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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18. 2023

영국의 재무장관은 왜 빨간 가방을 들어 보일까?

"장관님 안녕하세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남성을 향해 누군가 이렇게 인사를 건넨다. 


이 남성이 건물 앞 중앙에 서서 카메라를 응시할 무렵 그가 걸어 나온 문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남녀 6명으로 구성된 이들 무리가, 앞서 나온 남성을 중심으로 양편에 자리 잡고 선다. 좌우를 훑어보며 모두가 자리했는지 확인한 뒤, 이 남성은 들고 있던 빨간 가방을 자신의 어깨 높이로 추켜올린다. 그 상태에서 몸을 좌우로 돌려 보이기도 한다. 


잠시 뒤, 그의 양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물러가고 다시 이 남성 혼자만 자리에 남게 되자, 한 번 더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해 좌우로 몸을 돌린다. 그의 오른편, 즉 TV 화면상으로는 왼편에서 간간히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이 남성이 그쪽으로도 몸을 향하더니 손을 흔들어 보인다. 화면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철제문 너머에서 구경하는 시민들을 향한 인사였으리라.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골목 입구에 세워진 문이다.


hl.co.uk


지난 3월 15일, 영국의 재무장관인 제러미 헌트가 관저를 나서는 모습이다. 그가 걸어 나온 대문의 번호가 알려주듯, 이 건물은 다우닝 스트리트 11번지로, 바로 옆 10번지에 총리 관저가 위치한다.


제러미 헌트가 의회에서 예산안을 발표하기 위해 관저를 나서는 길이다. 그가 들고 있는 가방에는 이날 발표할 자료가 담겨 있다. 연설문 종이 몇 장을 넣고 다니기에는 가방의 의미로 너무나 미미하지만, 영국의 예산안 발표를 알리는 상징이 된 가방이다. 그가 참모들과 함께 관저 입구에서 단체로 포즈를 취하고 가방을 들어 보이는 행위까지 이미 그의 수많은 전임자가 오랜 세월 반복해 온 전통이다.


말 그대로 빨간 가방 (Red box) 혹은 예산 가방 (Budget box)이라 부르는 이 가방 사용의 역사는 18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재무장관이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새 예산안 발표를 알리는 전통이 되었다.  


 

"앗, 저 가방은?"


2006년 이맘 때다.


TV 화면을 들여다보던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다. 곁에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돌도 안 된 아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다.



theguardian.com


당시 재무장관이던 고든 브라운이 새 예산안 발표를 위해, 앞서 나온 제러미 헌트처럼, 빨간 가방을 들어 보이는 순간이다. 이듬해 그가 총리가 되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인물이 맡고, 이후 보수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나중에는 내각 개편으로 새 인물이 임명되거나 논란에 의해 실각되는 등 재무장관은 수차례 교체되었다. 수시로 새로운 인물이 장관직을 맡아 왔지만 가방을 들어 보이는 전통은 변함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 많은 가방 장면 중에서도, 나는 고든 브라운이 주인공으로 나선 위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국의 재무장관이 예산안 발표를 예고하며 가방을 들어 올리는 화면을 내가 진지하게 지켜본 건 그때가 처음이라 그랬을지 모른다. 한 나라의 장관이 경매사처럼 가방을 들어 보이고 몸을 돌려가며 카메라에 응하는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장면이 그토록 잊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twitter.com



이 친구 때문이다.


어린 아들을 위해 틀어놓곤 하던 TV 텔레토비 시리즈를 아들보다 내가 더 즐긴 탓이라고 해야 할까. 고든 브라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가방을 치켜드는 순간, 빨간 핸드백을 걸친 보라돌이가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치인은 물론 왕족까지 신랄한 비판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는 영국에서, 누군가 나처럼 재무장관의 빨간 가방과 보라돌이 캐릭터를 연관 지을 것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껏 내 힘으로는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재무장관에 대한 비판을 삼가기 위해서가 아닌, 텔레토비 캐릭터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 자세가 아닐까 싶다. 


내 글을 읽고 기분이 상한 텔레토비 팬이 있다면 양해해 주기 바란다.


커버 이미지 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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