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는 마음, 남아있는 마음

by KELLY

치매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흔히 “기억을 잃는 병”이라고 말해. 맞아.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그건 단순히 기억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가 바뀌는 일 같아. 어제의 이름이 오늘은 혀끝에서 맴돌기만 하고, 늘 하던 길이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얼굴이 잠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와. 그 순간 가장 아픈 건 아마도 당사자뿐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일 거야. 사랑은 여전한데, 그 사랑을 건네는 방식이 갑자기 어렵게 변하니까.


기억은 흐려져도, 감정은 더 오래 남는다


신기하게도 어떤 기억은 지워져도 어떤 감정은 남아.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잊어도, 그 사람이 내게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는 마음이 먼저 알아차려. 그래서 치매 돌봄에서 중요한 건 “정답을 맞히게 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일 때가 많아. “그게 아니고 이거야”라고 바로잡는 순간,


상대는 또 한 번 ‘나는 틀렸다’는 느낌을 먹게 되거든. 대신 “괜찮아, 여기 있어”라고 말해주면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지 않아도 마음은 자리를 찾아. 치매는 때때로 언어와 정보의 다리를 무너뜨리지만, 정서의 다리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도 해.


돌봄은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작은 반복이다


치매를 돌보는 일은 드라마처럼 눈물 한 번에 정리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야. 오히려 매일 비슷한 질문을 받고, 매일 같은 대답을 하고, 방금 한 말을 또 하고, 그러다 어느 날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지쳐버리기도 해. 그때 죄책감이 따라오지. “내가 나쁜 사람인가?” 하고.


그런데 그건 나쁨이 아니라 소진이야. 돌봄은 감정으로만 버티기 어렵고, 결국 생활이 되는데, 생활은 체력과 시스템이 없으면 무너져. 그래서 돌봄의 사랑은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물을 한 잔 더 챙기는 손, 오늘도 약을 확인하는 눈, 같은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마음 같은 작은 반복으로 드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일


치매 앞에서 우리는 종종 무력해져. 기억을 붙잡아 줄 수 없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어. 기억이 흐려질수록 더 또렷해져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일지도 몰라. 이름이 잠깐 사라져도, 눈빛이 흔들려도,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지는 안정감은 남아. 그리고 그 안정감은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해.


너무 감당하려 하지 않아도 돼. 힘들면 힘들다고 인정하는 것도 돌봄이고, 잠깐 쉬는 것도 책임이야.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오늘은 ‘완벽’ 말고 ‘지속’이면 돼. 당신의 다정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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