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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ug 03. 2023

<세계모유수유주간>이 되어 생각해 본 지난날

8월 1~7일 <세계모유수유주간>

"말씀 중 죄송하지만, 젖 좀 짜고 와도 될까요? 젖이 불어서 견디기 힘들어서요."


교육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불안해지더니 차츰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신호다. 모유수유를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통증. 


교육 도중 젖 짜러 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입사 첫날에 말이다. 나는 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만 외치던 소리다.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핑계 댈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볼일을 보는 것과 젖을 짜는 시간은 다르다. 시간만 다른 게 아니라 마음가짐도 다르다. 젖을 짜기 위해서는 유축기도 챙겨야 하지 않는가. 


아들이 갓 백일을 넘길 무렵 나는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 번역일과 육아를 병행하던 중 우연히 회사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취업 포털 사이트에 올려둔 내 이력서를 본 업체가 지원해보지 않겠냐고 연락해 왔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육아를 하는 편이 수지가 맞겠다 싶었지만, 일단 지원부터 해보자는 심정으로 별 기대도 안 하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며칠 뒤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 날짜를 잡았다.  


당장 근무할 수 있겠냐고 해서 2주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던 것 같다. 2주라는 시간 동안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가 있어서다.


아들을 어디에 맡길까?

엄마와 늘 붙어살던 애를 떼어놓을 수 있을까?

모유수유를 끊어야 하나? 2주 만에 가능할까?

아이 맡기는 돈을 제하고 나면 집에서 일하는 것보다 득이 될까?


솔직히 말하면, 2주 동안 고민만 하다가 입사를 포기하는 건 아닐까 우려되었다. 출산이나 육아로 인해 경력 단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비슷한 고민을 하겠지만, 나의 경우, 애를 잠시라도 맡길만한 가족도 친척도 없는 해외에 살고 있으니 고민이 더 컸다.


다행히 집 근처 어린이집에 문의했더니 고민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직장생활을 하는 부모를 위해 사회는 생각보다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모유를 먹인다고요? 그럼 아이가 먹는 양만큼 젖을 젖병에 담아 오세요."

"천기저귀를 쓴다고요? 그럼 매일 필요한 기저귀를 챙겨주세요."


분유와 일회용 기저귀로 바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참여한 상담인데, 미안하다 싶을 정도로 나의 육아 습관을 존중해 준 덕택에 이곳에 아이를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입사를 포기한다는 사과문을 담아 보내려 했던 이메일은 '곧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말로 변경되었다.


2주 동안 아들을 맡길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유축기 사용법을 익히기에도 바쁜 시기였다. 나뿐만 아니라 아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였다. 엄마 젖만 빨던 아이는 고무젖꼭지를 거부할 수 있기에 젖병 물리는 연습부터 필요했다.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직장생활을 하는 부모를 위해 회사도 생각보다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어린이집에서 아들이 잘 적응할지 걱정이라고 했더니, 회사에서는 주 3일만 근무해 보겠냐고 했다. 애가 적응을 잘하면 정상 근무를 하고, 적응이 힘들다면 근무일수를 더 줄이거나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도 된다고 했다. 


근무 첫날, 젖몸살을 앓으면서까지 말도 못 하고 교육을 받느라 진땀 흘리던 일은 하루만의 악몽으로 끝났다. 회사에서는 하루에 몇 차례씩 일괄적으로 휴식 시간을 실시하는데 내가 젖을 짜는 간격과 잘 맞았다. 이 시간이 아니더라도 근무 중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다.


내가 회사에서 유축기로 젖을 짠다는 사실은 부서 동료들에게 널리 알렸다. 쉬는 시간마다 동료들과 어울리기 전 화장실부터 달려가는 내 모습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다. 퇴근 후 한 잔 하러 가자는 동료의 말에 '오늘은 시한폭탄을 떠넘길 사람이 없어서 힘들겠어.'라고 말할 여유도 생겼다. 회사에 보관해 둔 젖병을 퇴근 후 집으로 가져가 냉장고에 넣는데, 저녁 모임이 있으면 남편에게 이 일을 미리 위임해야만 했다.


교류가 거의 없는 타 부서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기에 이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떠돌았을까 궁금하다. 하얀 액체가 가득 담긴 아기 우유병을 회사 냉장고에 보관하는 나를 근처에서 지켜본 이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빈 유모차를 끌고 회사에 등장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나는 아들을 유모차에 태워 어린이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빈 유모차를 끌고 회사로 향했다. 어린이집에는 유모차를 세워둘 수 없어서다. 회사의 사무실과 복도 사이 공간에 다들 개인 물품을 보관하길래 이곳에 유모차를 세워두었다.


누군가는 내 입장을 이해해줄까 싶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의아한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타인의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나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저 자세로 수유하면 괜찮을까?"


얼마 전 패스트푸드점에 들렀을 때다.


약속 시간이 남아서 이곳에서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가 앉은 곳에서 두 테이블 건너편에 있던 여성의 행동이 눈에 띄었다. 


요즘 유럽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 것 같은 비키니 형태의 상의 차림이다. 여성의 옷차림보다는 아기를 안고 있는 자세가 더 눈에 들어왔다. 


키오스크가 없는 곳이라 계산대에서 직접 주문을 해야 했다. 이 여성은 메뉴판을 한 번 보고는 자리에 돌아와 일행과 이야기 나누고 다시 계산대로 가는 일을 반복했다. 같은 테이블에 있던 일행도 모두 아기 엄마였다. 유모차와 장난감도 있고 테이블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도 보였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 대신 음식을 주문해 줄 입장은 아니었나 보다. 


가슴이 노출되는 옷을 입고 아기를 안으면, 특히 모유수유를 한다면, 아기에게 지금 밥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과 다름 없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러했다. 잠시 뒤 잠에서 깬듯한 아기가 엄마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젖을 빨았다. 아이 엄마도 그런 사실을 예측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남편과 아들은 자리에 앉아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변에 다른 남성들도 있었는데 다들 주문하느라 바빠 보였다. 신경을 쓰는 건 나뿐인가? 내 걱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런 자세로 수유하면 가슴이 처진다고! 



"이제 엄마 젖 없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누구한테 화가 난 거냐고? 여자의 얼굴을 멀뚱히 올려다보는 아이를 향해서다. 돌도 안 지난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2006년 11월 5일, 내게 있었던 일이다.


영국에서 11월 5일은 '본 파이어 나이트 (Bonfire Night)'라고 부르는 날로, 밤늦게까지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나는 모유수유를 중단한 날로 더 기억한다. 어쩌다 그 날짜에 결심했는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기억하는지.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간 날이다.


강변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 장면을 실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라 이날 우리를 초대한 건지도 모른다. 식탁 옆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화려한 불꽃 잔치가 연출되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런 광경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폭죽 소리가 창을 통해 끊임없이 들려오자 아들이 놀라서 울어댔고, 우리 모자는 식사를 중단한 채 그 집 계단으로 피신했다. 


젖이라도 먹이려 했더니 아들이 젖은 빨지 않고 깨물기만 했다. 이가 제법 많이 난 상태지만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이다. 연이어 들려오는 폭죽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까.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시간보다 유축기로 젖을 짜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레 내 젖은 말라갔다. 폭죽 소리로도 괴로운데 엄마의 젖마저 시원하게 나오지 않자 아이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건 아닐까.


물론, 이런 논리적 이해는 나중에야 가능했고, 얼굴까지 찡그려가며 젖을 깨무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치솟았다. 젖을 끊기 위해 많은 엄마들이 오랜 시간 공을 들인다고 하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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