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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Aug 28. 2023

시카고 보석 가게에서의 추억

'멸종위기사랑보호구역'에 보존하고 싶은 존재들

2000년대 중반에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신혼 생활을 시카고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카고 남부의 하이드파크 라고 불리는 동네에 있는 시카고대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너무 오래된 아파트라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에 방음도 안되어서 우리가 좀 크게 이야기를 하면 윗집에 사는 일본인은 조용히 하라는 듯 쾅쾅 바닥을 내리 쳤고(이름이 안도였나?), 아래층에선 중국인 노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우리는 이년여간만 시카고에 머물 예정이었기에 나는 그곳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우선 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시아버지의 친구분이 시카고대 근처, 흑인들이 주요 고객인 몰에서 보석 가게를 하고 있었던 덕분에 시카고 한인 교포들과도 조금씩 교류를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인사차 밥을 두번 같이 먹은 이후, 아무래도 어려운 사이이기에 더이상 가까워지지는 않은 상태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사장님(이후 마이크 아저씨)으로부터 혹시 와서 도와줄 수 있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나는 갑자기 발렌타인 데이 전날과 당일에 파트타임으로 보석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보통 어학원에서 외국인이나 시카고대 유학생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현지인, 그것도 흑인 커뮤니티 한 가운데 들어가 무언가를 판매한다는 것이 너무나 떨렸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재밌었고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날 매출도 좋았는지, 마이크 아저씨는 나에게 계속 같이 일할 수 있냐고 제안을 했고, 나는 일년간 다녔던 어학원 수료 이후로 애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영어도 더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취업이라기 보다 지인의 일을 도와주었던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 내가 ‘싸이월드’에 이 보석 가게 스토리를 올렸을 때, 친구들은 나보고 인기있던 영화인 <냉정과 열정사이>의 아오이 같다며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밀라노와 시카고 남부는 너무나 다른 곳이다. ㅋㅋ 시카고 남부는 미국에서도 강력한 우범 지역 중 하나로, 대부분 흑인들이 거주하며 이게 영어인가? 싶을 만큼 슬랭을 많이 쓰고 억양도 흑인색이 유난히 짙다. 매일 총기 사고가 일어나고, 고등학교에 아기를 돌보는 데이케어가 있는 위험하고 열악한 시카고 남부에서 보석 가게나 뷰티 서플라이는 생활력 강한 한국 사람들의 주요 사업 아이템으로서(처음엔 유태인들이 시작했다고 들은 것 같다.) 80년대 중반에 그 일을 시작한 한국인들은 시카고 교외의 백인들이 많은, 가장 학군이 좋은 동네에 살고, 한인 교회에서는 늘 고액의 헌금 봉헌자로 주보에 이름이 올랐다. 당시 오바마는 시카고 상원 의원이면서 이미 차기 대통령감으로 거론되는 수퍼 스타였는데 시카고 남부에서 스몰 비즈니스를 하는 부지런한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서 흑인들이 이런 근면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고 후에 자서전에 적기도 했다. 나는 가끔 가게가 한가할 때는 마이크 아저씨의 베트남 전쟁 통역병으로서의 참전기와 금값이 쌌을 때 비즈니스 호황기 이야기, 그리고 아저씨의 첫사랑(옆에 부인인 모니카 아주머니가 있는데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게에는 에콰도르에서 온 귀금속 세공사도 있었는데, 덕분에 가끔 스페인어 한마디씩 배우기도 했다. 케이블 티비 구독에 많은 돈을 지출하고, 에콰도르에 3층 집을 짓는게 꿈이라는 그 친구는 나에게 꼭 가야할 여행지로 갈라파고스 제도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lucy 라는 닉네임을 썼는데, 조금 촌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에서 가져온 것이라 보석 가게에서 일하는 나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 초보 판매원으로 시작했던 나는 점점 손님들 사이에서, 그 커뮤니티에서 의미 있는 사람이 되게 된다. 