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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미 May 14. 2019

인권의 바깥, 바깥의 인권

2016 인권기행 사람들 교양자료 기고

I. 인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다울’ 것을 요구받는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동물이나 식물과의 종種적인 차이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너머 인간의 조건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다움’을 묻기 위해선 조금 지나쳐 ‘인간다운 삶’을 말할 필요가 있다. 삶이 궁지에 몰렸을 때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외친다. 자신의 존재나 존엄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인간다운 삶’에의 요청은 자신을 보호하는 마지막 판결이자 산 땅에 남은 단말마의 비명이다. 이는 ‘인간다운 삶’이 그 자체로 인간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며, 저마다 다른 삶을 선택하는 뭇 인간 존재에게 보편적인 요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은 단순히 인간이 다른 종과 차별화하는 생물학적 전략이 아니라 역사학적 방식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는 가치형식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움’은 되레 ‘인간다운 삶’의 운동movement을 통해 축적되고 변화하는 움직이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 존재에게 요구되는 ‘인간다움’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간이 취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human right’이란 무엇인가. 인권은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인 이상 누구나 갖는다고 추정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인권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몇 가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모든 사람들’이 가진다고 여겨지기에 인류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권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간인 이상’, 즉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권리인 만큼 그 발생의 근원을 ‘인간다움’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인 만큼 인간의 ‘삶’ 모든 영역이 인권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1] 끝으로 인권이 ‘추정되는 권리’라는 말은 권리내용이 신적 권능providence로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삶’과 그로 인한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인권은 인간다움을 근거로 인간을 주체로 하며 인간의 삶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발생하는 어떤 권리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앞의 논의를 더듬어 ‘인간다운 삶’을 ‘인권을 보장되는 삶’이라고 줄인다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어떤’ 인권을 얻을 것이냐는 질문으로 변화한다.


이 질문은 ‘어떤’ 인권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미리 던진다. 인권이 갖는 특성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보편성’이다. 언급했듯 이 보편성은 인권의 주체가 인류사회 구성원 모두라는 점에서 나온다. 동시에 인권은 인간 모두에게 똑같이 타당하다는 점에서 인권의 보편성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유類적 존재[2]인 한편 ‘개인’이라는 복수의 개별자로서 존재한다.[3] 그러므로 인권의 적용이 아무리 보편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권의 발생과 실현이 이루어지는 곳은 서로 다를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의 ‘삶들’이다. 인간의 평등이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한 동등한 존중으로 확장되는 것 역시 이 지점이다. 인권은 모두 ‘어떤’ 인권이다. 보편적 인권이 어떤 인권들의 합이나 중복, 혹은 축적을 통해 형상을 획득했다 할지라도, 개별자의 입장에서 인권은 특수한 내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인권의 내용이 충돌하는 부분에서 발생한다. ‘삶’은 인간 보편의 존재형식이다. 그렇기에 ‘삶’의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삶이라는 형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권은 일차적 내용은 삶에 대한 평등한 권리 혹은 삶에 대한 평등한 기회를 가질 권리이고, 이는 또 인간 모두가 서로에게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4] 한편 인권은 삶이 전제로 하는 ‘생명활동’과 이에 필요한 자유나 물적 조건을 내용으로 하는 권리와 이를 존중해야 할 의무로 표현되기도 한다. ‘생명’이나 ‘자유’는 개별자가 처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서 이를 보장하는 인권은 반대 가치를 제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본원성’은 앞의 ‘포괄성’을 보충하며 인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원리이다. 한편 그렇기에 인권은 관계 안에서 ‘중층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양보할 수 없는 ‘최종적’인 인권을 요구하게 된다.[5]


