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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ㄱㅍㅇ Oct 27. 2024

2024년 5월(1)

동의하지 않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면



동의하지 않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면 그것은 호르몬, 혹은 생존 본능 때문이다. 까뮈식의 희망이 그렇다. 물론 그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나는 까뮈의 결론 역시 어떠한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저 제정신으로, 명정하게 살아가는 것이 답이라고 말한다. 모든 확정적인 말에 알러지가 있는 나로서는 일단 부정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당신은 살기 싫은 게 아니라 '그렇게' 살기 싫은 것' 류의 격언처럼 들리니까. 하지만 명정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삶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것 아닌가? 부조리를 없애지는 못해도 결국 그 변화를 통해 '행복'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더 나은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그의 논리에 반박하고 싶다가도 나의 몸은 생존에 대한 본능적 욕구로 그저 주저앉아 그 희망을 주워 담는다. 삶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다다랐을 때, 결국 그런 말을 곱씹으며 뇌 속에 의지의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그러고 나면 잠시 머리가 맑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곧 좁디좁은 나의 현실로 되돌아온다. 내 시야는 너무도 좁아 당장 눈앞의 장소, 시간밖에는 보지 못한다. 여러 번 말했듯 행복은 '미래를 그릴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미래를 그린다는 건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인간은 어떠한 희망도 갖지 못하고, 이는 절망이라기보단 암흑, 분절, 결국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가깝다.



까뮈는 왜 그런 결론을 냈을까? 그가 온몸으로 죽음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부조리가 손쉬운 변명처럼 버티고 서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전쟁에 나가 죽던 시기다. 전쟁은 학살이고 자원입대는 자살이자 학살에의 동참이다. 전쟁은 야구가 아니다. 선수 한 명이 나와 만루홈런을 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모든 전쟁은 소모전이고, 대량학살이다. 자원입대자는 궁극적으로 학살에 동의한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동의한다. 까뮈는 전쟁에 나가는 것이 자살이 아닌 이유와, 개인의 가담이 무용하지 않은 이유를 길게 적는다. 그러나 까뮈는 결국 전장을 밟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자살이 아닌 것은 아닐까? 그에겐 이제 목적 없는 고양감만이 남아있다.  하지만 내가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총알이 빗발치는 벌판에서 죽어간 청년들과 까뮈의 차이점은, 그저 그에겐 자신의 '반항'에 관해 적을 수 있는 긴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한때 전쟁에 가장 가까운 나라였던 이곳은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하며,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책상머리에서 고민하는 안락한 철학자들의 땅이 되었다. 그런 곳에 살면 누구라도 미쳐버린다. 정말 미친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부조리에 정면으로 응대하는 운동가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며, 까뮈의 논리에도 정당성이 부여된다. 결국 나는 부조리를 대면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알더라도 맞설 생각이 없다. 나는 알지 못한다. 거기서 슬픔이 나온다. 슬프다는 것은 부조리를 느끼는 것과 다르다. 나는 그저 슬퍼하고 있을 뿐이고, 행복하지 않을 뿐이다. 미래를 그리지 못할 뿐이고, 희망조차 갖지 못하며, 내 세상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도망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최대한 빠르고 최대한 아프지 않게. 내 몸이 아니라 내 세상이 아프지 않게. 그 부조리가 흠집 하나 없이 영원히 계속되게. 그렇게 나는 정신을 져버리고 부조리에 부역한다.(24.05.03. 동의하지 않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면)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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