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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미 May 14. 2019

기본소득과 공유경제는 어떻게 조우할 수 있을까

2015 청년정치학교 강남훈 <기본소득과 공유경제> 발표에 대한 토론문

토론 주제

1. 공유경제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2. 공유의 형식은 무엇인가? - 섀플리 가치, 제임스 미드 등
3. 공유경제의 성격과 정의에 대하여: 1) 구체적으로 성립과 운영이 가능한가? 2) 자본주의 철폐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4. 제임스 미드의 아가토토피아에 대한 비판적 관점


1. 공유경제는 무엇인가


이 글은 기본소득을 매개로 한 공유경제의 형성을 다루고 있다. 글이 제시하는 ‘공유경제’란 공유 부문이 중심이 되는 경제다. 이때의 ‘공유’란 국가소유 등 공적인 소유를 의미하는 공유(公有)라기보다는 공동의 소유를 의미하는 공유(共有)에 가깝다. 이는 글에서 제시한 ‘시민 소유’나 베네수엘라 개정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 소유’로 표현되며 공유자산의 부가 현재와 미래의 사회구성원에게 분배되는 소유 형태다.


이러한 공유경제의 아이디어는 영국의 케인즈좌파 경제학자인 제임스 미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제임 스 미드는 아가쏘토피아(agathotopia)에서 사적 소유 및 국가 소유와 구분되는 제3의 소유형태를 시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는 아가쏘토피아의 거시분배정책 중 하나인 사회총자본의 약 50%와 자연자원의 사회적 소유형태로 제시된다. 이 사회적 소유는 국가 소유와 동일시되지만 그 관리나 운영이 국가기구나 관료에 의해 독점되지 않는다는 점, 공동의 부에 대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1/n의 향유권과 처분권을 보유한다는 점, 또 배당의 형태로 이에 대한 부의 분배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다른 형태의 소유라고 할 수 있다.[1]


우리에게 기본소득으로 익숙한 이 ‘공유’ 개념은 공유자산의 원천적 공유로 보충되는 보편적 시민 권리에 기인 하여 공통적인 부가 개별 주체에게 분배되는 방식으로서 그 형식을 완결시킨다. 이때 공유 개념은 정치철학적으로는 개인적인 선과 공동선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식으로 수립되는데, 이는 ‘분배 공정성’과 ‘효율성’의 달성문제와 그 모순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미드의 고민과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미드의 공유사회 기획은 공통의 부에 대한 배타적 소유를 보호하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공유의 수익이 사회구성원에게 분배되지 않는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공유경제가 위와 같은 공유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면 그 형성은 사회총자본에 대한 공유 부문의 증대뿐만 아니라 사회적 배당의 방식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유경제의 규정에 관해 몇 가지 내용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공유경제의 범위와 그 형식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배당의 재원이 되는 공유자산의 유형을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유의 형식이 개별 사회구성원에 대한 분배로서 완결된다고 하고 공유자산에 대한 사회적 배당이 분배정의에 있어 정당하다고 할 때, 공유자산의 규정은 공유경제의 범위와 형식을 측정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가령 한 사회가 무엇을 공유자산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공유경제의 구성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공유경제 형성 수준의 척도로서 공유자산은 공유되는 부의 애매한 범위를 보다 명확히 하는 지점이 있다.


또한 이는 공유경제에 있어서 공유 부문의 확장이 단계적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총자본의 공유 비율이 높아질수록 공유경제 내부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한 불로소득의 비중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화폐 체제의 일반성을 새로운 소유 방식의 보편성을 확장함으로써 균열내며, 자본주의 체제 내의 착취와 수탈을 줄여나가는 과정으로서 공유경제를 사고하도록 만든다. 아울러 이러한 관점은 사회적 배당의 형식인 기본소득의 제도적 도입의 초기 단계에 있어 대부분의 공유자산을 재원으로 하는 높은 수준의 모델이 아닌 가능한 수준의 공유자산을 재원으로 하는 낮은 수준의 모델 도입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2. 공유경제에서의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섀플리 가치는 유효한가