시카고대 기숙사에서 보석 가게까지는 약 네정거장 정도 거리인데, 버스를 타면 한쪽에는 시카고대 학생들, 한쪽에는 흑인들만 앉아 있는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간 지대에 속한 내가 버스를 타면 흑인 할머니들은 내가 '주얼리샵 레이디'라는 것을 알고, 금목걸이가 끊어졌다거나 반지의 보석이 빠졌다고 하소연을 하며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여유 있게(?) 가게에 오면 해결해 주겠다는 등의 말을 하며 그들과 소통을 하는데, 그럴 때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흑인들은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귀를 뚫어주는 문화가 있는데, 그렇게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이의 귀를 뚫어주는 일도 내가 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가게에서 내가 제일 낮은 지위라서 어쩔 수 없이 떠맡은 고난도의 일이지만, 눈 딱 감고 한번 시작하고 나자 그 후로는 작은 아기를 안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오는 것도, 귀뚫는 총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것도 재밌었다. 어느 날은 커스텀 오더를 잘못 이해해서 손님이 화를 내고 마이크 아저씨에게 약간의 손해를 입히게 되었는데, 나는 그날따라 너무 민망해서 제발 오늘 그것을 만회할 일이 생기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오후 갑자기 어떤 사람이 가게에 들어오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000달러 상당의 주얼리를 두개나 사가는 것이었다. (너무나 절박할때 가끔 그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 그날 기분이 안 좋았던 아저씨는 덕분에 입이 귀에 걸리셨는데, 나는 마음의 부담이 사라져 안도를 하는 한편, 그 매출의 지분이 나에게 어느 정도는 돌아와야 하는거 아닌가 싶어 씁쓸했던 기억도 있다. ㅋㅋ 또 가게에 오면 나부터 찾는 단골 손님들도 많이 생겼는데, 그중에 주유소를 여러개 운영하는 해리도 있었다. 해리는 올때마다 거의 나와 한시간여씩 대화를 하면서 신중하게 보석을 골랐는데, 하필 내가 지각한 날에 일찍부터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해리는 그날 나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다. 자기 직원들 중에 아무 생각 없이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술에 취한 채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골치가 아프다면서 지각하거나 불성실하게 살면 안된다고 했다. ㅋㅋ 그리고 목사님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언제나 완벽한 옷차림을 하고 등장했는데, 유난히 금으로 된 악세사리를 많이 샀다. 그들은 하느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본인들이 풍족하고 화려해야 신도들이 희망을 갖는다고 했다. 목걸이에 큰 보석을 주렁주렁 달기를 좋아하는 래퍼들도 당연히 가게의 주요 고객이었고,  '블링블링'이란 말을 그 때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시카고 다운타운의 '매그니피선트 마일'이라고 불리는 명품 거리의 화려함과는 다른 결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처음엔 좀 과하다고 여겨졌지만, 결국 인정하게 된 그들의 감각은 누구를 흉내내지 않은 그들만의 것이라 멋있었다. 이름 마저도 평범한 영어 이름의 스펠링을 굳이 바꾸거나, 아예 아프리칸색이 짙게 짓는 것도 그들만의 스타일이었다. 'R.I.P.'란 말도 그때 처음 배웠는데, 그들은 종종 어제 친구가 총기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하면서 주얼리에 R.I.P.를 새겨 달라고 하곤 했다. 남편은 가끔 나를 일찍 데리러 와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흑인 액센트를 다 알아 듣냐고 하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미국에 온지 갓 일년이 지난 내가, 교과서 속 영어에만 익숙했던 내가 그들의 언어를 대부분 이해했던게 너무 신기하다. 물론 '인마!, man~' 등의 한국어 섞인 간단한 영어로 그들과 아무 문제없이 소통하던 마이크 아저씨는 더 신기한 존재였고.

