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그리는 능력, 마그네슘
유독 조급한 날이 있다. 어제가 그랬고, 오늘이 그랬다. 욕심내어 평소보다 일찍 맞춘 알람은 평소보다 늦게 잠든 어제와 얽혀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을 만든다. 빈속에 커피를 마시며 일하다 갑작스런 가족의 연락을 받는다. 철렁 까지는 아니고 찰팍 마음이 내려앉는다. 기분을 전환하려 새롭게 도전한 식당은 실망스럽고, 랜덤 재생 목록에 좋아하는 노래가 나왔으나 내가 아는 버전과 달라 음절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복잡한 와중에도 일을 놓을 수 없어 눈알이 빠져라 화면을 들여다보다 겨우 마감 시간 전에 메일을 보내고 나면, 머리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간 듯 공허함이 밀려온다. 거기엔 뭘 부어봐도 그냥 주르륵 흘러내리는지라 일을 끝내면 해야지, 했던 천진한 바람들에는 점점 먼지가 쌓인다. 좋아하던 작가의 신작 알림이 반갑지 않고, 오래 다물려 있던 입은 무얼 먹어도 비린내가 난다. OTT에선 각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얼굴들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 없는 사람을 바라보듯 날 쳐다본다.
며칠 뒤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은 행복한 시간이다. 그걸 위해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일상에 쓸 수 있었을 돈을 끌어다 먼 곳으로 떠난다. 그 전에 끝내야 할 것들에 괴롭지만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정량의 불행을 마중물처럼 부어놓아야 행복이 밀려든다는 것을. 그래서 현재의 불행과 미래의 행복을 연결 짓는 것이 바로 행복의 공식이라는 것을.(23.12.13. 미래를 그리는 능력)
어제 평소엔 절대 안 먹던 야식을 먹으며 영화를 봤고, 오늘 아침 일어나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배는 고픈데, 언니가 먹고 싶다는 가게에서 메뉴를 고르는데 정말 먹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사이클은 꽤 자주 반복되는데, 사람에겐 야생 동물처럼 이틀 먹고 이틀 굶는 식의 저장 매커니즘이 없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일정한 양을 최대한 정기적으로 먹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씹는 생각만 해도 양턱이 저려오는 것을 참고 음식을 시켰다. 맛있었다. 특히 양배추가.
한 해를 마무리하며 구묘진의 <악어 노트>를 끝까지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린 이유는 너무 깊이 빠져들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술술 읽히는 섬세한 묘사를 읽다 보면 어느새 코 주변이 전부 축축해진 채로 추위에 떨며 책을 붙잡고 있다. 예쁘기만 했던 표지는 어느새 두려워졌고, 그러다 곧 애틋해졌다. 내 생애 가장 지독한 사랑을 목격했다.
올해는 거의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어린 시절의 집으로 사무치게 돌아가고 싶어졌다. 가족 중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나는 그곳에서 좋았던 기억밖에 없다. 혹은 나빴던 기억, 내 생애 가장 무서웠던 기억 같은 건 전부 지워버렸는지도. 망각의 끝은 끔찍한 환각이라고, 내 환각 속 유년기는 그토록 빛나고 있다. 내 여생은 이제 사라져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풍경을 찰나라도 다시 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휴, 열여섯 살 때 속아서 집을 떠났던 생각이 나네요. 당시 엄마가 기차역까지 나를 데려다주었지요. 같은 마을에 살았던 아이와 함께 타이베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려고 중흥호 열차를 탔답니다. 처음에는 엄마가 기차역 개찰구에서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어요. 그런데 기차가 떠나려고 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사람들을 헤치고 개찰구 앞까지 나오더니 어린아이처럼 막 울더라고요. 그때는 엄마가 왜 우는지도 모르고 왠지 그냥 슬펐을 뿐인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어요." ... "속았다는 표현이 정말 적절하네. 나도 너와 비슷한 나이에 집을 떠나 타이베이로 온 지 어느새 십 년이 지났지. 매번 연휴 때마다 도원의 본가에 가 보면, 집은 그저 잔소리를 하는 노인 둘만 있는 곳으로 변해 있어. 일정 기간마다 돌아가 의무감에 그 곁에서 텔레비전을 봐 드리는 게 전부지! 실은 속아서 집을 떠나온 뒤에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거야."(구묘진, <악어 노트>, 움직씨, p.279-280)
내년에도 내 목을 조르지 않는 보호막이 있는 삶을 살길 바라며 뻔뻔하게 새해를 맞는다.(23.12.31. 마그네슘)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