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미야글빵연구소 2강 과제)
행복이란 무엇일까? 고통 속에서도 행복은 피어나는 것일까? 어떤 삶이 행복인 걸까?
언니가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다.
"혹이 보이니 보다 정밀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큰 병원으로 가세요"
흉선암 말기라고 했다. 수술도 불가능한 그런 상태. 언니의 나이 32세! 젊어서 암의 진행률도 빠르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결과에 우리 가족의 눈에는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기만 했다.
어차피 말기라는데 그래도 1%의 가능성이 있으니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
의사가 다른 장기까지 이미 전이되어 길어야 1년도 채 못 산다고 하니, 항암치료를 받지 말아야 한다.
위급하고 슬픈 긴급 가족회의가 진행되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쇠약해지고 머리도 빠진다는데~ 병원에서만 지내다가 항암치료 후유증을 앓다가 아프기만 하다가 삶을 마감해야 하는 것이 난 싫었다. 그래서 항암치료 안 받고 언니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언니는 항암치료가 무섭다고 했다. 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형부는 달랐다.
결혼한지 1년된, 1년 차 나의 형부는 내게
"처제! 1%의 가능성을 믿어 우리 재분이는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살릴 거야! "
호기 어린 형부 대답이었다.
나 아닌 다른 가족들도 같은 생각이었고 언니는 형부의 사랑의 눈물에 설득이 되어 항암치료를 받기로 했다.
"엄마 그래도 언니 항암치료받으러 가기 전에 제주도라도 다 같이 가족 여행 다녀오자"
이 역시 묵살되었다. 철없다며 등짝을 맞았고 면역력도 약해져 있는데 다른 병에 감염되면 어쩌냐고 지청구도 들었다.
그렇게 항암치료가 시작되었고 항암치료의 시작은 처절한 현실의 몸부림이었다. 당장 형부는 돈을 벌어야 했고 항암치료 일정에 맞춰 병원 가는 스케줄 조정하는 것도 빠듯해 보였다. 언니 혼자 서울 신혼집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혼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당시 친정 엄마는 남편과 사별 후 재혼한 상태였고 재혼한 남편의 시부모(중풍을 앓는 시아버지. 치매를 겪고 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상황이라 언니를 돌보기에는 불가했다.
난 3세 딸과 생후 6개월 된 아들이 있었고 마침 육아휴직 중이었다.
난 언니를 집으로 오게 했다. 그리고 잠시였지만 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안방을 내주어야 했는데 집에서 가장 구석진 방으로 언니와 형부방으로 정했다. 그래도 남편의 자리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에 말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가장 햇빛 잘 드는 방으로 언니한테 줄 것이다. 햇빛이 가장 안 드는 방에 언니를 있게 했던 것이 가장 저릿저릿하다.
형부는 밤마다 언니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싸들고 퇴근을 했다.
언니는 하루 종일 형부만 기다렸다. 형부가 오면 얼굴빛이 환해졌다.
매운 국물 닭발 먹으며 닭발을 처음 먹어본 내게 뼈있는 닭발을 발라 먹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생각보다 닭발이 맛있었다. 그리고 나는 닭발 맛에 매료되었다.
항암치료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늘 웃으며 아픈 내색 하지 않던 언니는 식은땀 흘리며 쭈그려 누워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 너무 아프다! 속이 너무 안 좋아!" 언니는 구토를 반복해서 했고 매우 힘겨워했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져! 그 중요한 부위도 털이 빠져! 거기까지 털이 빠지는 줄 몰랐어. 너무 수치스러워 "
"형부한테 뭐라고 말하니?", "너무 창피해"
그렇게 버티다가 언니는 미용실 가서 머리를 밀고 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언니의 수치스러움을 제대로 공감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냥 괜찮아 다그래!" 이렇게 무심하게 한마디만 던졌던 것 같다.
민머리에 쓸 모자 하나라도 선물할 것을 그러지도 못했다.
아픈와중에도 병원 갈 때 언니는 한껏 멋을 냈다.
평소 패션니스트였던 언니는 가발도 긴 머리와 단발머리가 있었고 모자도 종류별로 엄청 많았다.
마음씨 따뜻한 형부는 언니의 마지막 남은 여자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제일 예쁜 항암치료 환자로 꾸며주었다. 그래서 까까머리가 되었는데도 언니는 참 이뻤나 보다.
항암치료 중에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47kg이었던 언니는 60kg까지 몸무게가 늘었다.
난 낫는 과정이겠거니 생각했다.
또 그 당시 난 나름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기에 금식기도 새벽기도 했으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적을 만들어 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언니는 1차, 2차, 3차, 항암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항암 환자는 잘 먹어야 한대서 형부는 최고의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만 사 왔다. 형부와 언니가 동생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만큼 언제나 음식 양도 넉넉했다.
아마도 나의 남편이 편의점 사업을 시작했던 때였고 육아휴직이었지만 남편 사업장 편의점도 도와야 하는 처제의 고단한 삶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그런 거였을 것이리라
4차 항암이 시작되었다.
언니가 항암주사 맞고 다음날부터 여느 때처럼 항암부작용으로 괴로워한다.
항암치료액에 따라 부작용도 달랐다.