‘최종적’ 인권의 존재는 결국 어떤 인권이 가장 포괄적이며 근원적인가를 묻는 내용이며, 인권 개념을 단순단일한 원리로 확정할 수 없게 만드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만약 인권의 내용이 충돌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보다 윤리적인지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지를 어떻게 따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인권은 법제도적 차원에서 지역법, 관할국내법, 헌법, 국제인권법의 차원으로 중층적으로 구성될 수 있지만, 법제도의 바깥에도 인권은 존재하며 그러한 인권을 포괄하는 법제도 외부의 체계가 보다 보편적인 인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인권은 나이, 지역, 성, 장애, 민족 등 다양한 상황조건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지만, 인권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라고 할 때 이는 어떤 인권이 가장 보편적인지를 물어오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결국 인권은 하나의 사안에 따른 하나의 도덕적 명령으로 치환될 수 없다. 인권의 중층적 구조는 그 자체로 수많은 차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비록 인권이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도덕적 질서를 보증하는 최상위 권리로 존재한다고 해도 인권의 최종성이 곧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인권은 완전하지 않다. 어떤 인권도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오히려 인권이 최종 권리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권 차원의 권리규정이 권리의 요구와 확보를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인권은 그야말로 ‘단말마의 비명’ 같은 것이다. 그 비명이 삶의 요구로서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인권이 우위에 서는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양립하는 인권을 어떤 방식으로 인정하거나 비판할지를 따져야 한다. ‘인간다움’은 구체적인 인간의 존재 아래 놓여있고, 인권은 구체적인 상황조건 아래에서 개인 혹은 집단 사이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인권은 개념 자체보다는 담론 혹은 활동의 차원에서 다뤄져야 비로소 이야기될 수 있다. 결국 인권이란 ‘인간다운 삶’을 정의한다기보다 그것을 바탕으로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II. 인권의 역사와 보편적 인권 


어떤 질문은 무언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성립된다. 인권에 대한 질문 역시 인간의 존재만으로 그러하다. 인간이 어떤 권리를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인간이 어떤 삶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권은 언제나 현재의 질문이다. 혹여 일상의 부박함으로 잠시 잊혀지더라도 사라지지는 못한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은 미뤄질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며, 인간다운 삶은 언제나 유예될 수 없는 요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인권의 현재는 단순히 현재의 조건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인권이 존재하기 위한 인간 삶의 축적, 즉 역사로부터 비롯된 상태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인권 개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려면 역사학적인 관점으로 인권을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삶이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하에서 변화해왔듯 인권 역시 그렇다.


인권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대개 자연법과 자연권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한다고 여겨진다. 자연법lex naturalis이란 인위적인 법률과 가치에 대칭되는 것으로 자연히 존재하는 언제 어디서나 유효한 보편불변의 법칙을 의미한다. 자연법사상은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학파에 의해서 최초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당시 스토아학파는 그리스가 도시 국가의 한계를 벗어나 제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전통과 관습에 따라 다른 법체계를 가지고 있던 그리스 도시 공동체의 배타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에 의한 자연법은 이성법이나 신神법과 같다. 관습은 지역과 민족,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이성법으로서의 자연법은 다양한 관습법 위에서 특정 지역의 관습이나 제도화된 법의 정당성을 판단할 기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법사상은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관습과 관습법들을 통합하여 이후 로마 만민법처럼 보편적인 법체계와 질서를 형성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자연법 개념의 발전을 통해 추상적으로 주어지던 시민적 권리는 한층 구체적인 삶에서 시민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6]


