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퀸즐랜드 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
당시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세컨잡을 구하거나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아예 새로운 일을 구하거나. 처음엔 주 35시간이던 쉬프트가 15시간까지 줄어든 까닭이었다. 처음 일을 구할 때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던 나로서는 시티에서 세컨잡을 구할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주 15시간만 일해서는 방세를 내면 남는 게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하루 종일 워홀 관련 유튜브나 블로그만 이 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농장 일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호주에 올 때만 해도 농장 일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조금 늦은 나이에 워홀을 온 탓에 1년만 하고 오자는 생각으로 세컨 비자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자에 대한 설명을 잠깐 하자면 호주 워홀 비자는 1년씩 갱신되어 최대 3년까지 갱신이 가능하다. 갱신하는 방법은 특정 지역, 특정 직업군에서 특정 기간 이상 일하면 비자를 갱신받을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통 시골지역에서 농장 일을 3달 정도 하면 세컨 비자(Second visa)를 받을 수 있다. 많은 워홀러가 시골에서 농장 일을 구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써드 비자(Third visa)를 받으려면 6개월 정도 일해야 된다.)
때문에 세컨이나 써드 생각이 없는 워홀러는 굳이 시골까지 가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시 나는 시드니 생활을 하며 내가 원했던 워홀 생활이 이게 맞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일터에도 집에도 또래가 없어 친구 한 명 못 사귀고 매일 일, 집만 반복하며 살다 보니 하는 일만 다를 뿐 한국에 있을 때와 다들 바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나에겐 변화가 간절했다.
워홀 후기들을 찾아봤을 때 시티 생활에 지쳐 시골 백패커스로 갔을 때 친구도 많이 사귀고 좋았다는 후기를 많이 봤었다. 하지만 농장 일이 너무 힘들 것 같아 고려하지 않던 선택지였기에 고민이 됐다. 또 시골에 가려면 지역이동을 멀리 해야 되는데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숙소나 잡 컨디션이 별로일 경우 큰 낭패다.
하지만 시드니에 큰 미련이 남지 않았던 나는 3달간의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지역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내가 찾던 조건은 세 가지였다.
실내에서 팩킹만 하는 팩킹 잡 일 것, 숙소에서 일터까지 차량 픽업 서비스가 있을 것, 숙소 컨디션을 사진 등으로 미리 확인할 수 있을 것. 이 조건들을 바탕으로 구인공고를 찾아보았다.
보통 이런 시골 팩패커스들은 컨트랙터가 페이스북이나 웹사이트에 구인공고를 올린다. 컨트랙터는 백패커스나 쉐어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인력을 농장에 연계시켜 주는 사람을 말한다. 백패커스에서 지내면 좋은 점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기가 쉽고, 보통 차량 픽업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시골 지역이어도 따로 차를 구할 필요가 없고, 혹시 일하던 농장에서 해고당할 경우 바로 다른 농장으로 연계시켜 주기 때문에 구직에 대한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비양심적인 컨트랙터들, 특히 한인사이트에 공고를 올리는 한인 컨트랙터들은 피하는 게 좋다. 시간제가 아닌 능력제(일한 만큼 준다고 하지만 대부분 최저임금에 못 미친다)인 경우가 많고 숙소 컨디션이 최악인 경우도 있다. 궁금하다면 유튜브에 검색해 보면 생생한 후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인사이트는 제외하고 페이스북이나 Backpacker Job Board(https://www.backpackerjobboard.com.au/)라는 사이트를 위주로 찾아보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 얼마 안 가 내가 찾던 조건에 부합하는 공지를 발견하고 문의해서 바로 일을 구할 수 있었다.(보통 농장 일은 따로 면접 과정이 없이 선착순에 가깝다) 그 길로 바로 비행기를 예매하고 시드니 생활을 정리했다.