이 글에서는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섀플리 가치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섀플리 가치란 게임이론에서 모든 순서가 발생할 확률이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 순서에 따른 사람들의 기여분을 평균한 값이다. 쉽게 말하자면 섀플리 가치는 모든 상황에서 모든 구성원이 참여한다는 가정 아래 참여자가 전체 가치의 형성에 기여하는 만큼 전체 가치의 일부를 분배받도록 하는 방식이다. 노동가치론적으로 설정된 직업시장게임의 관점에서 섀플리 가치에 따라 값을 분배하면 2명의 노동자는 각각 1명의 자본가와 같은 크기의 잉여가치를 분배받지는 못하지만, 전체 잉여가치의 일부분을 분배받을 수는 있다.[2]


단 섀플리 가치에 근거한 분배는 사적 소유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잉여가치의 분배과정에서 자본가가 잉여가치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얘기하기 어렵고, 기본소득을 통해 그 값을 분배할 때 충분성 차원의 논의를 전개하기 어렵다. 한편 섀플리 가치를 통한 분배의 정당화는 자본가의 몫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대해서는 침묵하지만,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독점하는 것에 대해 노동자의 몫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글은 넓은 의미의 착취 개념에 곽노완(2008)이 제시한 착취와 수탈 외에 ‘배제’라는 개념을 추가한다. 착취와 수탈이 관계 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배제는 관계가 끊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3]


섀플리 가치는 기회균등 조건 하에서 평가되기 때문에 실제로 노동자가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다양한 양상에 대해서 얘기하긴 힘들다. 요컨대 임금노동시장 내에 존재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배제에 대해 얘기하기 어려우며, 이들에게 공유되는 부를 정당화하기 어렵다. 하지만 배제 개념의 도입은 직업시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잉여가치 전부를 자본가가 차지하는 과정을 보다 명확히 가시화한다.


이처럼 섀플리 가치를 근거로 한 정당화 과정에서 공유경제와 그 분배방식으로서 기본소득은 배제로부터 생기는 착취를 없애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한편 강남훈(2015)에서는 섀플리 가치를 균등 분배의 수준에 따라 판 빠레이스, 제임스 미드, 마르크스의 이론에 접목시켜 기본소득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섀플리 가치는 공유자산이 확장되는 과정에서도 배제로 인한 착취를 없애는 데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처럼 공유자산의 증가에 따라 개별 노동자에게 분배되는 소득의 양이 증가할 때에는 근로소득이 아니라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를 통한 환수가 증가한다.[4]


공유경제에서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섀플리 가치는 분명 일정한 유효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유효성은 노동시장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잉여가치의 공정한 분배를 주장할 수 있지만 충분한 분배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주장하기 어렵다. 또한 임금노동시장 외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배제 아닌 배제, 근로계약관계 자체가 부재한 배제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어렵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과 같은 부불노동, 창작노동과 같은 다양한 활동들에 대해 공유경제의 부가 지급되는 것을 섀플리 가치로 정당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공유경제 혹은 기본소득은 완전고용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이 글과 강남훈(2013)에서는 불안정노동자를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실업자와 숨은 실업자 등의 세 가지 범주로 규정하고 사실상의 경제활동 인구 2,744만 7천 명 중 불안정노동자가 1,702만 7천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사실상의 경제활동 인구 중 62%가 불안정노동자인 것이다.[5] 현 조건에서 완전고용이 불가능하며 완전고용을 가능하게 하는 임금수준은 최저임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글은 한편 기본소득이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방법이라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시장임금이 낮아지더라도 기본소득으로 시장임금을 보상할 수 있다. 둘째, 열악한 노동에 대한 공급을 줄임으로써 노동공급압력을 완화한다. 셋째, 노동시간 단축-일자리 나누기 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이처럼 기본소득을 소득과 고용과 연계한 노동의제로 제출했을 때 주요한 지점은 ‘충분성’에 관한 논의가 될 것이다.