반면 자연권은 전통적 자연법이 근대적으로 변용되면서 발전되었다. 자연권jus naturalis이란 인간이 본래 자연적으로 타고난 권리로서 다른 어떤 이에게도 양도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권리를 뜻한다. 자연권 개념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법학자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1583-1645)와 잉글랜드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s(1588-1679)에 의해서 전통적 자연법 개념으로부터 분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7] 그로티우스는 법jus에 ‘옳음’과는 별개로 힘이나 소유권처럼 인간과 사물을 통제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이 있다고 보아 자연법에서 권리 개념을 분화시켰다. 홉스는 이전의 자연법 개념이 모호했음을 지적하며 법lex과 권리jus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자연권을 ‘개별자인 모든 인간의 본질적 자유’로 보았다. 따라서 홉스에게 자연권이란 사회나 사회 계약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반면 자연법은 생명유지를 위해 현실에서 따라야 할 합리적으로 도출된 규범적 수단의 목록에 가까웠다.[8]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자연권의 경쟁적인 행사로 인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도리어 자연권을 행사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다. 홉스에게서 자연권의 역설은 자연권이 자연적으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 권리라는 점에서, 또한 이른바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절대적 공권력의 창출로 정치사회 구성원들의 모든 자연권 포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홉스의 자연권 개념이 가져온 역설은 로크의 자연권 개념에 의해 수정되면서 자유주의적 인권 논의의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1632-1704)는 홉스와 달리 신의 섭리인 자연법에서 자연권을 끌어낸다. 로크의 신은 자연, 이성, 신을 하나로 통합한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절대자이다. 로크는 홉스와 달리 인간을 욕구와 함께 이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고, 인간이 자연법에 따라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갖고 있다고 믿었다. 로크의 자연권 개념은 자연법에 따른 질서와 조화를 전제로 자연권을 조율하는 질서의 가능성을 밝혔다. 결국 로크의 자연권은 자연법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하는 보편적 자유’로 상생의 원리를 내포하는 것이 되었고 이는 현재 보편적 인권의 의미와 거의 같다.[9]


한편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는 홉스의 논의를 보다 발전시켜 사회계약론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1762)에서 사회 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근본이 되는 신성한 권리지만, 자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거한다고 밝혔다. 홉스의 사회 계약이 투쟁 상태를 피해 생존을 유지하는 소극적 성격이라면, 루소는 생존뿐 아니라 자연 상태의 자유와 평등을 보존하기 위해 자유롭게 계약을 맺어 정치 질서와 국가를 만든다고 봤다.[10] 루소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인민people 공동의 의지를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라고 부르며, 일반의지야말로 주권의 기초이며 법이나 정부도 여기서 비롯된다는 철저한 인민주권론을 주장했다. 주권자를 왕에서 인민으로 가져온 루소의 사상은 직접민주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자연법과 자연권 논의에서 근대에 이르러 발생한 자유주의적 인권에 대한 논의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자율적’이라는 근대적 인간관의 토대를 마련했다. 근대 인권 사상은 정치 질서 또는 국가라는 현실적 관계 속에서 인권을 설명했다. 정치 질서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이 자율로 선택하며, 무엇보다도 시민의 생존과 자유 실현을 목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것이 근대 인권 사상의 전제였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받으며, 동시에 남을 간섭할 수 없다는 점에서 평등의 보편성을 획득했다.[11] 또한, 국가의 발전과 함께 시민권citizenship 개념이 발달하면서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와 이를 뒷받침할 법제도적 권리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근대 인권 사상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발달하고, 개별자의 자유를 지극히 강조하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낳고 있었다. 근대의 인권은 재산권을 자유권과 동일한 것처럼 전제하여 불평등의 실현을 평등의 전제로 깔고 있었고, 정치 질서에 따라 특정 인민을 국민nation으로부터 배제하여 제한된 권리만을 허락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문제시했음에도 개인으로 인정받는 인간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근대적 인권 개념에서 이미 인권은 어느 수준의 보편을 성취했지만, 근대에서 정치적 인간은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문제는 근대의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국민국가nation-state 바깥의 인간과 부富 바깥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인권의 바깥’, 예외적 상태가 늘 존재하게 된 것이다.


