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깨는 개구리가 된 이야기
모범생으로 살던 나에게 학창시절을 요약해서 말해보라 한다면, 너무나도 쉽게 ‘공부’ 한 단어로 모든 설명을 끝낼 수 있다. 한국의 입시 경쟁 문화에 제대로 휘말린 나는 삶의 목적이 대학이고, 일상의 모든 기준은 성적이었다. 행복하다면 성적이 좋게 나와 행복했고, 힘들다면 결국 공부와 성적 때문이었다. 당시 나에게 어른이란, 이 입시 지옥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했고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만을 꿈꾸었다. 그렇게 내 십대를 바쳐서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갔을 때-즉 나의 목표가 실현되었을 때, 나는 내 우물의 모든 것을 파헤친, 세상을 나갈 준비가 된 당돌한 개구리가 되었다.
수능이 끝난 12 월, 대학 결과까지 다 나온 후에도 나와 친구들은 이제 갈 필요가 없는 학교를 굳이굳이 찾았다. 점심시간에 급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갔고, 교무실에 선생님들과 떠들러 갔고, 학교 모니터에 닌텐도 위를 연결해서 게임을 하러 갔고, 그냥 심심해서 학교를 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입시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날 구속하던 학교를 맘 편히 돌아다니는 자유가 너무나도 달콤해서, 학교를 갔다. 그런 우리를 못말려하면서도 대견하게 봐주는 선생님들께서는 우리에게 어른이 되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고 물으셨고, 술을 먹어보고 싶다, 라는 나의 답에 박장대소를 하셨다. 열아홉 끝자락의 나는 그게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편하게 웃음을 나누는 분위기가 또 너무 달콤해서, 묻지 않았다.
그렇게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던 밤 12 시, 나는 내 소망을 지켰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민증을 건네고 처음으로 사먹은 캔맥주는 내가 우물 밖으로 내딘 첫 걸음이자, 달콤한 이상의 첫 부서짐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한 모금 마신 뒤 내뱉는 ‘캬’의 시원함과 ‘아 술이 달다’라는 대사를 너무 맹신한 탓인가. 나의 술 맛에 대한 첫 평가는 ‘이거 썩은거 아니야?’ 였다. 아 나는 맥주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아, 하며 다음에 홀짝하고 마신 것은 하필 또 소주였으니, 충격이 꽤나 컸다. 꾸역꾸역 온갖 표정을 구겨가며 주어진 한 캔을 다 마셨던 것은 그것이 어른의 맛이라는 굳은 믿음과, 그걸 마셔야만 어른이 된다는 나의 어린 의무감 때문이었다. 앞으로 맛 볼 인생은 얼마나 더 쓸지, 앞으로 내 표정과 마음이 얼마나 구겨질지 상상치도 못하고 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렇게 씁쓸한 맥주의 맛과 함께 나의 이십대가 시작되었다.
갓 우물에서 나온 떼 하나 묻지 않은 무지한 스무살 개구리가 세상은 몹시 가증스러웠나보다. ‘이 달콤한 세상!’ 외치는 나에게 세상은 ‘아닌데?’ 하고 답했다. 공부밖에 모르던 내게 인간관계, 자존감, 사회생활이 기준되어 파생된 감정들은 새롭고 혼란스러웠다. 기대하던 술의 맛은 나의 첫 부서짐에 불과했고, 그후로 ‘그렇네, 세상은 참 쓰네’라고 인정하고도 남을 때까지 난 호되게 당했다. 청춘이란 이름 아래 겁없이 용기내고 꿈을 꿀 수 있지만 그 과정에는 많은 넘어짐이 수반되었고, 막다른 길을 맞이하여 입구가 다시 출구가 되기도 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통절하게 알게되었다. 아프니까 청춘, 이란 문장을 여러번 느끼고 위안삼은 스무살과 스물한살이었다. 아 고등학생때 공부할 때는 주어진 시험범위 죽도록 외우고 문제들 주구장창 풀기만 하면 됐는데.. 인생에서 공부가 제일 단순하고 쉬운 거였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부서지는 내가 밉고, 세상이 미운 적도 많았다. 그런데 이 세상은 날 가지고 밀당 놀이를 참 잘하는 것 같다. 나에게 가혹하기만 한 것 같은 세상이지만 이따금씩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면서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내가 또 세상은 아름다워! 하고 눈물겨워하며 느낄 때쯤이면 갑자기 또 차갑게 식어버리고 등을 돌리는 모순 덩어리의 세상이었다. 어이없고 얄미웠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도 나도 참 모순적이다, 하고 인정하게 되면서는 혼란스러움을 어느정도 호기심으로 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주변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어’라는 말은 어떨 때는 위로가 되고 어떨 때는 상처가 된다. 또 어느 미디어는 더 많은 것을 크게 꿈꾸라고 하면서 다른 미디어에서는 거창한 꿈을 꾸느라 현실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비판한다. 신기하고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게 모순 덩어리의 세상은 질문 투성이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답을 찾게 되는 것이 어른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스무살 당시 나는 성인과 어른의 표현을 헷갈렸던 것 같다. 어른에 대한 나의 동경심은 이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어른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은 살아가며 많은 순간 파생되고, 나의 무지함과 무능력함에 대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첫 남자친구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지면서는 사랑이 뭔지 아는게 어른이겠지, ‘보채지 않는 기다림은 자연스레 많은 것을 해결한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는 보채지 않는 태도를 기를 수 있게 되는 것이 어른이겠지, 아빠와 다투어 그 벌로 카드가 끊긴 후 옴싹달싹 못하고 사과할 수밖에 없는 나를 보면서는, 경제적 자립을 이룬 후에야말로 어른이 되는거겠지, 생각한다.
