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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홀 May 24. 2021

쪼잔한 양보라도 건넬게

타인 사랑하기 프로젝트: 나에겐 빡빡하게, 너에겐 넉넉하게

일상적이고 사소한 기적을 바라며

타인 사랑하기 프로젝트는 참 사소한 일상이 담겨있다. 그저 하루를 살면서 부질없이 노력했던 잠시의 경험을 나눌 뿐이니까. 그래도 모든 변화는 일순간 이루어진 작은 부분들이 모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 미세한 하나를 나눔으로 일어날 나비효과를 괜히 기대한다. 그래야 자연도, 개인도, 그리고 공동체도 작은 성장에 근접해질테니까.


어릴 때부터 순서라던가, 물질이라던가 등의 여러 종류(-식탐은 제일 어려웠지만)에 양보하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현상적으로는 '착하다'라는 프레임에 갖히게 했고,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 가깝도록 만들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이미 이해타산적인 속셈을 갖고 윤리적 특성과 괴리된 양보를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특성은 항상 내게 고민이었다. 인지적으로 선해야 하니까 선한 행동을 하지만 감정은 결여되어 있는 것은 진정한 선은 엄밀히 아니기에, 그러나 선한 감정을 결부시키는 것은 자연하게 이루어지므로 나는 선함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인가. 아직도 이에 대한 결론적인 입장은 내리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의 상황판단 능력은 길러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쪼잔한 양보다.


돌아가면 안될까?

욕심은 많아서 취미도 다양하다. 넓으면 얕아지는 원리에 따라 다 깊지는 못하긴 하다. 어쨌든 그 중에 그나마 지속해온 것이 축구였다. 그래서 직장을 힘들어하면서도 짬을 내어 취미 생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그렇게 한 축구 동호회에 가입해있는데, 주에 한 번 정도 두 팀 정도 간신히 나올 정도로 모여 취미를 공유하고 있다.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힘들면 안되리라 걱정했지만, 오랜만에 운동을 다시 시작해서 잠자던 근육들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처음을 제외하고는 적응은 잘 하고 있다. 그래서 매주 운동장에 설 시간을 기다리며 오히려 업무 스트레스를 이겨나가고 있다. 


보통 포지셔닝에 있어 친목 축구회들은 암묵적인 룰을 갖고 있다. 아무래도 활동적인 스포츠인 만큼 공격적으로 자유로운 포지션에 사람이 몰린다. 이에 비해서 비교적 수비수나 골키퍼에 자원하는 이가 드문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 4번 가량의 타임을 소화하는 동안 회전식으로 포지션을 이동한다. 


이 날은 특별히 2주 만에 참여하는 만큼 사실 플레이를 더 기다려왔었다. 그리고 첫 번째 쿼터에는 중원의 지배자라 불리는, 가장 성향과 잘 맞는 미드필더 자리를 맡았다. 그래서 나름 순탄한 시작이라 생각하고 경기에 임했다. 경기 결과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 날 따라 주차난이 심해서 시작 자체가 좀 늦었기 때문에 시작이 늦어져서 짧게 첫 쿼터가 끝났고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두 번째 타임이 되고는 자연스레 자원하여 수비수 위치로 자리를 잡았다. 나름 수비수의 활동량은 적어 쉬어가는 시간이라 여겼고, 즐겁게 임했다.


그런데 난관은 세 번째 쿼터부터 시작했다. 사람이 없어 두 번 정도는 조금은 원하는 자리에서 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 번째도 골키퍼가 필요해서 그냥 먼저 자원했다. 당연히 4번째 쿼터는 적어도 중간이나 전방에서 플레이할 거라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가 시작했는데 배정된 자리는 또다시 수비.


사실 2주를 기다려온 만큼 기대도 컸었기에 과장을 보태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래서 솔직히 팀으로서 열심히 참여할 의지도 사라져갔다. 그렇게 운동하면서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시간 내서 여기에 서있는가
괜히 착한 척 양보했나
하기 싫다


그렇게 부정적 인식이 뇌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가 되어서야 스쳐간 무언가가 있었다.


나에겐 좀 더 빡빡해져 보자.


쪼잔한 양보에 대한 자기 인식

그렇게 보니 주변이 보였다. 먼저는 나보다 양보한 이들이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더 넓게 보니 오늘이 아니더라도 다른 날 선제적으로 배려한 이들도 보였다. 더불어 운영하는 이들의 지속적인 수고도 눈에 띄었다. 그러니 내 양보는 참 쪼잔해 보였다. 남들을 넉넉하게 볼 필요도 없이 이미 넉넉한 마음을 받고 있는 나였다. 


어찌보면 양보하고 있을 때 어쭙잖은 댓가를 바라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쪼잔한 양보다. 사고가 바뀌자 속 시원하게 골이 들어간다. 상대편 골망에도, 내 속좁은 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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