III. 사람의 자리, 사람들의 자리 


인권의 역사에 대한 고민은 ‘인권은 보편적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언제부터 사람들이 인권을 보편적이라고믿게 되었는가’라는 역사학적 질문으로 바꾸어놓는다. 인권의 실현은 ‘약속’된 것이 아니다. 인권의 역사를 오래된 약속의 실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권은 새로운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보편적 인권의 성취수준은 시대와 공간에 따라서 다르게 기록될 수밖에 없다. 세계인권선언을 정점으로 20세기 이후 인권 담론은 보편성보다 특수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종교분쟁, 인종차별, 탈식민화, 민족자결, 표현의 자유,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처럼 보편성으로 포함되지 못한 인종, 종교, 민족, 성, 지역 등으로 인한 인권의 충돌과 배제가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근대 국민국가의 권력과 권리의 주체로서 국민/시민은 ‘인간’이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로부터 배제되는 많은 비非-국민/시민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관념과 정치공동체의 성원으로서 가지는 시민권이라는 특수한 권리 사이에는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한다. 국민국가가 형성되던 근대의 시점에서는 노동자나 여성처럼 권리의 소수자로서 존재하던 인민들은 인권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보편성의 인정이었다기보다는 국민국가라는 정치공동체에 포함되는 일종의 ‘정상화’의 과정이었다.[12] 인권이란 ‘인간다운 삶’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성립하여 삶을 정식화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삶의 가능성이 성문화되면서 권리의 보편성이 후퇴되는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인간의 권리는 권위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로부터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권은 그 권위를 구체화할 정치 질서와 공동체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은 정치와 계속해서 연관되고, 또 정치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배제된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 인간의 권리는 보편성에 동일시하지 않는 이상 인간다운 삶에 포함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인권이 시민권에 선행할 수 없고, 오히려 시민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권의 역설’ 혹은 ‘인권의 아포리아aporia[13]’라고 말한다. 덧붙여 아렌트는 더 이상 권리가 인간의 본성이 아닌 인류 자체 혹은 정치 공동체에 의해 생겨난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권에 ‘권리들을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


한편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1940-)는 아렌트의 인권 개념이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거나 권리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며 ‘권리에 대한 조롱’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랑시에르는 인권은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했다’는 점은 개인이 기초할 수 있는 성문화된 권리가 있다는 표현으로 일종의 자연법 사상과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은 전자의 이미 부여됐지만 누리지 못하는 권리를 넘어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권리를 옹호하고 그러한 권리의 실현을 위해 삶을 움직여낸다는 말로서 권리내용과 권리주체의 생산을 의미하는 내용이다.[15] 즉 아렌트가 아포리아를 통해 권력에 대한 권리의 의존성을 문제로 제시했다면, 랑시에르는 오히려 권력에 대한 권리의 선차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인권 담론이 보여주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동시에 인권의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권력이 권리를, 권리가 삶을 후퇴시킬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인간의 삶이 가지는 구체성이다. 현실에서 인권은 구체적인 상황에 놓여있고 권리 없는 주체가 확인될 때, 우리는 주어진 권리내용에 상황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권리내용을 생성할 필요가 있다. 즉 채워진 자리에 억지로 삶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삶에 맞춰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권리가 인간의 삶을 저당잡지 않는 방법은 인간 존재를 보편성으로 동일시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보편성의 차원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로써 인권은 정치 질서로 제한되는 허무가 아닌 인간의 존재에 따라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근거로서 전유한다.