어제는 할머니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할머니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우리 어진이가 좋아하는 장미가 놀이터에 한가득 피었다’ 말씀하시는데 문득 목이 막힐 정도로 갑자기 울컥했다. 이것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어른일까. 다시 또 생각했다.
스물두살. 첫 술 맛을 본지 2 년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 나는 성인이지만 술은 여전히 쓰고 나는 여전히 어른을 꿈꾼다. ‘어른’이라는 단어에는 보이지 않는 묘한 힘과 저절로 뿜어져나오는 멋이 존재한다. 나는 아직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키는 나 자신에 취하고, 소주 몇 잔으로는 말짱한 정신이지만 괜한 주정을 부려보고, 고작 한 두 살 어린 후배들을 보며 귀엽다~하고 인자로이 미소지어보는, 그러면서 속으로 ‘아 좀 어른 같았다’ 으쓱해하는, 그런 뭐랄까, ‘어른이’이다.
철없는 성인들에게 ‘어른이’라는 표현을 보통 쓰는데, 난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되려 항상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삶이 어려운 이유는 아직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고 우리는 이 질문에 하나씩 답을 찾아가며 성장한다. 그리고 자주 그 답은 부서지는 아픈 경험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나는 이제는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하기보다는 존중할 수 있게 되었고, 여전히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지만,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표현력이 더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은 모순적이라는 걸 납득하고 이에 조금은 의연해졌다. 모순적인 점들을 하나씩 더 발견할 때마다 이런 점도 그렇네, 하고 흥미로워하기까지 한다. 이정도 오기까지 몇번 깨지고 부서졌는지 세는 것을 포기했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나에 비해 지금 나는 많이 성장했다. 그럼 나는 어른에 가까워졌는가, 한다면 그건 아니다. 어른에 대한 나의 기준이 매번 리뉴얼되고, 한 발짝 다가갈수록 한 발짝 멀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질문 투성이이다.
‘적당히 솔직한 건 어느정도일까?’, ‘사랑은 나를 아프게 하면서 뭐가 그리 매력적일까?‘, ’반성을 해도 실수는 왜 되풀이될까?‘, ‘오지랖과 관심의 경계는 어디일까?’, ‘외부 환경의 휘둘림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무거운 마음과 가벼운 마음은 각각 어느 상황에 필요한가?’, ‘마음의 무게는 어떻게 조절하는가?’…등등.
겨우 인생의 일부를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질문은 어딘가로부터 계속 나온다.
나에게 지금 30 대인 분들은 어른으로 보인다. 나도 30 대가 되면 드디어 어른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다시 생각했을 때 난 10 년 뒤 저 질문들에 다 답을 할 수 있을 자신이 없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세상은 또 다른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겠지. 그게 나랑 세상의 관계다. 그러니 어른이라는 것은 닿을레야 닿을 수 없는 막연한 인생의 한 좌표에 불과하다. 나는 이미 안다. 10 년 뒤에도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된다는 건 뭘지 고민하고 있을 거라는 걸. 그런데 중요한건 어른에 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가 아니다. 이전에 비해 얼마나 컸는지. 그게 더 중요하다. 힘들 때의 심정을 기록해두는 좋은 습관 덕분에 나는 과거 부서졌던 나의 조각들을 고이 모아두고 시간이 지난 지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발견한다. 당시 상처투성이의 나가 아니라 그때의 순간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나를. 지금 고민하고 있는 순간들도 언젠간 어여뻐 보일 거란 걸 믿는다.
살아가며 나는 매번 부서지고 부서지는 틈 사이로 비치는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기웃거린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다가, 또 부서지고 보니 그건 일부에 불과했음을 알게된다. 어쩌면 인생은 끊임없이 묻고, 부서지고, 깨닫는 것의 반복일 수 있겠다. 여러 우물의 도장 깨기 느낌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깨는 개구리가 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게될수록 더 모르겠는 이 세상은, 새삼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이 삶이 역동적이고 즐겁다. 그러니 누군가 나에게 삶의 목적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 내 모습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기 위해서, 하고 답할 것이다. 가끔 단기적인 목표를 실현하고 나면, 성취감보다는 갑자기 삶의 불꽃 하나가 꺼진 것 같은 허무함이 몰려오곤 한다.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건 끊임없이 다가가고 꿈꿀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고 위안인가.
그렇게 매일 나는 어른에 가까워지며 또 멀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답답하지 않다. 적어도 기존의 위치보다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인생은 충분히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