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군. 지겨운 인간 같으니!"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쉴 새 없이 진동하는 휴대폰을 노려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부재중 전화 여덟 통, 문자 메시지 열 한 통! 해도 너무 하는군. 남자는 액정 화면에 찍힌 단어들, '급히, 입금, 부탁, 내달 말, 제발, 좀, 마지막' 따위의 헛소리를 슬쩍 쳐다보기만 해도 부아가 치밀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아무리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이건 아니지 않나. 내가 우스운가?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돌보느라 심신이 너덜너덜해진데다 입원비며 치료비, 구급차 이용료, 요양 보호사 급여까지 각종 청구서에 시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주택담보대출은 또 어떻고.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뭐 돈을 빌려달라?
더욱 아니꼬운 점은, 남자의 중학교 동창이자(무려 40년 전의 일이다) 유일한 벗인 S가 무직 상태로 몇 해를 도박에 빠져 유령처럼 지낸 것도 모자라 아예 취업은 포기한 듯 하고,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는 주제에 무슨 철학 박사라도 된 것 마냥 우쭐댄다는 것이다. '먼지처럼 사라질 인생인데 아등바등 살 필요 없다'는 게 그의 잘나 빠진 신조였다. 해골바가지에 가죽만 씌어놓은 몰골로 남자를 찾아와서는 코를 훌쩍이며 신세한탄을 늘어놓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돈을 빌려가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갚기를 반복하며 미안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S의 뻔뻔한 태도에 남자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담판을 짓고 말리라. 섭섭했던 지난 날들과 어머니의 병환, 몹시 난처한 은행잔고, 답답한 심정, 불면증, 우울증, 남다른 의리 등등. 모두 털어 놓고 어떻게 나오나 두고봐야지. 남자는 친구가 자책하며 변제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모습을 마음 속에 은밀히 그려봤다. 눈물 한 방울이 더해진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 하지만 얼마나 고집이 센 인간인지 몰라. 배불뚝이 사내는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한숨을 내뱉기도 하고 때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기도 하면서 어영부영 근무 시간을 때웠다.
S가 살고 있는 빌라는 낡은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언덕 꼭대기에 흉물처럼 서 있었는데, 겉모습은 태풍에 부서진 잔해를 대충 이어 붙여놓은 것 같았고, 천년 동안 늪 속에 잠겨있었던 것처럼 썩은 진흙 냄새를 풍겼다.
남자는 질색하며 텅 빈 골목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쳐, 어느 집의 외등 불빛 아래로 얼른 뛰어들었다. 귀신도 이런 곳에 살면 야행성 공포증에 걸리고 말거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S의 집앞에 도착한 남자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이게 무슨 냄새야? 뭐가 썩고 있나?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스무 걸음 정도를 나아가자 드디어 익숙한 녹슨 현관문이 보였다. 뚱뚱한 남자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 뒤 벽에 매달린 초인종을 꾹 눌렀다.
“어서 와, 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S가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어… 그, 그래. 별일 없고?”
당황해서 쭈뼛거리고 있는 남자의 팔을 친구가 낚아채 집안으로 끌어 당겼다. 뭐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남자는 어쩐지 갑자기 맥이 빠졌고, 내키지 않는 듯 의자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실실거리며 S가 물었다.
“응? 뭐, 그냥…”
남자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S는 벌써 거만한 얼굴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용인즉 이랬다. 새로 부임한 시장이, 노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을 추진 중인데, S의 마을이 그 첫번째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며, 벌써 주민 동의율이 60퍼센트에 육박한 점이나 부동산 시장이 호황인 점, 그밖에 정부의 규제완화 계획과 내년에 있을 선거를 대비한 홍보 정책의 필요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시공사 선정부터 완공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S는 방 3개짜리 아파트 한 채를 적은 비용으로, 아니 거의 공짜로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요새 아파트 한 채가 얼마인 줄 아나? 이게 다…”
남자는 뚱한 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기가 막혀서 입이 떡 벌어졌다. 왜냐하면 S의 자기 합리화가 도를 넘어 너무나 뻔뻔스럽고 괘씸했기 때문이다. S가 살고 있는 빌라는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것이었는데, S는 이제 순전히 부동산 투자를 위해 자신이 아버지에게 빌라 매입을 종용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안 그럼,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걸 사겠나! S는 어이 없다는 듯 곰팡이 자국이 가득한 한쪽 벽을 손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그는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친구의 재정 상태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조언이랄지 조롱이랄지 모를 이런저런 헛소리를 늘어 놓았다.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지. 남자는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손 좀 줘 봐.”
