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문턱에서 부리는 생각의 허세
"자, 스탠딩 합시다."
"오늘 누구할 차례지? 아, 내 차례인가?"
" 그.. 사람이란 말야. 아침에 오면 딱 계획을 세워야되. 응? 오늘 당장 해야할거, 급한거 먼저 딱 왼쪽에 써놓고 우선순위 별로 일해야지 프로다운거지. 응? 새해를 시작했으면 아침에 따악~ 조금 일찍와서 하루를 정리를 해보고 뭘 먼저 시작해야할지 계획을 짜보란말야 계획을. "
" 근데 다들 표정들이 왜 이렇게 썩었냐? 응? 얼굴들 좀 들고 눈도 좀 봅시다. 응? "
아침마다 항상 '조회'를 해야하는 귀여운 곳으로 일하러 다니고 있다. 테헤란로에서는 직장내 실리콘밸리식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일고 있다는데 여기는 20년전 단체 팔다리 운동의 장관을 보여줬던 국민체조 '옆구리이~'가 들리는 것 같다.
" 아휴씨....진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이렇게 써오면 보고 싶지도 않잖아요. 내가 보고서는 어떻게 쓰라고 했어요. 읽는 사람이 보고 싶은 내용을 써야 좀 볼맛이 나던지 하지. 이게 뭐에요. 어휴. 내가 이걸 언제 B로 쓰라고 했어요? 응? 내가 준 보고서 작성법 매뉴얼은 보기나 한거야? "
" 죄송합니다. 다시 작성해오겠습니다. "
(' 제발 한장만이라도 넘겨서 20초만 읽어줘어! ')
전날 야근으로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고쳐쓴 보고서를 제출하면 일단 넘겨보지를 않으신다. 보고 때마다 도무지 받아쓰기 힘든 한시간짜리 수정 과외교습 때문에 시작한 내 녹음기에 의하면 지시사항은 분명히 B였지만, 증거를 제출해봤자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치부될 뿐 수용되지는 않는다. 그저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 걸까. 아랫사람을 훈련시켜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든 대응할 수 있게 만드는 고의적인 전략이라기엔 너무나 이상했다. 나름대로 창의적인 해결책을 강구해서 가져가면 '어린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궁금해서 질문이라도 하면 담당하고 있는 업무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아랫사람이 되었다. 그 분은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있는 임원진에게 어떤 식으로 충성하는지는 알길이 없었지만 나에게 이곳은 그 분이 지배하는 국민수 7명의 밀폐된 왕국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먼지나 핥아먹는 노예계급의 조력자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적잖게 분노하고 미워했었다. 도대체 저 사람의 의도는 무엇인가하고 수많은 의문을 품었지만 1년쯤 지나니 이제는 따져볼 기운도 안남아있다. 그냥 원하는 형태로 마지막이란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무한정 돌고 돌아서 처음으로 되돌아갈때쯤 되면 이 이상한 의식은 끝이 난다. 위로 아닌 위로가 되는 건, 이 의식을 거치는 국민들이 나만은 아니라는 심보였고,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 부서 (직원의) 퇴사율은 가히 기록적이었다.
" 처우를 좀 개선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급여를 결정하는건 내가 아니라 누구죠? 응? 저 회장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
밀폐된 구역의 왕은 내 할당량이 적은 이유를 전체를 통솔하는 최상위 통수권자 때문임을 강조했다. 또한, 국가의 견고함을 위해 리모델링이라도 한다치면 우리 부서 구역의 국경선은 최우선으로 사수했다. 왕에게 우리 팀원이 아닌 직원들은 그저 자신이 뽑은 고분고분한 팀원들에게 멍청함을 옮기는 믿을 수 없는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가오'에 죽고 '가오'에 산다는 이 분은 좁은 시장에서 이미 악명이 높은 분이었다. 다만, 그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영어였다. 외국회사 직원이라도 접견하는 날은 언제나 그렇듯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시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와 나머지 직원들은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을때,
나의 변명.
"도대체 뭘해야 단번에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숨 막히는 연휴 전날의 강제 팀 단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부서장이 말했다. 그냥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말인데 그 날은 유독 다르게 들렸다. 한편으로는 성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잘라내고 올라갈 수 있는 참으로 그 사람다운 말이었다. 결국은 노예 굴레를 끊고 싶다는 중년의 푸념이었을 뿐인데 어딘가 잘못됨을 느꼈다.
나는 차입금을 땡겨서 자산을 확보하고 최소 5년간 이를 운영하면서 5년 후에는 매각차익, 내가 산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팔아서 성과급을 내는 구조의 전형적인 돈놀이 회사에 다니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회사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래서 더욱 도덕과는 거리가 멀고 규제를 피해갈 수 있는 구멍을 중시하며, 성과주의, 관료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한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회사에서 목표하는 숫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숫자를 어떤 계략을 써서라도 나오게 해야만 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논리에 맞는지 안맞는지는 관계가 없었다. 곁다리로 흩뿌려지는 그 어떤 감정도 배제하고 그 숫자가 나와야만 한다!
웃기는 것은, 학생 시절의 내 꿈은 카카오 프렌즈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서 보기만해도 잠시나마 사람들을 웃음 지을 수 있게 하는 업으로 밥먹고 사는 것이 꿈이었다는 것이다. 출시할 때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재미라면 업으로 삼아도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참으로 어린 생각을 했었다. 그랬던 내가 밥먹고 커피마시고 다시 회사라는 공간에 끌려들어가며 잠깐 만나는 몇초간의 하늘과 함께 듣는 푸념마저 일확천금의 기회라니.
