿는 사람이 있다.

낯선 얼굴인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편안하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그런 순간이면 세상이 잠시 멈춘 듯,

삶이 조용히 빛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인연이 오래 머무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바람의 방향도 달라지듯,

사람의 마음 역시 흐른다.

시절이 지나면 인연도 흩어진다.

떠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 또한 자연의 질서이므로.


돌이켜보면 내 삶은 수많은 시절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새벽 수영장에서 스쳐 지나던 얼굴들,

커피잔을 건네며 미소 지어주던 바리스타,

도서관 창가에서 함께 햇살을 나누던 낯선 독서가들.

그들은 이름보다 온도로 기억된다.

짧은 인사와 눈짓, 순간의 웃음이 남긴 잔향은

세월이 흘러도 따뜻하다.


인연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로 남는다.

짧더라도 진심이 닿았던 순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깊다.

그것을 나는 인연의 신비라 부른다.


한때는 어떤 사람을 ‘운명’이라 믿었다.

함께 걷던 길 위에서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고,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며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별빛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말의 결이 달라지고, 눈빛이 흐려질 때쯤

나는 이별의 예감을 느꼈다.


그때는 아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알았다.

그 이별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깨우는 일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부재는 내 안의 빈자리를 환하게 밝힌다.

그 자리에 새로운 숨이 들어오고,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지금 나는 요양보호사로 살아간다.

돌봄의 현장은 매일 인연과 이별이 교차하는 자리다.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얼굴 속에는 세월이 응축되어 있다.

젊은 날의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침묵에 잠기고,

눈빛이 멀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 나는 조용히 손을 잡는다.

말보다 온도가 먼저 닿는다.

그 짧은 온기 속에서도 인연이 피어난다.


하루의 시간은 짧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는다.

돌봄이란 결국 ‘함께 있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매일 배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내 삶을 단단하게 지탱한다.


이제 나는 인연에 유통기한을 두지 않는다.

스쳐도 인연이고, 오래 머물러도 인연이다.

중요한 것은 머무름의 길이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닿았던 순간의 진실함이다.

그 한순간의 따뜻함이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어떤 인연은 나를 울리고, 또 다른 인연은 나를 웃긴다.

그러나 그 모든 인연이 모여 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나는 오늘도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

누군가가 문득 내 삶의 다음 시절로 걸어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은 긴 여정이다.

사람은 그 여정에서 스쳐가는 행인들이다.

누군가는 잠시 머물다 떠나고,

누군가는 끝까지 함께 걷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머무른 시간이다.

그 진심이 있었기에 이별조차 고맙다.

이별이 없다면 만남의 귀함도 모를 테니까.


새벽 수영을 마친 후, 창가의 커피잔을 앞에 두고

지난 시절의 인연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혹시 나처럼 그 시절을 가만히 그리워하고 있을까.


문득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시절인연은 그렇게 흐른다.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지만

그 흔적은 내 삶의 결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결을 따라

조용히 미소 짓는다.

언젠가 또 다른 시절이 오고,

그때의 인연이 나를 다시 부드럽게 비추어주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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