먼저 기본소득을 통해 지급되는 소득이 충분하지 않으면 열악한 노동에 대한 공급 역시 쉽게 줄지 않을 것이다. 기본소득을 지급했을 때 노동유인이 줄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다르게 보면 충분하지 못한 기본소득을 지급할 때 현재의 노동시장을 벗어날 여지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임금노동을 포기하고 노동시장에서 탈락하는 소득효과 역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의 측면에서도 충분한 소득이 지급되지 않으면 그 실효성이 미비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실질적으로 기본소득이 노동의제로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충분한 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본소득의 도입 모델이나 섀플리 가치를 통해 정당화되는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 모델이 이 방향에서 어느 정도까지 유효한지 따져보아야 한다. 기본소득의 공유경제 확장에 있어서 초기 모델의 도입이라는 의미와는 별개로 이 모델을 통해 기본소득의 다양한 논의들을 전개하는 것이 효과적일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논의와 실험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 기본소득의 공유경제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이 글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국민연금을 통해 공유경제의 가능성을 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검토를 통해 봤을 때 기본소득의 공유경제는 몇 가지 고민지점을 남긴다. 첫째, 공유경제의 형성은 공유자산의 규정 혹은 구성과 맞물린다. 둘째, 공유경제의 분배 영역을 노동시장으로 한정했을 때는 기본소득에 대한 부분적인 정당화가 이루어진다. 셋째, 공유경제가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준의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공유경제를 형성하는 실질적 주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이어져있다. 공유라는 개념에 근거하면 공유경제를 형성하는 주체란 한 사회의 자산을 공유할 수 있는 시민적 권리를 지닌 존재로 말하자면 모든 사회구성원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공유경제의 형성을 공유자산의 형성과 겹쳐서 본다면 이 문제는 기존의 소유 형태를 공유라는 소유 형태로 전환시키는 문제며, 즉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를 중심으로 한 계급 적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공유경제의 분배 영역이 노동시장으로 한정되지 않고 전체 사회에 열려있다면 이는 임금노동 외부의 다양한 노동, 즉 자유로운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이러한 활동을 임금노동 내부로 포섭하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소득 보장을 통해 다양한 의미를 생산하는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충분성 논의는 시민 권리의 확장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사적 소유의 축소 혹은 폐지라는 계급적 이익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한편으로는 노동의제로서의 기본소득과 탈노동 패러다임으로서 기본소득의 복합으로서 진행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의 공유경제가 공유자산의 형성과 맞닿아있다면 그 형성을 요구해야 하는 계급이 사실상 공유경제를 형성하는 실질적 주체가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이러한 주체는 고용과 소득에 있어서의 불안정성과 무산자로서의 공통성을 지닌 새로운 계급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일 것이다. 특히 곽노완(2013)에서는 프레카리아트를 임금노동자로 축소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넘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불안정한 모든 무산자들의 계급으로 규정하고, 이를 ‘형성되고 있는 계급’ 혹은 형성해 나가야 할 계급임을 밝히고 있다. 프레카리아트는 노동과정에서 착취당하고 공유자산을 수탈당하고 고용시장에서 배제당하거나 그 과정 속에 있다는 공통성 속에서 공유경제를 만들어가는 것을 통해 형성해나가는 계급이다.[6] 이때 기본소득은 공유경제의 목표를 가시화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간추린다면 기본소득운동은 다시 프레카리아트라는 주체를 형성하는 문제로 되돌아간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이 목표를 가시화하는 지표인가, 아니면 새로운 계급의 형성을 위해 공통성을 발화하는 것이 필요한가, 아니면 지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주체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 필요한가. 이 진동 속에서 어떤 사회운동을 만들어낼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1] 권정임, 「공유사회와 기본소득」, 『시대와 철학』 26,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5, 29-30쪽.
[2] 강남훈, 「섀플리 가치와 공유경제에서의 기본소득」, 『마르크스주의 연구』 9,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5, 133-137쪽.
[3] 강남훈, 위의 글, 137-139쪽.
[4] 강남훈, 위의 글, 140-150쪽.
[5] 강남훈, 「불안정노동자와 기본소득」, 『마르크스주의 연구』 9,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3, 14-20쪽.
[6] 곽노완, 「노동의 재구성과 기본소득」, 『마르크스주의 연구』 10,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3, 97-108쪽.
강남훈, 「기본소득의 도입 모델과 경제적 효과」, 『진보평론』 45, 진보평론, 2010.
강남훈, 「불안정노동자와 기본소득」, 『마르크스주의 연구』 9,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3.
강남훈, 「섀플리 가치와 공유경제에서의 기본소득」, 『마르크스주의 연구』 9,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5.
곽노완, 「노동의 재구성과 기본소득」, 『마르크스주의 연구』 10,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3.
권정임, 「공유사회와 기본소득」, 『시대와 철학』 26,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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