시드니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허허벌판인 작은 공항에 착륙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언제 착륙하나 눈을 뜨고 보면서도, 광활한 허허벌판에 점점 지면이 가까워지는 걸 보며 눈을 의심하다 불시에 착륙하였다. 국내선만 다니는 작고 예쁜 공항엔 출발하는 사람과 도착하는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사람이 바글거렸다. 퀸즐랜드의 첫인상은 '와, 덥다!'였다.
남반구인 호주는 우리와 계절이 반대다. 6월 초 겨울에 접어든 시드니는 제법 추워 후드를 꺼내 입고 밤엔 전기장판이 필요했다. 다른 외국 주택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호주 주택은 유난히 실내가 춥다. 방 안에 있으면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데 밖에 나가면 그렇게 춥지 않아 집순이로서 억울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또 호주는 한국과 반대로 남극에 가까운 남쪽이 춥고 적도에 가까운 북쪽이 따뜻하다. 대표적인 남쪽 도시인 멜버른(Melbourne) 겨울은 춥기로 유명하고 북쪽인 퀸즐랜드(QLD) 여름은 덥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반대로 멜버른 여름과 퀸즐랜드 겨울은 엄청 덥거나 춥지 않다. 이 점을 활용해 워홀 지역을 선택하면 온화한 사계절을 맛볼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겨울엔 퀸즐랜드, 여름엔 멜버른으로 지역이동을 해 온화한 사계절을 즐겼다.
하나 재밌는 점은 퀸즐랜드 주 동쪽 해안가 지역이라면 시드니와 위도가 같아 시차가 없다. 하지만 썸머타임이 적용되면 한 시간의 시차가 생긴다. 썸머타임이란 여름에 해가 빨리 뜨니 시간을 한 시간 당겨서 생활하는 제도인데 시드니가 있는 뉴사우스웨일스 주(NSW)는 썸머타임을 적용하고 퀸즐랜드 주는 적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드니와 퀸즐랜드 주 사이에 한 시간 시차가 생긴다. 그래서 썸머타임이 적용되는 때에 퀸즐랜드에서 시드니를 놀러 가면 갈 때는 2시간 20분이 걸리고 올 때는 20분 만에 도착하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이걸 몰랐어서 여행 계획을 하며 비행기 표를 예약할 때 이해가 가질 않아 한참을 찾아봤었다.)
아무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퀸즐랜드 주의 따뜻한 겨울을 맛보게 된 나는 바로 화장실로 가 입고 온 후드를 반팔로 갈아입었다. 컨트랙터가 보낸 낡은 밴이 공항까지 데리러 왔고 나를 포함해 4명을 픽업해 갔다.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 본 것처럼 도로 양옆으로는 그저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때 창밖을 보다 보면 소나 말 같은 동물은 쉽게 볼 수 있고 가끔 왈라비나 캥거루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 이게 진짜 호주구나!' 도시 생활에선 볼 수 없었던 호주가 펼쳐졌다. 가도 가도 일직선 도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작고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이름은 보웬(Bowen)이라는 지역으로, 에일리 비치(Airlie Beach)와 타운즈빌(Townsville)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바다가 아름답고 겨우내 기온이 온화하다. 작물로는 겨울엔 캡시캄, 토마토, 여름엔 망고로 유명하다.
도착 후 컨트랙터와 만나 숙소 이용 주의사항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간단한 대면을 마치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살게 될 쉐어하우스를 보러 갔다. 너무 떨렸다. 이곳에 오기 전 컨트랙터에게 확인한 건 두 가지였다. 숙소 컨디션과 잡 컨디션. 몇 인실인지, 렌트비는 얼마인지, 사진 몇 장까지 받아보긴 했지만 걱정을 지울 순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별로면 어떡하지? 우버 서비스도 없는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한 시간 거리인데 대중교통도 없이 어떻게 가지?
혹시 몰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유튜브에서 보던 닭장쉐어부터 바퀴벌레나 배드버그가 가득한 그런 숙소까지. 그러나 마침내 마주한 나의 쉐어하우스는 너무 아늑하고 따뜻했다.