이렇게 당시 있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적어나가다보니,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나에게 '사랑'을 전해준 세 명의 친구들과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중 트레이시라는 친구가 가장 먼저 생각 난다. 가게에는 시카고 남부의 험악한 분위기와 주얼리샵 특성상 시큐리티 가드가 상주 해야 했는데, 트레이시는 요일별로 돌아가며 근무하는 세명의 시큐리티 가드 중 한명이었다. 중성적인 이미지의 트레이시는 여자 친구가 있는 성소수자였다. 그녀는 어릴때의 트라우마로 알콜 중독에 걸려서, 알콜 중독자들의 모임AA에 정기적으로 나간다고 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조카가 있는 이모이기도 해서 가끔 아기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내면에 불안함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소울이 깃든’ 차분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가져서 대화를 할 때 나를 무척 편안하게 해주었고, 특유의 통찰력으로 나의 고민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날 나에게 백투스쿨 시즌에 노트를 1달러에 10개살 수 있는 딜이 있다면서 관심이 있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나는 오케이를 했고, 며칠 후 트레이시는 나에게 노트를 갖다 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바로 1달러를 내밀었는데, 트레이시는 거절하며, 작은 선물이니 그냥 받아달라고 했다. 사실 1달러가 적은 돈일 수도 있지만, 푸드 스탬프를 받으며 생활하는 트레이시의 주머니 사정에는 어쩌면 이런 선물은 굳이 안해도 되는 호의가 아니었을까. 당시에 그저 가볍게 들었던 그녀의 깊은 속내가 지금은 무척 묵직하게 느껴지고,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고마움과 동시에 외국인 친구한테 선물을 받은 경험이 나에게는 처음이기도 해서 트레이시와의 이 에피소드가 아직까지도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또 사라라는 친구도 생각 난다. 사라는 보석 가게와 같은 몰에 있는 해리스 뱅크의 뱅크 매니저였는데, 아침에 가게가 문을 열면 오자마자 나한테 와서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하다가 출근하고는 했다. 싱글맘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집안 사정도 이야기 하고, 상사와의 트러블도 이야기 했던 것 같다. 마이크 아저씨는 "저 여자는 뭐 사지도 않으면서 왜 맨날 아침부터 와서 수다만 떨고 가냐"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가끔 특별한 날에는 목걸이도 사고 팔찌도 사고 그랬다. ㅋㅋ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귀국 준비에 정신이 없었기에 보석 가게의 손님들과 작별 인사를 제대로 못했는데,  내가 한국으로 떠난 후 뒤늦게 소식을 알게 된 사라가 무척 서운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사라는 나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듣고 첫째가 태어나는 시기에 맞추어 아기 옷 여러벌과 "miss you"가 적힌 카드를 보내주었다. 사라는 이 베이비샤워 선물을 나에게 전해주라며 마이크 아저씨에게 갖다 주었고, 마이크 아저씨가 국제 우편으로 나에게 보내준 것이었는데, 나는 사라가 전해준 그 마음을 받고, 시카고를 떠날 때는 아무 미련없던 내 마음이 그제야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미국 한인 마트에 없을 것 같은 선물을 고르기 위해 초록마을에 갔고, 그곳에서 쿠키와 차를 사서 사라에게 보냈다. 사라는 나중에 아이들과 아침으로 그 쿠키와 차를 먹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마지막으로 또 한명의 시큐리티 가드였던 대디맨이 생각난다. 나는 인터넷을 시작한 후로는 내 이름이나 아이디에 뒤에 love를 붙이는 걸 좋아했는데, 대디맨도 love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대디맨은 항상 말 끝에 daddymans' love를 덧붙였다. 마치 그것이 문장의 마침표라도 되는양. 라이언 고슬링을 가로로 늘린 상태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분위기를 입힌 듯한 외양의 대디맨은 월요일에 근무 했는데, 월요일은 근처 파파이스에서 1+1 딜이 있어서 그는 항상 파파이스에서 치킨 등을 잔뜩 사갖고 출근을 했다. 마이크 아저씨는 가게 입구에서 아침부터 냄새를 풍기면서 음식을 먹는 그를 못마땅해 했지만, 또 대디맨은 뻔뻔하게 루틴처럼 그 일을 매번 지속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손소독제 애용자였는데, 손소독제로 끊임 없이 손과 책상을 닦았다. 마이크 아저씨는 또 그를 두고 결벽증 환자라며 못마땅해 했다. 