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글쓰기를 파헤쳐 봤다.

삼성전자 부회장의 스피치 원고

by 위트코치 이용만


스피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일단 하려면, 스피치 원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발표를 위해 쓴 글'이 있어야 한다.


스피치 원고는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글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또한 원고는 서론부터 결론까지 완벽한 형식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고,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문장과 격식을 갖춘 글쓰기 실력이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과문'삼성을 대표하는 글쓰기다.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문 전문을 통해, 삼성의 글쓰기를 한번 파헤쳐 보기로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오늘의 삼성은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국민의 사랑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서론에서는 삼성이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국민의 사랑과 관심이라는 입 발린 소리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연설 시작 전, 겉치레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때로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실망을 안겨 드리고 심려를 끼쳐 드리기도 했습니다. 법과 윤리를 엄격하게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기술과 제품은 일류라는 찬사를 듣고 있지만 삼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따갑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희의 부족함 때문입니다.(이 부분은 '팩트'다. 서론에서 사용하는 오프닝 기법으로는 크게 4가지가 있다. '호기심 유발', '청중의 공감대 형성', '스토리텔링', '주제에 대한 간략한 언급' 등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역시 글로벌 일류기업은 다르다. 주제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임재범의 고해에 버금가는 고해성사로 시작한다. 물론, 이 글이 '사과문'이라는 점에서 원고가 두괄식으로 작성되었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저의 잘못입니다. 사과드립니다.(전형적인 '내 탓이오'기법으로 '잘못했다', '용서해달라'는 메시지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저는 오늘 반성하는 마음으로 삼성의 현안에 대해 솔직한 입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 대한 짤막한 요약이다. 예를 들면 "지금부터 제가 스피치를 잘하는 방법 3가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멘트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3가지'라는 말만 빠졌지, 이어질 본문에서는 '경영권 승계', '노사 문제', '준범 감시'라는 3가지 현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순 있으나, 이 한 문장의 힘은 크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작은 차이가, 글쓰기와 스피치의 큰 차이를 만든다.)




먼저 경영권 승계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본론 첫 번째, 경영권 승계를 언급하고 있다.) 그동안 저와 삼성은 승계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질책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삼성에버랜드와 삼성 SDS 건에 대해 비난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승계와 관련한 뇌물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이기도 합니다. 저와 삼성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논란은 근본적으로 이 문제에서 비롯된 게 사실입니다.(사과문이라는 연설에 맞게 잘못을 서두에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반복을 통한 객관적인 문제점들 먼저 언급함으로써 '내 잘못에 대해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당신들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속내까지 알 수 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이제는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법을 어기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문제점을 파악했으니, 이젠 반복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주장이 아니라, 주장에 대한 '근거'이다. 과연 그 근거를 아래에서 어떻게 증명해나갈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스포를 좀 하자면, '자식에게 회장 자리 안 물려주겠다'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대안 말고는 없다. 역시나. 탄탄한 근거 없는 주장은 한낱 잡소리일 뿐.)


이 기회를 빌려(참고로, 이 부분은 올바른 표현이다. 흔히 '이 기회를 빌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이는 틀린 표현이다.) 그동안 가져온 제 소회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14년에 회장님이 쓰러지시고 난 후 부족하지만 회사를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아픈 아빠 소환하며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기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설득의 3요소 중 '파토스'에 해당된다.)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깨닫고 배운 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미래 비전과 도전 의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한 차원 더 높게 비약하는 새로운 삼성을 꿈꾸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하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더 윤택해지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뜬금없는 자소서 '입사 후 포부'가 나오다니. 그나마 '사익뿐만 아니라, 공익까지 챙기겠다'는 달고나 커피 같은 달달한 센스를 잊지 않았다. 세계평화까지 언급하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런데 삼성을 둘러싼 환경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시장의 룰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항상 우리 옆에 있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특히 삼성전자[005930]는 기업의 규모로 보나 IT 업의 특성으로 보나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최고 수준의 경영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갖고 있는 절박한 위기의식입니다.(내용의 급반전을 통해 스스로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뒤에 이어질 내용에 그 위기를 스스로 이겨낼 대안 혹은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교묘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삼성은 앞으로도 성별과 학벌 나아가 국적을 불문하고 훌륭한 인재를 모셔 와야 합니다.(위기 대응의 일환으로 삼성에서도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밑밥을 깔아준다.) 그 인재들이 주인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치열하게 일하면서 저보다 중요한 위치에서 사업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합니다.(자신이 말아먹은 그 책임은 외부에서 데려온 훌륭한 인재에게 자연스럽게 인계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저에게 부여된 책임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삼성은 계속 삼성일 수 있을 것입니다.(이 부분은 문맥상 다음에 나올 '경영권 세습을 하지 않겠다'는 진짜 메시지를 위한 밑밥 정도로 해석된다.)