여러 명이 휴식을 취하기 충분한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방은 2층 침대 두 개로 가득 차는 정도였지만 공용공간이 넓어 생활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아 보였다. 유튜브에서 컨테이너를 개조한 식의 백패커스를 많이 봤던지라,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지는 쉐어하우스가 마음에 들었다.
당시 쉐어하우스엔 시즌 초반이지만 이미 열댓 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 대만,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세계각지에서 온 친구들이 각각 자기 나라 언어로 떠들어 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이 쉐어하우스의 가장 좋은 점은 바닷가가 걸어서 5분 거리라는 점이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운치 있는 바닷가가 있다니. 딱히 버킷리스트였던 적은 없지만 버킷리스트를 이룬 기분이었다. 사실 이 지역을 선택한 것도 바닷가 마을인 점이 컸다. 공고를 보고 생소한 지역 명에 구글 맵을 켜서 검색을 해보니 바닷가가 바로 근처에 있고 한식당까지 하나 있으니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구체적인 숙소 주소까진 알려주지 않아 바닷가와 가깝기만 바랐는데 정말 바닷가에서 5분 거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컨트랙터가 운영하는 쉐어하우스가 몇 군데 더 있었고 그중 우리 집이 유일하게 여성전용이며 바닷가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었다. 대신 다른 집들은 더 신축에 시설이 좋다는 사실도 알게 됐지만 그래도 난 우리 쉐어하우스가 좋았다. 낭만이 있지 않은가!
유명 관광지의 예쁜 해수욕장 느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바닷가다. 저마다 바닷가 앞 벤치에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떨기도 하고 바비큐 시설에서 바비큐를 구워 먹기도 한다.(호주는 공원이나 바닷가 등에 바비큐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낚시터엔 낚시꾼들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나는 영 취미가 없었지만 실제로 여기서 낚시를 해 잡은 생선으로 요리를 해 먹는 친구도 있었다.
가만히 벤치에 앉아 선선한 바람도 느껴보고 출렁이는 파도를 보며 멍을 때려도 좋다. 바다로 쭉 뻗어있는 낚시터 끝까지 걸어가 드넓게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역시 지구는 둥글다는 생각도 해보고 천천히 바닷가를 따라 거닐면 잠깐의 산책으로도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
특히 나는 노을 질 때즈음 하는 러닝을 좋아했다. 이곳에서 처음 러닝했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날씨는 선선했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해는 바다 반대편으로 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을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달렸다. 집에서부터 바다 쪽으로 꽤나 긴 거리로 뻗어있는 낚시터를 향해 힘차게 달렸다. 금세 어둑해진 바다가 눈에 들어왔고 열심히 숨을 고르며 낚시터 끝에 도달해 반환점을 돈 순간 펼쳐진 풍경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웠다.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과 쪽빛 하늘이 대비되었다. 낮에 그렇게 청량하던 바다는 검게 물들어가고 하늘엔 조각달이 떴다. 낮이 밤으로 스며드는 광경에 왠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풍경이 마음에 들어 같은 시간에 러닝을 했다. 매번 낚시터에서 반환점을 도는 순간을 기대하며. 그리고 그 기대는 언제나 충족되었다. 보웬의 하늘은 늘 그렇게 아름다웠다.
이 작은 시골 바닷가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밤이 되어 2층 침대에 올라가 몸을 눕혔다. 내 나이 스물아홉에 2층 침대 2개짜리 4인실이라니. 이 나이 먹고 대학교 기숙사 생활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2층 침대 써보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이루다니. 정말 인생 모를 일이다. 넓고 좋은 독방을 쓰다 2층 침대 한 구석에 쭈그리고 있으니 몸이 조금 배겼다. 그래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삐걱거리는 프레임과 스프링이 느껴지는 매트릭스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일을 기대하며.
*이 글은 2024년도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로 현재 해당 쉐어하우스는 컨트랙터가 매각한 상태로 운영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호주에서 일을 구하시는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