우리가 인권을 바라보는 관점은 주어진 ‘사람의 자리’가 아닌 새로운 ‘사람들의 자리’여야 한다. 저마다의 차원에서 ‘사람들’은 권리주체의 지위를 인정받는다. 인간에게는 저마다 인간다운 삶을 상상하고 이를 위한 요구들을 작성해나갈 권리가 있다. ‘인간다운 삶’이 역사학적인 가치형식이라면 개별 인간 존재에 있어 인권에 대한 요구는 삶이 가치를 축적해가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또한 ‘인간다움’이 발견되는 건 인간다운 삶이 지나간 다음이라고 할 때 인권에 대한 요구는 인류사회의 관계망 안에서 특수한 가치를 보편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권력 없는 사람들의 권리’가 보편성을 획득할 때 소외 앞에 놓인 개별 인간의 삶도 보편적인 가치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IV. 모두에게 인간다울 권리를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자리’로서 인권을 바라보는 관점은 특히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2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안전과 존엄에 대한 요구들은 인권의 확장에 완고한 정치 질서에 맞춰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근원적 권리내용인 생명에 의거했다고 해서 단순히 자연법적인 내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윤을 목적으로 한 과다선적과 초과운용, 법제도화된 안전권의 붕괴, 국가권력의 무능함이 원인이 된 구체적인 삶의 위협이었다. 사건에 잇따르는 온갖 혐오와 ‘표현의 자유’ 역시 그러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청은 주어진 권리의 수복이 아닌 새로운 권리의 확장이었고,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새로운 권리주체로서 정치 질서에 등장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인권의 역사는 정치에서 배제되어온 소수자들의 정치사이다. 다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사 속의 인권’과는 달리 ‘인권의 역사’는 권력 없는 사람들의 권리, 다수에 의해 외면 받은 사람들의 권리를 부각시킨다. 소외된 자들이 새로운 권리를 요청하고 쟁취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인권의 역사가 주목하는 부분이다.[16] 곡기를 끊고 땅을 기고 고공탑에 올라도 법질서가 기능하지 않는 예외적 상태에 놓인 노동자들이나 정치 질서에 따라 국가 바깥으로 내몰리고 희생을 요구당하는 밀양과 청도의 주민들 역시 이런 역사에 놓여있다. 이들이 겪는 삶은 보편적일지 몰라도 이들이 요구하는 ‘인간다운 삶’은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들의 싸움에 대해 얘기되는 인권은 이제 국가폭력에 대한 방어라는 소극적 내용을 넘어 삶의 존엄을 성립하는 적극적 내용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한편 ‘사람들의 자리’로서 인권을 바라보는 관점은 자신 이외의 다른 인간의 권리를 시혜로 생각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적극적인 의무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비록 권리내용은 개별적인 삶에 의해 생성되지만, 개별 인간의 삶을 통해 인간다움은 실현되고 그 실현은 보편성을 통해 다시 관계 안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실현 역시 관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인간 모두에게는 서로에 대한 충분한 책임이 있다. 이제 ‘인권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바깥의 인권’이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하나의 인권이 아닌 수많은 인권이 인간다움의 구성이 되어야 한다. 길게 돌아왔지만 결국 인권에 대해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단순하다. 모두에게 인간다울 권리를, 모두에게 인간다운 삶을. 지금 여기의 인권은 이 말 아래에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봉철, 『현대인권사상』, 아카넷, 2001, 39-40쪽.
[2] the species being. 고유한 종들이 갖는 독자성, 또는 고유성. 이 경우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존재.
[3] 이봉철, 위의 책, 40-41쪽.
[4] 이봉철, 앞의 책, 41-42쪽.
[5] 이봉철, 위의 책, 43-49쪽.
[6] 최현, 『인권』, 책세상, 2008, 24-38쪽.
[7] 이봉철, 앞의 책, 120-130쪽.
[8] 최현, 위의 책, 50-57쪽.
[9] 최현, 앞의 책, 57-60쪽.
[10] 최현, 위의 책, 61-64쪽.
[11] 최현, 위의 책, 65쪽.
[12] 홍태영, 「인권의 정치와 민주주의의 경계들」, 『정치사상연구』 15, 한국정치사상학회, 2009, 92-96쪽.
[13]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 혹은 '길이 막힌 것'이라는 뜻으로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한다.
[14] 진태원,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서강인문논총』 37,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3, 50-57쪽.
[15] 진태원, 위의 글, 58-66쪽.
[16] 전진성, 「인권은 역사학의 범주가 될 수 있는가?: ’인권의 역사’ 서술의 동향과 이론적 전망」, 『역사비평』 103, 역사비평사, 2013, 28-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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