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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Sep 25. 2023

책을 정리하며...나중에 내가 없어졌을 때

악마가 다 가져가버린 서재

어제 오늘 책 이백여권을 정리했다. 버린 책도 있고, 중고 서점에 판 책도 있다. 그동안 한번씩 아이들이 어릴 때 보던 책을 정리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내가 산  책 위주로, 비교적 최근에 산 책도 많이 정리했다. 책을 정리하며 내가 책을 사는데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책을 읽는 것과 책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미니멀 라이프'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던 나의 정리 원칙중 하나는 책장이건 수납장이건 맨 윗칸과 아랫칸은 무조건 비우는 것이다.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정리 원칙이 있다고 해도 수납 가구 갯수가 많다면 또 그만큼 물건의 양도 많아지는 것이기 때문에...최근에 친구와 정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도 다시 비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느정도 크고, 2016년 즈음부터는 계속 정리 원칙을 고수하며 살아서 옷장도, 신발장도, 그릇장도, 창고도 모두 쾌적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네식구가 270리터(!!) 냉장고를 써도 공간이 남아돌 만큼 단순한 삶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크게 문제 의식을 못 느꼈다. 하지만 겉으로 대체로 괜찮아 보여도 막상 정리를 시작하다 보니 내가 왜 그랬나 싶은 것들이 역시 발견되어서 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엄청나게 관대하구나 싶었다. 그래도 일반 살림살이 정리는 크게 버릴 것도 없었고 대체로 순조로웠지만, 결국 가장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책이었다.