대디맨은 나를 lucy가 아닌 모니카 아주머니의 딸이란 의미로 ’리틀 모니‘라 불렀는데, 내 이름을 몰랐다기 보다 나름대로 지어낸 애칭이었던 것 같다. 대디맨은 부인이 암으로 몇년 전에 죽었다고 했는데, 둘다 코믹북과 바비등을 좋아해서 시카고 다운타운의 관련 전문샵을 다녔던게 큰 추억 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미국 사람들은 중년이 되어서도 그런 취미 생활을 하는 구나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롤링 스톤즈 공연을 갔을 때 중년 부부와 청소년 아이들이 같이 60년대 밴드의 음악을 들으러 온 것도 부러웠던 기억도 난다. 이십여년이 지난 후 이제 내가 과거와 현재의 문화를 아이와 공유하는 중년이 되었으니, 그때의 바람이 어느새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실감한다. 아무튼 대디맨은 내가 시카고를 떠날 때까지 가게를 지키고 있었기에 나의 귀국 소식을 이미 알았는데, 어느날 나에게 작가이자 인권 운동가였던 마야 안젤루의 글이 담긴 예쁜 카드와 10달러를 넣은 봉투를 건네며 작별 인사를 해주었다. 그곳만의 독특한 풍경과 사람들을 남기고 싶어서 좋은 카메라도 사고 싶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페루의 마추픽추도 가고 싶었지만, 경험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 귀국 후를 생각하며 돈을 쓰지 못할 만큼 그렇게 살림이 빠듯한 상황이었어도, 그 10달러는 감히 쓸 수 없었다. 대디맨의 사랑이 담긴 10달러는 아직도 봉투 속에 잘 간직되어 있다. 대디맨은 카드 마지막에 "I'm glad to have known you." 라고 쓰면서 "eye heart u 2(I love you too)" 라는 너무나 귀여운 암호같은 메세지를 남겨주었는데, 그 마지막 메세지가 대디맨의 캐릭터를 다 말해주는 것 같다. 대디맨이 준 카드를 오랜만에 꺼내 보며, 그때 대디맨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대디맨처럼,  친밀한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랑스러운 암호를 카드에 적어 전해주는 감수성을 잃지 않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기억의 갈라파고스에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나를 환대하고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전해준 그들은 ‘멸종위기사랑보호구역'에서 지켜줘야 할 보호종 같은 느낌이 든다.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 프루스트가 '그것 역시 잃어버린 시간의 효과이며 기억의 현상‘ 이라고 했듯이, 추억은 지난 시간을 여러번 걸러내고 미화한 것이기에, 사실 경험과 기억, 지나온 일상과 관계들을 돌아보면 좋았던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굴복과 실추 그리고 굴욕의 어떤 순간' 이 당연한 삶 속이라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계속 나아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불안과 소외와 상실 속에서도 각자의 삶을 잘 견뎌가던 친구들이 내게 알려준 것 처럼-‘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발견하고 전하고 보호하는 삶의 순간들을 만들어 가면서.

덧붙이자면, 그 가게 이름(0. 0. Jewelry) 이 내 풀네임의 이니셜과도 같음을 이제와서야 깨달았다. 내 이니셜이 간판에 적혀 있던 가게, 그곳에서의 경험이 정말 운명이었나 싶다. ㅋㅋ​


“결정적으로 보였던 온갖 것이 지속적으로 개조되면서, 삶을 경험한 인간의 눈은 그에게 가장 불가능하게 보였던 바로 그곳에서 가장 완전한 변화를 관찰하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오랫동안 머리와 가슴에 맴돌던 이야기를 뒤늦게 풀어 놓는 것은, 그동안 그 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암호들을 해독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든 나에게 암호와 암시를 던져 놓는다. 그리고 나의 역량에 따라 그것들은 해독 되기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지만, 어느날 문득,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저해상도 기억의 조각들이 채색되면서 나에게 의미 있어지는 순간이 찾아 온다. 마치 우편함에 오래 방치되었던 수취인 불명 편지의 수신인이 나였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이는 우리가 비의지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의 행로를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가운데, 앎의 카타르시스와 삶의 정수를 만나는 순간들이다. 그랬구나, 이런 거였구나 하며 결국 깨닫게 되는 감정들. 다행히 해독된 암호들의 답은 '사랑'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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