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 없는 일기, 사탄탱고
지난 한 달 정도 일기 재활을 시도한 글을 둘러보았다. 그 글에는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연민이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한 연민. 자기 연민은 종종 오만으로 읽힌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 연민이 없이 일기를 쓸 수 있을까? 자신을 애틋하고 가엾게 바라보는 시선 없이 자기 삶을 기록할 수 있을까? 지난 몇 달간 나는 나 자신이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기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음 쓴 아침 식사를 하고 남들의 반절만큼 일하며 남들의 반절만큼 벌었다. 남들의 반절만큼 원하기에 남들의 반절만큼 얻는 것이 당연하다. 모든 게 당연한 세상에는 사유할 것이 없다. 그렇기에 기록할 것이 없다.
자기 연민이 없어지니 나는 비로소 한국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무런 삶의 대입 없이 그들을 미워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 향기와 악취 모두 향수 가게를 가득 채운 냄새에 익숙해지듯 아무렇지 않게 맡을 수 있었다. 인간의 삶은 산소 중독으로 시작된다고 했던가. 이미 산소에 중독된 이상, 우리는 우주로 나갈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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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일기가 잘 써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내가 자기 연민과 일기의 상관관계를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전까지 사라졌던 자기 연민이 짧은 휴일에 배출되어 나의 저수지로 쏟아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이장욱의 시를 읽으며 내가 웃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승자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내가 불쌍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할 때 비로소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게 망상과 연민으로 두개골의 숨구멍을 모두 덮어버리고 나서야 현실이라는 산소 중독에서 벗어나 우주로 날아갈 수 있다.(24.10.14. 자기 연민 없는 일기)
새는 영화를 즐길 수 없는 종(種)이다. 비상(飛上)이 일상을 대체하고 추락이 오락을 대체하는 이들에게 작고 네모난 화면에 갇혀 총천연색으로 착취당하는 동족의 모습이 유희일 리 없다. 이렇게 미디어는 대상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들을 착취한다.
기묘하다. 나는 어쩐지 카프카에 끌리고, 내가 어쩐지 끌리는 작가들 역시 카프카에 끌리고, 내가 어쩐지 끌리는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의 원작자 역시 카프카에 끌린다. 이는 오늘 막 완독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소설의 맨 앞 장에는 카프카의 미완성작, <성>의 인용구가 제사(題辭)로 나온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 나는 늘 스스로 미완의 인간이라 생각하는데, 이들 역시 미완의 효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기합리화는 인간의 본성이 맞나 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내가 무언가를 완성하지 못하는 것 역시 내가 그리는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들을 착취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엔 그것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미디어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만을 지적하는 것 역시 결국엔 미완을 합리화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사탄탱고> 속 인물들은 곧잘 타락하다가도 작은 희망의 불씨에 매혹되어 근면하게 붙잡아왔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화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때 미완의 상태에 안주하게 만드는 이 희망은 신의 것인가, 사탄의 것인가? 희망이 악(惡)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희망이 방증하는 것이 나의 어리석음일지, 아니면 혁명일지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므로.(24.10.22. 사탄탱고)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