이 기회에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지금부터가 진짜 핵심이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이게 '찐'이다. 본론 1/3의 핵심이다. 그 내용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오래전부터 마음속에는 두고 있었지만 외부에 밝히는 것은 주저해왔습니다. 경영환경도 결코 녹록지 않은 데다가 제 자신이 제대로 된 평가도 받기 전에 제 이후의 제 승계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이기 때문입니다.(경영권 승계 문제에 대한 주장을 다시 한번 언급하며 재강조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이들까지 팔아먹는 정치인, 경영인들을 충분히 봐왔기에 이런 감성팔이는 더 이상 국민들이 속지 않는다는 점은 간과한 듯하다. 그래도 버리긴 아까운 매력적인 카드임에는 틀림없나 보다. 욕먹을 줄 알면서도 급하면 자꾸 써먹는 걸 보니)




다음은 노사 문제에 대한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본론 두 번째, 노사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삼성의 노사 문화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는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 건으로 많은 임직원들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동안 삼성의 노조 문제로 인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이 또한 사과문이라는 연설에 맞게 잘못을 문단 서두에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문제 인식-사과-대안'전형적인 반성문 레퍼토리다.)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노사관계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고 노동 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습니다. 노사의 화합과 상생을 도모하겠습니다. 그래서 건전한 노사문화가 정착되도록 하겠습니다.(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한 대안 제시다. 문제는 대안의 실천 여부다. 스피치 기법으로 봤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문단 마무리다.)




시민사회 소통과 준법 감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본론 세 번째, 준법 감시를 언급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언론은 감시와 견제가 그 본연의 역할입니다. 기업 스스로가 볼 수 없는 허물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외부의 질책과 조언을 열린 자세로 경청할 것입니다. 낮은 자세로 먼저 한 걸음 다가서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준법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저부터 준법을 거듭 다짐하겠습니다. 준법이 삼성의 문화로 확고하게 뿌리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관련한 재판이 끝나더라도 삼성준법감시위원회는 독립적인 위치에서 계속 활동할 것입니다. 그 활동이 중단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가장 민감한 부분을 가장 마지막에 그리고 짧게 언급한다. 이 사과문의 발단과 삼성으로써 근본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임에도 교묘하게 넘어가려는 꼼수를 어김없이 발휘한 대목이다. 여담이지만, 스피치에서 3가지를 말하겠다고 시작하지만 정작 2가지만 말하고 끝내도 청중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3가지 중에서 첫째, 둘째를 길고 강하게 말하면 마지막 부분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청중의 기억에서 쉽게 잊힐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 조심스럽게 추측컨대, 앞서 모든 부분은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위한 밑밥에 불과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아주 잘 쓰인 반성문이다.)




삼성의 오늘은 과거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미래’입니다. 임직원 모두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고 많은 국민들의 성원도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서론에서 언급했지만, 다시 한번 국민까지 들먹이며 립서비스를 강조해주는 센스) 최근 2∼3개월간에 걸친 전례 없는 위기상황에서 저는 진정한 국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지키는 일에 나선 의료진, 공동체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자원봉사자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많은 시민들, 이런 분들을 보면서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또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제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습니다.(코로나 사태를 통해 국민의 공감대 형성, 그리고 자긍심이라는 단어를 통해 삼성 또한 대한민국의 일환이라는 동질감, 일체감을 조성해준다. 사과문이라는 특성상 감성적인 측면, 즉 파토스에 그 무게를 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습니다.

(이건 따로 메모해두고 써먹을 가치가 있는 클로징 멘트다. 스스로가 삼성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못 박아 버린다. 물론 삼성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인정하지만, 나라의 품격까지 언급한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에서 나온다. 그 자신감에 근거가 있길 바랄 뿐.)


감사합니다.

(역시, 모든 마무리는 '땡큐'!)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살펴봤다. 결론적으로, 사과문이라는 특정 형식에 맞게 잘 쓰인 글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질의응답의 부재와 사과문 내용의 신뢰도랄까.


나 또한 이 기회를 빌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는 이재용 부회장처럼 사과문을 쓰거나(물론 다른 사람이 썼겠지만) 스피치(사과문 낭독)를 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주셨다. 왜냐하면 울 할아버지는 애초에 삼성 같은 회사 따위를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울 아버지께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 꿈이 재벌 2세였는데, 아버지께서 노력을 안 해주셔서? 나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재용 부회장처럼 공개적으로 사과할 일을 미연에 방지해주셨다.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의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글쓰기는 무엇일까.


글. 이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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