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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홀 May 17. 2021

나에겐 빡빡하게, 너에겐 넉넉하게

타인 사랑하기 프로젝트: 나에겐 빡빡하게, 너에겐 넉넉하게

다원화
개인주의
인권 존중


나도 다 사랑하는 단어, 혹은 가치들이다. 하지만 모든 방향성에는 제어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은 중용, 즉 마땅함의 중요성을 어필했기에. 정의의 여신이 든 저울은 언제나 수평을 이루고 있어야 하듯이 사회 전반적인 영역의 균형은 어디서나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와 관련이 깊다. 뼈아프지만 대부분은 자신은 지극히 사랑하며, 타인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적당히 다루며 기울기 시작할 것이다. 한마디로 다원화의 극단적 비진리주의, 개인주의의 이기주의로의 변질, 인권 존중이 빚어낸 또다른 인권 차별이렸다.


정치는 좋은 사회를 원하는가, 성공한 개인을 원하는가의 모호함을 보이며 진영논리에 젖어 있다. 과연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상의 교집합에서는 이를 벗어날 수 있는가. 나와 주변인의 삶만 들어내 귀납적으로 유추하면 정치와 개인의 모양새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쉬이 깨달을 수 있었다. 표본 집단의 통계적 유의미성에 현저히 떨어지지만 괜히 확신이 드는 것은 왜일까.


뭐든지 극단은 드물다. 그리고 유연성도 뚜렷하다. 다시 말해, 항상 이기적인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게 더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쇼펜하우어 마냥 모든 것에 염세적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의 허물 덮기는 우리 사회를 좀먹게 한다. 


거기에 서두에 말했듯이 나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 그것이 민주적인 세계를 이룩했고, 덕분에 행복과 안주를 거듭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발전의 동물이다. 그래서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 아직 멈춰서는 안될 뿐이다. 


현재 도서업계를 휘두르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다. 몇 해 전 시작된 욜로, 소확행, 워라벨 등의 단어가 바로 맥을 같이한다. 이는 단순한 유행의 흐름이 아닌 사회 시스템에 혹사당한 이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심지어 나도 이것이 필요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 셈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만인 공감대를 이루는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차용하여 표현하지면 지금 논의되는 건 '가치 감수성'이 되리라 본다. 가치 감수성은 추호의 의심의 여지 없이 중요하다(-우리는 지나치게 부족하고, 아찔하게 연약한 인간이니까). 문제는 개인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에서의 가치 감수성이 다르다는 것에 있다. 


아주 간단하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강력 범죄 사건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보고는 댓글을 달았는데, 범죄자에 대한 극도의 비난과 피해자에 대한 최대한의 위로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댓글은 이 남자와 비슷한 부류였다. 이런 경우 이 남자를 포함한 사람들의 사회적 영역에서의 가치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남자의 속마음은 기사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던 것이고, 때로는 피해자가 그럴만 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적 영역에서의 가치 감수성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페르소나의 면모와 일맥상통한다.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가면을 쓰고 가치 감수성이 대단한 척하지만, 실제 그들의 솔직하고도 진정한 가치 감수성과는 괴리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적 가치 감수성으로 인해 얻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자만심이다. 결국 위로보다 비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의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과대평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개인의 삶으로 돌아오면 주변인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니 개인적 가치 감수성은 낮은 수준에 머무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만인 공통의 법칙은 아닐 것이며, 이를 벗어난 이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진심으로 타인에게 교감하고 공감하는 이들도 세상엔 많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서 잘 해왔고 계속 잘 할 것이기에, 여기서는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곳에 맥을 짚고 싶다. 너무 포장하고 싶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본인도 가면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도 잘 못하는데 누군가에게 훈계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저 내가 한 번 노력해보고 그 일상의 단순하고 사소한 기록을 써내려가 보려 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성장할 수 있도록. 


단지 나에겐 빡빡하게, 너에겐 넉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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