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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홀 Oct 11. 2020

감각의 책장: 추워야 내리는 따듯한 소리

무의식에 마련된 책장에서 감각의 기록물을 꺼내 읽다.

의성어에 애착 형성

의성어에 애착을 형성해놓은 적은 없으나 취향저격이라고나 할까 마음에 흡족한 것들이 일부 존재한다. 땅과 창문에 울리는 비의 위로가 그 중 하나인데 제일 가는 것은 따로 있다. 뽀드득(-어떤 이에겐 번드르르한 창문이, 누군가에겐 소복한 눈이). 이것은 소리를 나타낸다고는 하지만서도 나에겐 정밀한 촉감으로 다가오는 표현이다. 눈이라는 것은 천의 얼굴이라는 별명을 주어도 아쉬울 게 없을 만큼 면모가 다측면에서 무미(媚)하다. 감각의 귀감이 되기에 아주 출중한 소재이기에 관련된 기억도 책장에 적잖게 세를 내는 중이다.


반색을 표할 만한 것에 애정을 느끼는 것은 때때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한없이 추운 겨울을 상징하는 폭설에도 의외로 또다른 추위를 상징하며 다가오는 흑암과는 판이한 따듯함을 표현하기도 하는 눈이 바로 그러하다. 어쩌면 한기 속에서 소망한 온기의 표상이 곧 눈은 아닐까. 단독적인 발상은 아니리라 확신한다. 같은 소재로 쓰인 경우는 현저히 많았으니까. 모두가 수식어로 붙여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혹독한 시절

 '뽀드득'이라는 소리가 온도와 복합 감각으로 탄생한 것은 가장 한기서렸던 부대 생활에서였다. 겨울이 오면 시도때도 없는 눈세례가 퍼부어졌는데, 세례라는 이름이 붙기에는 딱히 축복과 은혜를 불러오진 못했다. 대신 눈을 치울 수 있는 영광을 비추어주었다. 비록 상처뿐인 영광이었지만. 


나라를 지킨다는 광활하고 초점잃은 목적 속에서 아무런 갈피를 잡지 못하여 통렬하고도 맹목적인 움직임만이 남은 시기였다. 아무래도 능동성의 결여는 에너지를 끓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그 계절은 여느 때보다 더욱 혹독하고 두려웠다. 이 혹독함과 두려움은 이겨낼 수는 없었고, 단지 존재를 부정하며 도피할 뿐이었다.


회피하는 방법에 그다지도 다양한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밖에서 딱히 잠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입대 후에는 잠과 친숙해지며 어려움을 잠시나마 벗어나고는 했는데, 겨울에 방문한 눈은 유일한 피난처였던 잠을 앗아갔으니까 이 의지없는 존재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기계음은 춥고 자연음은 따듯했던 시절

산골과 도로의 경계를 하나로 검게 물들인 어느 깊은 밤이었다.


'톡톡, 톡톡'


밤이 깊어 잠시 도피하고 있던 때 스피커가 울렸다. 그당시 기계음은 대개의 부대원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상징이었다. 간부의 필요와 부름에 응답하도록 요구받았기에. 


결국 예상하고 있던 문장이 거스를 수 없는 상태로 알아서 귀로 흘러들어왔다. 


'전원 제설 작업이 있으니 복장 갖추고 집합하시기 바랍니다.'


어김없이 하얀 결정들은 바닥을 포근하게 덮어갔고, 슬슬 마음은 얼어만 갔다. 우리는 각자의 임무를 직시하고 눈과의 사투에서 비교적 어줍잖은 수준을 벗어나게 해줄 도구들을 챙겼다. 그렇게 온도를 지켜줄 수 없는 방한 의류를 겹쳐 입고 눈삽을 들어 하얀 쓰레기라 불리기도 하는 것들을 치웠다. 상대적인 시선의 차이가 꽤나 돋보였다. 그 시각 어떤 장소의 누군가에겐 배경을 더 아름답게 꾸며줄 무대 장치와도 같았을 테니까. 물론 장소와 환경에 따라 본인도 줏대없이 그리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맡은 구역을 아스팔트가 희미하게 보이도록 쓸고나서 다시 뒤를 돌아보면 허무맹랑한 짓거리라 비웃듯 어느새 소복하게 또 도로 위에 허여멀건 물감이 점점이 찍히고 있었다. 이만한 부질없는 일이 어디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잠과 바꿔버린 불만만이 이른 새벽 얻어낸 유일한 결과물 같았다. 할 만큼 했다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후사는 무시하고 앞만 보며 걷기 시작했다.


그 때 두터운 군화 아래에서 '뽀드득'하고 눈이 압착되는 느낌이 실감났다. 이 감각이 공유되고 있는 시점은 울퉁불퉁한 눈사람을 만드는데 열중했던 어린 날이었다. 


꼬마가 빚어서 꼬마 눈사람인지 눈사람이 꼬마인건지 모를 창조물을 덥덥한 털장갑 우로 덕지덕지 뭉쳐내고 나서였다. 동네의 무던한 놀이터를 지나며 항상 주황빛이 도는 벽돌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날은 온통 단색이 되어 한산한 지경이었다. 친구와 한바탕 나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는 몰랐는데 온기가 배긴 집으로 가기 전이 되어서야 신발을 타고 넘어오는 촉감이 느껴졌다. 


'뽀드득, 뽀득'


포동한 볼에 꼬집힘을 꽤나 받았을 정도로 애교스런 나이였음에도, 그 소리가 어찌나 귀엽던지 계속 듣고 싶은 나머지 한참을 천천히 걸었다. 이 무의식적 행위가 감각의 책장에 심어놓은 것은 청각과 촉각의 연결이었다.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소리가 너무 따듯해서 추운 줄도 모르고 어느새 해가 다음날의 안녕을 기약할 때까지 걸었으니까.


여기서 포인트는 '무의식적'에 있는데 이 복합감각을 '의식적'으로 변환하게 된 것이 바로 삽질 후 생활관으로 향하던 그 순간이었다. 멋대로 살아가지 못할 혹독한 사회를 경험하고 있자니 '뽀드득'을 따라 걷던 훈내나는 시절은 불타는 장작이 손을 녹여주는 온도와 똑같은 온도로 다가왔다. 그 군화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는 그간 군대에서 타격받은 끝을 모르는 몸과 마음의 추위가 추억 속 따듯한 감각으로 한 계절을 나게하는데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따듯한 소리가 내리면

이 공유된 감각은 아직도 한 해의 마무리가 오면 언제든지 불시착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적어도 두 시간이라도 몸을 녹여준 이 소리를 소중히 여기게 된다. 그렇게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밟으며 감각을 넘어 추억을 공유하곤 한다. 


올해도 참 답답하고 각박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곧 따듯한 소리가 다시 내릴 것이기에 힘들었던 시대도 어느새 타닥타닥 타고 있는 장작의 연기와 함께 사라지리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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