"현옥아 맥주 한잔만 먹고 싶다! 딱 한잔만! 소원이야"
너무도 소박한 소원이다. 항암치료 중에 술이라니 당연히 안되었지만 형부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하고 동네 고깃집에 둘이 갔다.
"삼겹살 2인분에 카스 한 병 주세요"
언니와 술잔을 부딪히며 언니의 쾌차를 위하는 건배사도 했다. 언니와 처음 가져 보는 술 한잔이었다.
그 당시 술을 안 먹었던 나는 맥주맛이 참 짜릿했다. 맥주 맛은 모르겠고 마냥 행복했다.
언니와 마주 앉아 맛본 그 맥주 맛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맛이었다.
언니가 말했다.
"언니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하다, 고마워...
한참 말을 끊더니~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언니 살고 싶어! 언니 살 수 있을까?"
좀 더 나를 가두지 말고 술도 먹고 할 것을. 그랬다면 언니가 건강했을 때 언니랑 술도 먹으며 많은 추억들 남겼을 텐데, 무엇이 그토록 술 먹는 것이 죄라고 정죄했단 말인가!(그 이후로 난 누구보다 술을 즐긴다.)
그것이 언니와 나의 첫 번째 술잔이자 마지막 술잔이 되었다.
평소 애주가였던 언니가 암으로 진단받고 나서 한 번도 술 생각이 안 난다며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그날 만큼은 언니가 행복할 권리를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지난 일이지만 언니를 위해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5차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6차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항암치료가 거듭될수록 언니는 쇠약해졌고 6개월간의 언니와 기막힌 동거를 끝내고 난 복직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언니는 오빠네 집으로 가야 했다 그렇게 아픈 언니가 또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러다가 다시 불편했던지 2달쯤 지나 우리 집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난 언니가 살아날 줄 알았다.
그렇게 의사가 말한 대로 1년 안에 가는 줄 알았다면 휴직을 더 연장했을 텐데~ 좀 더 경제적인 부담감을 안겨주지 않았을 텐데 내가 더 많이 도외주고 맛있는 것도 더 많이 만들어 줬을 텐데......
언니와의 슬프지만 행복했던 동거 기간이 이제 와서 보니 참 값지다. 나를 자책하고 싶은 아픈 추억들도 있지만 그래도 언니의 소원 하나 들어주었고 특히 언니는 내 둘째 아들 아기를 돌보며 참 행복해했다. 그 당시 3살이었던 첫째가 동생 눈 찌르고 괴롭히려고 하면 늘 아들의 보호막이 되어 지켜주었다.
그렇게 이뻐하던 둘째 조카의 돌은 본인이 꾸며주고 싶다고 했다. 패션뿐 아니라 데코에도 일각연이 있었던 언니는 풍선장식을 해주었고 잠시 삶의 활력을 찾는 듯했다. 그리고 그 후 아들 돌 사진을 마지막으로 언니와는 어떠한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8차 항암치료를 받고 그날도 고통 속에 사경을 헤매는 듯 보였다. 점점 쇠약해지는 언니는 마약 진통제도 소용이 없어 보였다.
119 구급차를 불러야 했고 인천에서 서울 삼성병원까지 구급차 안에서 불안과 피가 마르는 초조함속에서 하나님께 기적을 바랐다.
새파랗게 얼굴빛이 변하고 손발은 차가워졌다. 구급대원이 저체온증이 왔다고 했다. 혈액순환이 되도록 주무르라 했고 떨리는 손으로 열심히 주물렀다. 구급차가 삐용삐용 가는데 길을 안 비켜주는 차도 많았다. 1초도 아까운 시간인데 나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유독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알록달록 물든 단풍잎들은 기어이 가지를 놓아버리고 땅 위를 뒹굴었다.
젊디 젊은 33살의 나이에 마치 삶의 끈을 놓은 언니처럼 말이다. 그날, 병원 건물 밖에서, 한때는 싱그러운 초록으로 빛났을 그 나뭇잎들이 낙엽 되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난 주저앉아 하염없이 목 놓아 울었다.
코코영화를 보고 내 마음에 꽂힌 그 말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기억될 때 비로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기나긴 16년이 흘렀지만, 가을이 올 때마다 난 언니를 잊지 않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그 시간을 애도한다. 언니가 곁에 있었다면 함께 닭발에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었을 그 소망을 담아, 빛바랜 깊은 그리움을 담아 소주 한잔! 그리고 두 잔을 삼킨다.
그리고 언니와 그토록 함께 가고 싶었던 제주도. 이제는 내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언니와 나란히 걷는 상상을 하며, 틈만 나면 제주도의 노을과 바다를 보며 걷는다.
바다가 마치 나의 그리움! 언니인 것처럼 한없이 바라본다.
이생진 시인 <그리운 바다에서>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 되었다.'
만약에 내가 혹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항암 말기라고 하면 항암치료를 받을 것인가? 안 받을 것인가?
치료받을 권리! 행복한 삶을 살 권리! 중에 어떤 권리를 선택할 것인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강력히 항암치료를 반대할 것 같다. 그렇게 낫게 하지도 않는 그 독한 주사를 맞게 하고 싶지 않다. 싱그러운 바람, 파란 하늘, 바다, 초록나무가 주는 그 자연을 언니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항암 말기 환자가 나라면 난 항암치료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조용히 내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