때마침 최근에 발간된 '메이커스 앤 테이커스'라는 책을 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애플과 같은 대기업도 금융화에 물들어서 혁신에 필요한 연구 투자보다는 자사주 매입과 차입으로 단기적 차익만 올리려고 하는 세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서장도 결국은 시스템에 이용 당하는 Takers의 조력자일 뿐이다. 그가 만드는 '똑똑한' 금융구조들은 사회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기는 커녕 부자들의 배를 더욱 불리우고 받는 칭찬에 불과하다. 대학시절 강의실에서부터 각종 재무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숫자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화이트칼라의 정장을 입을 수 있으며,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줄곧 배워왔다. 나는 그저 살고 싶었다. 벌만큼 벌어서 이 한몸뚱어리 키우느라 고생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남동생의 앞길을 거뜬히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알파걸'이 되고 싶었다.
잘못되가고 있다는건 알겠는데,
그래서? 그 다음은?
중국의 평범한 학생이었던 푸쯔강(傅治纲)은 3년의 장거리 연애, 총 6년간 연애를 해온 여자친구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여자친구에게 복용해줄 꿀을 찾게된다. 하지만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꿀이 진짜 꿀이 아닌 가짜였고, 푸쯔강은 여자친구가 차도를 보일때까지 진짜 꿀을 찾아서 여기저기 발품팔다가 사회를 위한 좋은 꿀을 만들 생각을 품고 '蒙面小熊'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이런 부류의 진정한 사업가들이 간혹 존재하기는 한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로써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를 찾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이 거대한 시스템의 한 부속이 되어 쳇바퀴처럼 내 삶을 굴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아마도 나는 또다른 Takers들의 배를 불리우는 조력자로 성장할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면서 나 또한 시스템의 탓을 하겠지. 지금 확실한 것은 나는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 어떤 한계와 염세를 느끼고 있다는 것 뿐이다.
위험을 경고하는 경제서는 자주 읽는 편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 옛 어른들의 말을 따라서, 내 힘으로 피해갈 수 있는 위험은 이왕이면 피해가고 싶었다. 그런데 점점 머리가 커지고 한살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것들을 자의적으로 놓아버리고만 싶어진다. 알았다고 한들 '나'라는 존재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정말 너무나도 무력했다. 지금의 나와 10년전의 내가 만난다면 아마도 이런 대화를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모두의 희생을 요구했어. 그 희생은 그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강요되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되서 없던 일처럼 무마되었지."
" 자, 그럼 자기 이익을 챙긴 이 사람은 악한 사람이란 이야기인데, 이런 사람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까?"
" 나쁜 짓을 했으니까 당연히 감옥에 가야지. 그러려고 있는게 감시하는 사람들이고 감옥이 있는게 시스템이잖아?"
"그런데말야, 이 사람은 감옥에 가지 않았어. 잘못이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증거도 한조각 없을뿐더러 운이 좋게 그 순간에 다른일이 터져서 훅하고 넘어가버렸거든."
"그게뭐야, 거짓말하지마. 나는 절대 인정못해 그런 시스템. 그 사람은 죽기전에 자기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받아야해! 그게 정의아냐? 바보같은놈들."
"응 그런데말야, 세상이 꼭 권선징악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거 같아. 가끔은 운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거든. 아무리 상대방의 영혼을 부당하게 더럽혀도 끝내는 책임지지 않고 교묘히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뭐야 그게 사회야? 큭큭 그런 사회라면 나는 내가 고발자가 될거야! 그런 놈들이랑 어떻게 같이 살아?"
"넌... 아직어려."
어른과 아이가 알고 있는 권선징악은 이렇게도 다르다.
시스템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비정한 미래
넷플릭스의 SF드라마 얼터드 카본에서는 300년 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의 시스템에서 충격을 받았던 에피소드가 하나있다. 사람이 육체를 칼로 난도질 당해서 과다출혈로 죽기 전에 겨우 병원에 실려와도 병원의 간호사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료비를 위한 지문을 스캔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다(다행히도(?) 돈많은 주인공이 여기서 스캔화면에 침을 뱉어 DNA를 인식시킨다). 스캔하지 않으면 치료는 커녕 들어갈 수도 없다. 팔을 절단할 위기에 처해서 인공지능 팔을 이식받는데 이식받는 팔마저 금액에 따라서 그 기능에 확연한 차이가 난다. 애초에 가난한 사람은 팔을 이식받을 치료비도 마련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한다. 살릴 기술이 버젓이 있음에도.
내 행복을 지켜내가면서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알량한 욕심.
순응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이기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걱정하지말고 자기 삶에 집중하라는 다독임을 받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면 내가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서 멸망시킬 것 같아 불안에 시달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결국, 어떠한 경고에 대한 책을 읽어 위험이나 부조리들을 인지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은 누군가 마이너스를 보아야 한쪽이 플러스를 보는 극명한 게임판이다. 단지, 처음 시작점에서 결과의 마이너스가 보이지 않게 눈가림만 잘할 수 있다면 누구나 전문가이고 누구나 능력자였다. 내가 이 탐욕에서 사표를 던지고 벗어났다고 한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대출비율을 극대화하여 아파트 투자수익 같은 것들을 노릴 것이고, 기업이 미래를 위해 내부 투자를 하던말던 배당을 요구할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다, 행복해지고 싶은 것일 뿐인데 상생하는게 이렇게도 힘들다니, 과연 인류가 몇천만년 전쟁의 역사를 가질 법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부조리를 알았다고 한들, 머리가 커졌다고 자부한들, 무엇을 해야 마음이 편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