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청소를 마치고

by 안순나

냉장고 속 유통기한, 약병 속 유효기간, 그리고 인간관계의 여정


냉장고 문을 열면, 시간의 냄새가 난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김치의 숙성된 향기, 뚜껑이 살짝 열린 반찬통, 그리고 언젠가 사두고 잊힌 소스병들. 그 사이에 희미하게 찍힌 날짜들이 있다. “2024.11.03.”, “2025.01.15.”. 나는 그 숫자를 바라보며 잠시 멈춘다. 이것은 단순한 유통기한이 아니다. 시간을 기록한 증표이며, 변질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표식이다.


냉장고 속 음식들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힘을 잃는다. 채소는 물기를 잃고 시들며, 반찬은 맛을 잃어 상하게 된다. 오래된 소스들은 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소스는 보존되지 않는다. 설사 뚜껑을 단단히 닫아 두었다 하더라도, 공기와 미생물, 그리고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 인간이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결국 소멸의 법칙 앞에서는 한낱 방어에 불과하다.


냉장고 문을 닫으며 나는 생각한다. 인간관계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어떤 인연은 상온에서 오래도록 견딜 수 있지만, 어떤 관계는 단 한 번의 오해에도 금세 변질된다. 인간의 마음은 냉장고 속 음식과 다르지 않다. 관리하지 않으면 곰팡이 핀 반찬처럼 삐걱거리며 시들고, 때로는 독이 되어 되돌아온다.


그러나 삶은 단순히 상실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냉장고 청소를 하는 순간, 나는 지난 시간의 잔해들을 정리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버리며, 더 이상 필요 없는 관계, 이미 끝난 대화, 무의미하게 쌓아둔 기억을 마음속에서도 비운다. 이것은 청소이자 정리이자, 살아 있는 현재를 위한 준비다. 깨끗한 냉장고처럼, 마음도 정돈되어야 한다.


중년이 되면서 나는 또 다른 유통기한을 마주한다. 바로 약병 속의 유효기간이다. 복용 중인 약이나 비상용으로 집에 두었던 진통제, 영양제, 혈압약, 그리고 가끔 가족에게 남겨둔 약까지. 약의 유효기간은 식품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약물은 제조일로부터 2~5년 사이에 정해진 기간 내에서만 효능을 발휘한다. 지나간 약은 복용해도 효능이 떨어지거나, 경우에 따라 화학적 성분이 변형되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나는 약병을 정리하며, 이것이 단순히 안전을 위한 행위가 아님을 깨닫는다. 약에도, 음식에도, 관계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중년이 되어 알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하고, 아무리 애써도 영원히 보관할 수 없다는 진리다. 냉장고 속 음식, 약병 속 약, 그리고 인간의 마음. 모두 적절한 온도와 관리가 필요하며, 지나치면 상하고, 너무 오래 두면 쓸모가 사라진다.


냉장고에서 채소를 꺼내며, 나는 삶을 본다. 상추, 시금치, 브로콜리. 싱싱한 상태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잎이 축 늘어지고 색이 바랜다. 사람도 그렇다. 처음 만났을 때의 반짝임과 신선함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적절히 관리하고, 서로의 마음을 새롭게 다듬으며 교류하면, 관계는 냉장고 속 신선한 채소처럼 오래도록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약병의 유통기한을 확인하며,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도 관리가 필요하다. 중년이 되면 체력과 면역력이 예전 같지 않고, 정신적 여유도 줄어든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와 피로가 쌓이고, 결국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식과 약, 그리고 관계 모두 ‘시간과 관리’가 필요하다. 청결, 주의, 정리. 그것이 곧 삶의 철학이 된다.


냉장고 속 소스병을 바라보며, 나는 인간관계의 한계를 이해한다. 소스는 보관되지 않는다. 오래된 원한, 반복되는 갈등, 쌓인 오해. 아무리 덮어두고, 냉장 보관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들은 상하고 맛을 잃는다. 인간과의 유효기간 역시 마찬가지다. 관계를 지속하려면, 신선하게 유지할 마음과 행동이 필요하다.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를 배려하며, 정직하게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면 유효기간이 지난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냉장고 청소의 순간을 떠올린다. 상한 음식은 버린다. 냉장고 안에서 곰팡이가 피고 냄새가 나는 음식은 더 이상 아무 쓸모가 없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소통할 수 없고, 마음이 상하는 관계는 정리해야 한다. 단, 버림은 단순한 절단이 아니다. 지난 시간을 기록하고, 감사와 이해를 담아 놓는 일이다. 버리면서도 존중하는 마음. 그것이 중년 이후의 삶에서 관계를 다루는 방식이다.


나는 냉장고 속 과거의 반찬들을 정리하며, 삶의 패턴을 본다. 매년, 매달, 매주 반복되는 청소와 점검은 나를 살아있게 한다. 음식이 변질되면 버리고, 약이 지나가면 폐기하며, 관계가 유통기한을 다하면 마음속에서 정리한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효용을 갖고, 결국 흘러가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바로 실용적인 철학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냉장고 문을 닫는다. 깨끗하게 정리된 선반 위에는, 오늘 준비한 식재료와 약이 조용히 자리한다. 남은 시간 동안 먹을 음식, 복용할 약, 소중히 가꿀 인간관계가 있다. 모든 것은 유효기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유효기간이 있다는 사실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냉장고 속 유통기한, 약병 속 유효기간, 인간관계의 여정.

각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선택한다. 지킬 것과 놓아줄 것, 새롭게 보존할 것과 버릴 것. 삶은 끝없는 정리와 관리, 그리고 사유의 반복이다. 그것을 실천하며, 나는 중년의 하루를 살아간다.


모든 것은 유효하다. 단, 적절히 다루어질 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