코로나가 시작하면서 오프라인, 온라인 북클럽도 하고, 좋은 책도 많이 출판되고, 절판된 책이 재출간 되기도 하고, 내게 전해지는 신간 정보량도 늘어나고, 나의 독서력도 부쩍 늘어나는 등등의 이유로 책을 많이 샀다. 나는 알라딘의 플래티넘 회원 등급을 계속 유지해 왔는데, 약 3년간 너무 당연하게 유지해온 나의 지위(?)를 최근 몇달간 급격하게 강등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나는 책을 사는데 돈을 많이 쓰면서도 책을 사는 것은 일반 소비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커피 두잔 안 사 먹으면 책을 한 권 살 수 있다며 책을 살 때마다 (마치 커피는 사먹지 않는 양) 가식적인 자기 위안을 했다. 전자책은 집중이 어렵고, 책은 일단 물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밑줄도 팍팍 긋고 메모하는 맛도 느끼면서 지저분하게 봐야 제대로 보는거라고 큰소리 치기도 했다. 또 신간이 나오면 바로바로 봐야 직성이 풀리고 어떤 작가나 사조에 꽂히면 a 부터 z까지 알아야 하는 강박과 더불어 '전작주의자' 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뭐 책을 좋아하다 보면 그럴 수야 있는데,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 하면서 책을 소유 하는 데에 어느 순간 선을 과도하게 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드디어 각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 좀 더 적극적으로 책장을 비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얼마전 받은 불문과 교수님의 편지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생 문학을 연구하신 분이 이제 눈이 아프다고 책도 안보고 평생 모아온 책을 다 정리하다니...책을 소유 한다는게 어떤 의미인걸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또한 우리 집에는 짐이 별로 없는데, 책 때문에 혹시 이사할 때 견적이 많이 나오거나 이삿짐 나르는 분들이 노동을 더 하게 된다면 마음이 불편해 질 것 같았다. 한편 나는 책에 메모를 되도록 많이 하려고 하는데, 내 생각을 적어두는 것도 있지만, 혹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그 책들을 보게 되거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책에서 보물 찾기 하듯 나의 말들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낭만적인 생각이고, 아이들에게 내 책은 그저 짐일 뿐일 수 있다는 걸 다시 되새기려고 한다. 나중에 내가 없어졌을 때 내 짐을 누군가가 힘들게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미안할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고 책을 읽는 것 뿐 아니라, 나만의 콜렉션, 큐레이션을 하며 책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책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한번 더 '정 떨어지는' 일이 생겨버렸다. 계속 미루다가 어렵게 마음을 먹고 정말 오래된 책, 나에게 진짜 의미가 있는 책, 2010년 이전에 산 책들을 정리하려고 보니, 중고 서점에서 '책 곰팡이'가 있다고 안 받아 주는 것이다. (그중엔 절판되어서 시간이 갈수록 가격이 오르는 책도 있었다.) 나는 그저 먼지라고만 생각했던 '갈색 반점'이 바로 책 곰팡이였다. 나는 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아하게 낡아 간다고만 생각했다. 헌책에 관해 연구를 한 기사만 찾아봐도 책에서는 나무 냄새는 물론 ‘리그닌’, ‘셀룰로오스’ 성분 때문에  커피나 초콜릿 냄새도 난다고 한다. 특히 나는 헌책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향을 좋아하는데, 실제로도 ‘바닐린(Vanillin)’, ‘벤즈알데하이드(Benzaldehyde)’, ‘푸르푸랄(Furfural)’ 등의 화학 물질 덕분에  각각 바닐라 냄새, 아몬드 냄새, 단맛이나 빵 냄새 등이 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나에게 헌책은 나무 가구가 아름답게 길이 드는 것처럼 시간의 옷을 입는 다고 생각했는데...역시 책도 가구도 잘 관리 되지 않으면 썩거나 곰팡이에 습격당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먼지 털어주기, 통풍 시켜주기, 한번씩 펼쳐보기, 등을 거의 십여년간 전혀 하지 않은 책들은 '그 시절의 나'에 대한 집착일 뿐이었다. 그 책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그때의 나의 생각과 나에 대한 기억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책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데 정말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걸까. 아무튼 '책 곰팡이'가 이 집착을 내려놓는데 결정적이었다. 내가 지금 나에게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가? 질문을 해보았을 때 나는 이제 '그 시절의 나'를 넘어 섰다는 생각이 든다. 더 훌륭해진 것이 아니라, 매일 현재에 집중하며 내가 되고 싶은 나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조금 우울하고, 나와 친하지 않다고 느꼈을 때, 충족되지 않는 마음을 책으로 책장을 가득 채우며 달랬던 것도 같다. 돌이켜보니 책장을 한칸 한칸 채워가는 것은 기쁨이 이기도 했지만 외침이기도 했다. 나를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은.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내 책장을 꼭 보여주지 않아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다 비워진 어느 책장은 책장 자체가 오브제가 되어버리기도 했고, 앞으로는 무조건 책장의 윗칸과 아랫칸을 비워 눈이나 손이 닿는 곳에만 책을 두기로 결심했다. 이 상태에서 책을 더 사고 싶을 때는 그만큼을 비우고 나서야 살 것이고, 웬만하면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헌책을 사거나 혹은 새 책을 깨끗이 보고 다시 팔면서 순환 시키려고 한다. 이번에 본격적으로 결심하고 책들을 다 들여다보니,  얼룩이 묻고, 책 곰팡이가 있고, 색이 바랜-책은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이미 방치된지 오래기에 나에게 더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사실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외에 이미 책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보통 같은 책을 다시 보지 않게 되는데, (물론 여러번 다시 본 책도 있지만 손에 꼽는다.) 내가 적극적으로 인용할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책은 대부분 일회성으로 본인의 역할을 다하는 것 같다. 독립 서점에 갈 때 빈손으로 나오는 일은 없겠지만, 이제는 책을 큰박스로 가득 담아서 택배로 받지는 않으려고 한다. 책을 사야한다면, 왜 사고 싶은지 고민하며 신중하게 고르고, 소독과 통풍을 해주며 소중히 간직하고, 인연이 다하면 필요한 사람이나 중고 서점에 깨끗하게 물려주는 태도로 책 라이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읽은 책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써보면서.


+ 오래된 책장을 정리한다면 마스크와 목장갑은 필수이고, 혹시 책 곰팡이나 얼룩이 있는 건 미련을 갖지 말고 무조건 재활용 쓰레기 장으로 보내야 한다. 이제 책장은 딱 나의 책 라이프를 단 한 줄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취향과 관심사가 잘 드러나면서도 밀도 있고 흥미롭게 정리해두고 싶다. 딱 책장 두 칸 정도로만.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ㅠㅠ


서재라뇨? 서재인지 뭔지를 찾고 계신다고요? 이 집에는 서재도 책도 없어요. 악마가 다 가져가버렸거든요.

93쪽.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시공사

책 정리 중 매입 불가 판정을 받아서 살아남은 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구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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