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 공명?, Fetish
말은 실처럼 계속 늘어진다. 내가 말을 하면 다른 말이 와서 또 붙는다. 말이 또 늘어난다. 말에는 소리가 있다. 그 말은 소리 역시 계속 늘어진다는 뜻이다. 내가 소리를 내면 다른 소리가 와서 붙는다. 소리가 공명한다. 공명한다는 말은 어감도, 뜻도 아름답지만 실제의 경험은 천차만별이다. 공명하는 모든 소리를 생각해 보라. 잔잔하기도, 웅장하기도, 엄숙하기도, 두렵기도,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기도 하다.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오면 귀를 아무리 틀어막아도 귓바퀴를 타고 미끄러져 들어와 머릿속까지 진동한다. 삶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삶의 소리는 공명한다. 삶의 소리가 공명한다는 말은 내가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그 소리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두렵고,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단숨에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저 멀리, 아주 튼튼한 진열장 안에 눈부시게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사실 전시된 것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저 내가 그 앞에 몇 초건, 몇 분이건, 몇 시간이건, 며칠이건, 몇 주건, 몇 달이건, 몇 년이건, 평생이건 서 있었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그 시선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신 앞에 고개 숙인 인간처럼 몸을 한껏 말아 넣어도 여전히 춥다.
얼마 전 친구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창한 건 아니고, 사랑없음이 곧 외로움으로 귀결되는 이 세계의 공식에 관해서. 나는 이제 외로움이 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외롭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없음, 애정 없는 상태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할 때도 외로웠다. 각각의 감정에 두는 무게가 달라서인지도 모른다. 나의 외로움은 사랑 (따위)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문제’는 존재 자체에 있으며, 타인은 나를 다른 공간으로 데려다 놓지만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문제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미친 듯이 외롭다. 하지만 이 외로움의 문제는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철학적 고찰(행복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정론인가, 자유 의지인가?)이나 마찬가지여서, 답이 없다. 생각뿐, 말뿐이다. 웅웅웅 공명하는 소리뿐이다. 난 그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파도가 지나가길 바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이라고 파도를 막아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방파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 온몸으로 파도를 막고 싶다. 이런 글을 쓴다고 해도 내 마음은 아무렇지 않은 이유다. 파도에도 스러지지 않는 바위처럼. (24.03.11. 공명)
먼저 나는 어떠한 정신 질환도 진단받은 적 없음을 밝힌다. 오늘 아침 9시 40분경부터 방에 여자 노랫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밖에서 시위라도 하나, 선거운동이라도 하나, 거실로 나가봤지만 거실에선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용해졌나 싶어 방으로 들어오자 몇 분 후 다시 노래가 시작되었다. 높고 가는 목소리임은 알 수 있지만, 무슨 노래인지, 무슨 가사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평범한 층간 소음이라기엔 울림이 너무 심하다. 마이크라도 들고 있는 걸까? 복도에서 소리를 내어 여기까지 타고 내려오는 걸까? 그러면 왜 거실에선 들리지 않는가? 20분 정도 지난 지금, 잠깐의 정적이 찾아와 그 공허를 타자 소리로 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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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오늘의 일기다. 꿈에 이제는 영영 이해하지 못할 옛사랑이 나왔다.(24.03.14. 공명?)
시는 작은 글씨로, 혹은 멀리서 흐릿하게, 적어도 구겨진 종이에, 아니면 손글씨로 읽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야 이해하는 척이라도, 읽는 척이라도 할 수 있다. 읽기 좋게 큰 글씨로 변환된 시는 얼굴을 찌푸리며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독자의 감상 경험을 절반 이상 망친다. 물론 그게 좋으신 분들은 그렇게 읽으세요.
하지만 시를 이해하는 적도 있다. 곱씹을 것도 없이 미음처럼 들어오는 시가 있다. 입안과 식도, 위를 거쳐 소장, 대장을 거치면서 아무 배설물도 남김없이 흡수되는 시가 있다. 물론 거기에는 어떤 독성이 있을지 몰라서, 향수를 물로 착각해 들이키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24.03.21. Fetish)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