S가 뚱뚱한 남자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점쟁이 흉내를 내며, ‘음… 음… 부자 되긴 글렀군. 쯧쯧, 평생 노예처럼 일할 팔자야’라거나, ‘이건 미신이 아니라 통계라고’라는 둥 아는 척을 하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즉, 업계에서 이름 꽤나 날렸던 어느 학자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자신의 손금이 매우 희귀한 모양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대기업 총수나 대통령과 같은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형태라는 얘기였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언행에 거침이 없어 직장 생활에는 맞지 않고, 그저 자유로움을 좇아 살다보면 일하지 않아도 금전이 차고 넘칠 운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남자는 더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어서 연신 하품을 뱉으며 피곤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쳤지만, S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주둥이를 계속 나불거렸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결국 남자는 참다 못해 연극배우처럼 과장스럽게 손목시계를 얼굴에 바짝 가져다 대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셔서 말이야. 남자는 집주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둘러 지하방을 빠져나오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머리가 깨질 뻔했다. 거머리 같은 자식! 건방진 놈! 이제 친구도 아냐!
뚱뚱한 남자는 벌겋게 열이 올라서 찬 공기를 쐬려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작업복 차림 그대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내리 이틀을 앓아 누웠는데, 고열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불현듯 미친 사람처럼 재건축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는 기어코 다시 우울 상태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남자는 삶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느 날 아침, 남자는 습관적으로 8시 정각에 공장으로 출근했고, 문이 쇠사슬로 단단히 잠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이 휴일이었던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세어보며 어리둥절해 있는데 갑자기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쳐드는 순간, 누군가 깨진 창을 넘어 2층 사무실로 침입하는 모습이 남자의 눈에 띄었다.
“도, 도둑이야!”
“닥쳐, 돼지야!”
창문 밖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회계 담당 직원이었는데, 웬일인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뚱뚱한 남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 안으로 사라진 회계 담당자는 벽시계며 어항, 텔레비전, 사무용품 따위를 창밖으로 하나씩 끄집어낸 뒤 당당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늦기 전에 뭐라도 하나 챙기는 게 좋을 걸.”
“무슨 일입니까?”
“뭐야? 당신 바보야?”
회계 담당자는 뚱뚱한 남자보다 적어도 스무 살은 어려 보였지만, 끝까지 알 수 없는 얘기를 반말로, 그것도 아주 무례하게 딱딱 쏘아붙이다가 회사 트럭에 훔친 물건을 싣고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여기서 골치 아픈 상황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유례없는 경제 대공황이 갑자기 온 나라를 후려치는 바람에 금융사를 시작으로 부실한 제조업체들이 줄줄이 망했고, 뚱뚱한 남자는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했으며, 그 잘난 재건축 계획도 전면 백지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남자가 직장을 잃은 그날부터 다시 돈을 빌려달라는 S의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제발, 사정 좀 봐 주게.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뚱뚱한 남자는 끈덕진 S의 부탁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의 형편이 안쓰럽게 느껴져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래? 그럼! 그렇지. 에이, 친구끼리 뭘.”
남자는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 또다시 S에게 피 같은 돈을 송금했다. 열흘 후에 당장 어머니의 밀린 병원비를 갚아야 했지만, 웬일인지 그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으며,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겠지’라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뚱뚱한 남자는 오랜만에 아침까지 깨지 않고 단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